8/30/2024
"주는 나의 반석과 산성이시니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생각하셔서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 그들이 나를 위하여 비밀히 친 그물에서 빼내소서 주는 나의 산성이시니이다" (시 31:3-4)
사는게 전쟁입니다. 물론 소소한 행복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긴장과 치열함과 수고가 떠나지 않습니다. 그래도 이정도면 좀 버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작정하고 덤비는 적이 문제입니다. 그들은 말그대로 적입니다. 그들의 목적은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우리를 꺾지 않으면 자신들이 죽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동기와 방법은 교활하고 사악합니다. 그들에게 사랑과 자비와 긍휼 같은 것은 아예 없습니다. 그들은 빛의 천사처럼 자신들을 포장합니다. 또한 우리의 약점을 파고들어 나쁜짓 하는데 탁월합니다. 그들은 우리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을만큼 강합니다. 이 적의 공격을 어떻게 해야할까요? 우선 적의 정체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자신을 잘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보다 먼저인 것이 있습니다. 바로 주님이 어떤 분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사실 주님을 알지 못한채 적과 자신을 아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여기 다윗의 삶도 전쟁이었습니다. 그 앞에는 적들이 비밀리에 친 그물이 있습니다. 거기 한번 걸려들면 그대로 끝장입니다. 아무 생각없이 지나다가 졸지에 당할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뻔히 알면서도 당하기도 합니다. 여기 다윗이 적의 공격에 대처하는 법을 보십시오. 그는 스스로 어떻게 해보려고 덤비지 않습니다. 적의 공격이 두려워 주저앉아 있지도 않습니다. 그는 철저히 주님의 인도하심을 의지합니다. 주님은 당신의 이름을 걸고 바른길로 인도하실겁니다. 이것은 마치 아이가 엄마 손을 붙잡고 한걸음씩 걷는 모습입니다. 엄마가 아이를 어떻게 데리고 다니겠습니까? 다윗에게 주님은 "나의 반석과 산성"이십니다. 또한 "나의 피난처"이십니다. 주님이 이런 분이시면 적의 공격도 문제 없습니다. 오늘 적은 어떤 형태로든 우리를 공격할겁니다. 하지만 이 아침 주님이 누구신지를 묵상하십시오. 그리고 주님 손 붙잡고 인도하시는대로 따르십시오. 이것이 안전한 길입니다. 주님, 당신은 "나의 반석과 산성과 피난처"이십니다. 오늘 당신의 이름으로 저희를 인도해주십시오. 적의 어떤 공격에도 안전하게 지켜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겔 22-24장>
8/29/2024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영원히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 주의 공의로 나를 건지소서 내게 귀를 기울여 속히 건지시고 내게 견고한 바위와 구원하는 산성이 되소서" (시 31:1-2)
꼭 급박한 일이 생깁니다. 급히 911에 전화할 일이 있습니다. 병원 응급실을 찾아야 할 일도 있습니다. 기술자나 친구나 가족을 급히 부를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또다른 긴급 연락처가 있습니다. 바로 우리 주님입니다. 어떻게 주님께 연락합니까? 급박할 때 "주님" 하고 외치면 됩니다. '주님, 도와주세요'라고 부르짖는 것입니다. 여기 다윗에게 급박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다윗의 평생은 이렇게 급박한 일로 가득합니다. 다윗처럼 급박한 일이 떠나지 않는 인생들이 있습니다. 매일매일이 지뢰밭을 걷는 듯한 느낌입니다. 그러다가 이곳저곳에서 순식간에 터지는겁니다. 지금도 다윗 앞에 뭔가 큰 일이 터졌습니다. 여기 그의 부르짖음을 보면 상황이 얼마나 급박한 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주님께 "속히" 건져달라고 호소합니다. 주님이 즉시 건져주시지 않으면 큰일난다는 것입니다. 그는 또한 자신을 영원히 부끄럽게 하지 마시기를 간청합니다. 그는 주님이 이대로 내버려두시면 영원히 끝장이라는 절박함으로 기도합니다. 이렇게 죽게 된다면 그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수치가 될겁니다. 언젠가 한번은 죽지만 이렇게 죽을 수는 없었습니다. 여기서 다윗이 붙잡고 기도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주님의 "공의"입니다. 자신이 여기서 이렇게 당하는 것은 공의에 맞지 않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공의가 제대로 작동한다면 자신은 반드시 살아남아야 합니다. 오히려 자신을 곤경에 빠뜨린 자들이 주님의 진노를 받아 부끄럽게 되어야합니다. 생사를 가르는 중요한 순간에 주님의 공의가 역사하는 것입니다. 어떻게하면 이렇게 될 수 있을까요? 평소 주님의 공의를 잘 알아야합니다. 나아가 주님의 공의를 따라 행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주님의 공의가 우리의 체질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급박한 중에도 주님의 공의를 의지하게 됩니다. 주님, 당신의 공의를 알게 해주십시오. 당신의 공의를 행하게 해주십시오. 위급한 상황에서도 공의를 의지하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겔 19-21장>
8/28/2024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이는 잠잠하지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시 30:11-12)
너무 좋으면 춤추게 됩니다. 춤 솜씨가 무슨 상관입니까? 그냥 기뻐서 추는겁니다. 언제 이렇게 해 본 적이 있습니까? 살면서 몇번이나 이럴 수 있을까요? 평소 이 정도로 기쁠 일은 흔치 않습니다. 드물게 있는 극적인 반전이 이런 기쁨이 됩니다. 예를 들어, 오랜 어려움이 순식간에 복이 된다든지, 늘 안쓰럽던 자식이 어느날 우뚝 선다든지 하는 것입니다. 마치 거의 다 진 축구경기가 마지막 순간 뒤집어지는 것같은겁니다. 여기 다윗에게 극적인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얼마전만 해도 그는 아파서 죽을 것 같았습니다. 더욱이 이 고통과 위험은 다름 아닌 자신의 잘못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순간 그가 주님의 은혜를 잊고 자기 맘대로 산 것입니다. 결국 그동안 산처럼 굳건하던 것들이 흔들렸습니다. 이제 그가 할 것은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바로 부르짖어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만일 주님께로부터 아무 조치가 없으면 그냥 끝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설사 주님이 거절하셔도 다른 할 말이 없습니다. 그때 그가 매달린 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움직이면 다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로 그는 죄를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은혜로 치유받고 벌떡 일어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은혜로 그의 삶은 다시 산처럼 견고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주님의 은혜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에게 기쁨이 되고 춤이 됩니다. 이것은 자신만의 즐거움에서 끝날 수 없습니다. 곧바로 주님을 향한 찬양과 감사가 됩니다. 그는 마음으로부터 주님을 찬양합니다. 또한 그는 영원히 주님께 감사할겁니다. 주님의 은혜로 구원을 경험했습니까? 그렇다면 이미 한번은 극적인 반전을 경험한겁니다. 극적이지는 않아도 매일 경험하는 은혜가 있습니다. 오늘도 은혜의 기쁨을 누리기 바랍니다. 이 기쁨이 주님께 찬양과 감사로 올려지기 바랍니다. 주님, 당신의 은혜로 새로와지게 해주십시오. 은혜로 저희 삶을 굳건하게 하옵소서. 오늘 은혜의 기쁨으로 기뻐하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겔 17-18장>
8/23/2024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무덤으로 내려가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 (시 30:2-3)
아파 죽을것 같은 때가 있습니다. 당연히 의사의 바르고 신속한 진단과 처방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먼저 주님께 부르짖어야 할 때이기도 합니다. '낫게 해달라,' '아프지 않게 해달라,' '살려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르짖는 것은 주님은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님은 기꺼이 해주실 것입니다. 주님은 내 아픔과 위험을 이미 잘 아십니다. 이런 때는 부르짖으라고 미리 명령하셨습니다. 부르짖으면 응답하겠다고 약속까지 하셨습니다. 아파 죽을것 같은데 낫는 것말고 무슨 관심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주님께 살려달라고 부르짖는 것입니다. 여기에 무슨 복잡한 말이 필요합니까? 놀랍게도 주님의 치유가 실제로 일어납니다. 그런데 사실은 몸이 낫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주님은 이 과정을 통해 다른 중요한 일을 이루십니다. 주님의 주권과 사랑과 능력이 영광으로 나타납니다. 또한 주님을 향한 내 믿음은 인내와 함께 더 여물게 됩니다. 여기 다윗의 경우도 그랬습니다. 다윗은 병들어 죽게된 상황이었습니다. 너무 아파서 마치 '스올,' 곧 죽음 아주 가까이에 이르렀습니다. 마치 한발만 더 가도 죽는 것같은 위험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때 다윗이 한 것이 부르짖는 기도였습니다. 주님은 이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의 병을 고쳐주십니다. 그의 생명을 스올에서 끌어내시고 무덤에 내려가지 않게 하신 것입니다. 이제 다윗의 몸은 극적으로 회복되었습니다. 다윗에게 이 가뿐해진 몸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하지만 그에게 더 좋은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의 부르짖음을 들어주신 주님입니다. 주님을 경험하는 것만큼 좋은게 어디 있습니까? 우리에게 아픈 것만큼이나 힘든 다른 일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주님을 경험하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 주님께 부르짖어 아뢰십시오. 주님, 저희 병약함을 고쳐주십시오. 문제와 고통에서 저희를 건져 주십시오. 오늘 당신을 생생하게 경험하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겔 7-8장>
8/24/2024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라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시 30:4-5)
고속도로를 지나다보면 터널을 만납니다. 짧은 것도 있지만 꽤 긴 터널도 있습니다. 한적한 터널이 있는 반면에 시내를 통과하는 아주 복잡한 것도 있습니다. 어떤 터널이든 한가지는 분명합니다. 바로 끝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길어도 끝이 있습니다. 아무리 복잡해도 끝은 나옵니다. 우리가 겪는 고통도 마찬가지입니다. 고통을 겪어본 사람은 압니다. 사실 고통받을 때는 시간이 멈춘 것같습니다. 1초가 1년 같이 느껴집니다. 또한 고통의 순간에는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됩니다. 많은 문제와 짐이 한꺼번에 몰려와 눈앞이 깜깜해집니다. 하지만 이 고통도 끝이 있습니다. 지나고 보면 신기하게도 고통은 잠깐입니다. 긴 고속도로에 가끔 있는 터널 같은 것입니다. 산모의 고통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세상이 노랗게 보이는 산고도 결국은 지나갑니다. 핍박도, 수고와 슬픔도, 좌절도, 가난도, 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터널을 지나면 밝고 시원한 길입니다. 고통이 지나면 신비한 은혜가 옵니다. 산모의 고통은 아기를 보는 기쁨이 됩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요 16:20-21). 다윗도 지나고 보니 주님의 노여움은 잠시였습니다. 그의 병은 그가 지은 어떤 잘못때문에 생긴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결국 지나갔습니다. 대신 평생 주님의 은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저녁에 울었지만 아침에는 기쁨이 온 것입니다. 지금 어떤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까? 그것이 무엇이든 잠시뿐일겁니다. 지금도 주님의 은혜와 기쁨은 다가오고 있습니다. 주님, 저희 고통을 살펴주십시오. 이 터널을 믿음과 인내로 잘 지나게 해주십시오. 당신의 은혜와 기쁨을 누리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겔 9-10장>
8/22/2024
"여호와여 내가 주를 높일 것은 주께서 나를 끌어내사 내 원수로 하여금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못하게 하심이니이다" (시 30:1)
내 몸이 내 한 몸이 아닙니다. 내가 쓰러지면 당장 힘들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굳건히 서 있어야 할 이유입니다. 그런데 내가 쓰러지면 좋아할 사람이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이것 또한 내가 굳건히 서야 할 이유입니다. 그가 기뻐할 여지를 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여기 다윗은 병으로 쓰러져 있습니다. 그는 거의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그의 상태는 "주께서 나를 끌어내사"라는 표현에 암시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그를 죽음에서 끌어내셨다는 것입니다. 마치 깊은 우물에서 물을 끌어올리듯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다윗은 지금 죽을 병에서 건져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그런데 이것만이 아닙니다. 자신이 죽게 된 것을 지켜보는 또다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다윗의 원수입니다. 다윗이 잘못되기를 늘 바라고 있는 사람입니다. 만일 여기서 다윗이 영영 못일어났다면 그는 박수치며 기뻐했을겁니다. 하지만 그가 바라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아슬아슬한 시간을 지나 결국 다윗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습니다. 더 정확히는 주님이 다윗을 일으키신겁니다. 그 원수는 이제 기뻐할 기회를 빼앗기고만 것입니다. 다윗이 주님께 찬양드리는 또다른 이유가 이것입니다. 만일 주님이 자신을 치유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원수는 기뻐하며 떠들어댔을겁니다. '거 봐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의 도움 같은 것은 없어. 하나님이 있더라도 무능하거나 무관심한 분일뿐이야. 네 믿음은 이렇게 허무하게 끝난거야. 결국 내가 이겼어.' 내 한 몸이야 어떻게되든 이런 결과는 결코 안됩니다. 다윗의 회복은 원수의 이런 기쁨을 막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잘못되는 것을 바라는 원수가 있습니다. 바로 악한 영적 세력입니다. 우리가 쓰러지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원수가 이로 인해 기뻐하며 기고만장할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모독하며 우리를 놀려댈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 꼴을 보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절대로 잘못되지 말아야할 이유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도우심이 꼭 필요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주님, 저희를 병약함에서 건져주십시오. 오늘 저희가 잘못되지 않게 지켜주십시오. 악한 영적 세력이 저희가 잘못되는 것을 기뻐하는 일만큼은 막아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겔 4-6장>
8/21/2024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시 29:11)
힘이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사람 힘이 내 힘이 되는 것입니다. 그의 따뜻한 마음이 격려가 됩니다. 그의 지혜로 내 눈이 밝아집니다. 그의 기술로 내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의 음식이 내게 영양이 됩니다. 그가 아는 사람들이 내게도 자산입니다. 그의 부지런함이 내게 풍요가 됩니다. 그의 품격이 나를 덩달아 으쓱하게 합니다. 이런 사람 한명이 복입니다. 가장이 이런 사람이면 온가족이 신납니다. 지도자가 그러면 모든 멤버가 행복합니다. 주님이 그러시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요? 다윗은 이 시편을 마무리하며 선포합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이 시편에서 주님은 폭풍같은 분입니다. 그 앞에서 모든 자연이 굴복할만큼 힘있는 분입니다. 하늘의 천사도 경배해야 할 분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피조물이 영광을 돌려야 할 분입니다. 주님께는 창조주의 힘이 있습니다. 또한 주권자의 힘도 있습니다. 주님의 힘은 심판에도 나타납니다. 누가 감히 주님의 심판에 맞서겠습니까? 하지만 이 주님의 힘이 당신의 백성에게 힘이 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것으로 살게 됩니다. 우리에게 '주님의 뜻'이 이루집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을 위해 헌신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성품'을 닮아갑니다. 우리는 '주님의 지혜와 능력'으로 싸웁니다. 우리는 '주님의 품' 안에 숨기도 하고 쉬기도 합니다. 또한 우리는 '주님의 자원'을 사용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람들'과 함께 일합니다. 우리는 매일 '주님의 공급'으로 생존합니다. 오늘도 '주님의 인도'따라 하루를 삽니다. 이렇게 주님은 우리에게 힘이 되십니다. 이것은 다윗이 얘기한 것처럼 "평강의 복"이 됩니다. 이것은 마치 홍수가 노아와 그 가족에게는 구원의 힘이 된 것과 같습니다. 이 힘은 홍수가 쓸어버린 땅 위에서 새롭게 시작된 삶이었습니다. 이 평강은 그때 그들에게 나타난 무지개 같은 것입니다. 주님께 힘을 얻고 있습니까? 주님의 평강이 있습니까? 주님은 힘과 평강을 주시는 분입니다. 주님, 당신의 힘을 주십시오. 평강의 복을 주십시오. 오늘 '주님의 힘'으로 살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겔 1-3장>
8/20/2024
"여호와께서 홍수 때에 좌정하셨음이여 여호와께서 영원하도록 왕으로 좌정하시도다" (시 29:10)
흔히들 '과거는 현재의 거울'이라고 합니다. 과거의 여러 요소가 현재를 만듭니다. 따라서 과거를 들여다보면 현재가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현재를 잘 이해하면 미래의 좌표도 분명해집니다. 이렇게 역사는 얽히고설켜서 흘러갑니다. 성경에 나오는 과거 이야기는 어떻습니까? 이것이 현재를 만든 요소라는 면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성경 이야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주님입니다. 성경 이야기의 주인공이면서 이것을 통해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주님은 과거에 계셨던 것처럼 지금도 계십니다. 과거를 주관하신 것처럼 현재도 그렇게 하십니다. 이것은 미래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이 과거 아브라함, 모세, 다윗과 함께 하셨던 바로 그 주님입니다. 주님 때문에 성경 이야기는 오늘 우리에게 직접 해당되는 말씀이 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다윗에게 주님은 과거 홍수 때에 좌정하셨던 분입니다. 홍수는 노아 때의 바로 그 홍수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홍수가 일어났는지 잘 압니다. 또한 그것이 어떻게 세상을 휩쓸었는지도 압니다. 이 홍수 뒤에는 이것을 주관하신 주님이 계셨습니다. 이 홍수가 주님의 위엄이었습니다. 세상의 어떤 존재도 그 위엄에 저항할 수 없었습니다. 주님의 위엄은 죄인들에게는 심판의 공포였습니다. 하지만 의인 노아와 그 가족들에게는 구원과 소망이었습니다. 바로 동일한 주님이 이 시편의 폭풍 뒤에 계시는겁니다. 홍수 때처럼 이 폭풍에도 주님은 왕으로 좌정하십니다. 홍수와 같이 이 폭풍이 바로 주님의 위엄입니다. 이 위엄 앞에서는 바다도, 나무도, 산도, 광야도, 동물도, 숲도 다 엎드립니다. 결국 하늘과 땅의 모든 피조물이 "영광"이라고 외칩니다. '지금 여기서'도 주님의 위엄은 그대로입니다. 주님의 위엄은 이렇게 자연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하지만 이것은 다른 다양한 방식으로도 나타납니다. 주님의 말씀에 주님의 위엄이 있습니다. 주님의 경계, 꾸중, 징계, 명령, 심지어는 격려와 사랑에 주님의 위엄이 있습니다. 주님이 행하시는 손길에도 주님의 위엄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주님의 위엄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위엄을 보기 바랍니다. 주님, 당신의 위엄을 보게 해주십시오. 당신 앞에 엎드리게 해주십시오. 오늘 당신의 뜻을 이루시옵소서.
<오늘의 성경읽기 애 3-5장>
8/19/2024
"여호와의 소리가 광야를 진동하심이여 여호와께서 가데스 광야를 진동시키시도다 여호와의 소리가 암사슴을 낙태하게 하시고 삼림을 말갛게 벗기시니 그의 성전에서 그의 모든 것들이 말하기를 영광이라 하도다" (시 29:8-9)
"치킨은 언제나 옳다"라는 유행어가 있습니다. 치킨은 실망시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치킨은 언제 먹어도 맛있다는 말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옳다," "시작은 언제나 옳다"라는 책 제목도 있습니다. 이 말은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칭찬은 언제나 옳다," "걷기는 언제나 옳다," "정직은 언제나 옳다," 등입니다. 사실 주님이 행하시는 일이야말로 언제나 옳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이것을 다 깨닫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이것을 알게 됩니다. 여기 폭풍같은 주님의 위엄도 마찬가지입니다. 폭풍은 이미 지중해 바다를 뒤흔들었습니다. 폭풍치는 바다의 높고 사나운 파도를 상상해보십시오. 이 폭풍은 상륙해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꺾고 산들을 뒤집었습니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폭풍은 가데스 광야까지 휩쓸고 있습니다. 광야를 뒤덮은 어마어마한 모래바람을 생각해보십시오. 무엇이 이 바람을 견딜 수 있겠습니까? 이 폭풍은 잉태한 암사슴도 낙태하게 만듭니다. 우거진 수풀조차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말갛게 벗겨지고 맙니다. 이것이 폭풍의 위력입니다. 바다, 나무, 산, 광야, 동물, 숲까지 다 그 앞에 엎드립니다. 주님의 소리가 바로 그렇습니다. 주님의 소리 앞에 산, 바다, 땅, 나무와 동물, 모두가 엎드립니다. 이것은 피조물이 창조주를 향해 가지는 겸손 같은 것입니다. 종이 주인을 향해 가지는 경외심과도 비슷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어떤 공포심과는 다릅니다. 물론 심판과 연관해서는 이런 공포가 있을겁니다. 하지만 믿는 사람에게는 아버지를 향한 두려움 같은 것입니다. 다윗은 "그의 성전에서 그의 모든 것들이 말하기를 영광이라 하도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성전은 하늘의 성전과 그것의 그림자인 땅의 성전 둘 다를 말합니다. "그의 모든 것들"은 하늘의 천사들을 포함해서 모든 피조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모두가 주님을 향해 드리는 한마디가 바로 "영광"입니다. 이 "영광"이라는 반응은 주님을 주님으로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주님이 구원자이시고 우리는 은혜를 입은 자입니다. 주님이 주권자이시고 우리는 종입니다. 결국 주님의 위엄 앞에서 "영광"이라고 할겁니다. 하지만 지금도 바로 "영광"이라고 하기 바랍니다. 주님, 당신의 위엄을 보게 하옵소서. 당신께 "영광"이라고 하게 하옵소서. 오늘 당신의 피조물로, 종으로, 자녀로 살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애 1-2장>
8/17/2024
"여호와의 소리가 백향목을 꺾으심이여 여호와께서 레바논 백향목을 꺾어 부수시도다 그 나무를 송아지 같이 뛰게 하심이여 레바논과 시룐으로 들송아지 같이 뛰게 하시도다 여호와의 소리가 화염을 가르시도다" (시 29:5-7)
인간이 왜소해 보일 때가 있습니다. 바로 태풍, 허리케인, 지진같은 재해가 생길 때입니다. 과학과 문명이 그렇게 발전했어도 이때만큼은 무력합니다. 물론 비교적 정확하게 재해의 경로, 지역, 규모까지 예측합니다. 방송이나 셀폰 알람을 통해 경고와 대피 안내까지 이루어집니다. 사람들은 대비와 대피를 통해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기도 합니다. 또한 재해가 지나간 다음에는 어떻습니까? 많은 인력과 장비가 투입되어 신속한 복구가 진행됩니다. 좋은 나라일수록 믿음직한 사회 시스템이 복구를 위해 총동원됩니다. 인간이 이렇게까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허리케인이나 지진 자체는 어떻게 하지 못합니다. 허리케인은 원하는대로 휩쓸고 지나갑니다. 지진도 자기가 하고싶은대로 뒤집어 놓습니다. 허리케인이나 지진을 막아보겠다고 덤비는 사람은 없습니다. 간혹 연구나 구조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접근하는 사람만 있을 뿐입니다. 여기 다윗은 바다에서 일어난 폭풍이 어떻게 육지를 휩쓸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 폭풍은 레바논의 백향목을 꺾어 부숩니다. 폭풍이 지나가는 길의 나무는 마치 송아지가 날뛰듯이 튕겨져 나갑니다. 레바논과 시룐은 산악지방입니다. 산이 들송아지 같이 뛴다는 것은 지진으로 뒤집어지는 모습입니다. 이때 불길도 하늘로 치솟아 오릅니다. 폭풍으로 상징되는 주님의 소리가 이렇게 위력적입니다. 폭풍의 위력은 종종 심판하시는 주님의 위엄을 연상시킵니다. 하지만 이것은 주님의 위엄이 보여주는 시원하고 신나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레바논의 백향목이 사람들에게 어떤 나무였겠습니까? 또한 레바논과 시룐의 산은 어땠을까요? 하지만 주님의 위엄 앞에서는 순식간에 뽑히고 뒤집어질 뿐입니다. 그 어떤 대단한 것이라도 이렇게 주님의 위엄 앞에서는 버티지 못합니다. 아무리 크고 단단한 나무도 폭풍에 꺽이고 언제나 든든한 산도 지진에 무너지는 것과 같습니다. 스스로 잘난 사람이 있습니다. 남들이 추켜 세우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위엄 앞에 서 보십시오. 그 앞에서 누가 고개를 뻣뻣이 들고 있겠습니까? 주님의 위엄 앞에서는 그냥 엎드릴 뿐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위엄 앞에서 이 하루를 시작하기 바랍니다. 주님, 당신의 위엄을 알게 해주십시오. 그 위엄 앞에 엎드리게 해주십시오. 오늘 당신의 위엄 앞에서 살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렘 49-50장>
8/16/2024
"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이 우렛소리를 내시니 여호와는 많은 물 위에 계시도다 여호와의 소리가 힘 있음이여 여호와의 소리가 위엄차도다" (시 29:3-4)
주님에 대한 다양한 표현이 있습니다. 물론 그 어느 것도 주님을 다 담아내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그 각각은 나름의 방식으로 주님을 나타냅니다. 예를들어, 주님의 위엄에 대한 한 표현은 '왕'입니다. 또다른 표현은 '심판자'입니다. 이런 이미지는 주님의 위엄을 느끼는데 도움이 됩니다. 여기서 다윗은 주님의 위엄을 '폭풍우'로 묘사합니다. 폭풍우는 누구에게나 익숙하고 생생합니다. 폭풍우에 대해서 무슨 다른 설명이 필요하겠습니까? 다윗은 지금 지중해에서 일어나는 폭풍우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중해에 폭풍우가 심하게 일어나는 기간이 있습니다. 이 기간 동안 항해는 대개 금지되거나 꺼려졌을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풍우를 만나는 배는 꼭 있었습니다. 어느날 바다 한복판에서 갑자기 폭풍우를 만났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삼킬 듯 다가오는 이 폭풍우의 위력이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의 위엄이 바로 이렇다는 것입니다. 폭풍우 가운데 나는 천둥소리는 또 어떻습니까? 예나 지금이나 천둥소리에 무덤덤한 사람은 거의 없을겁니다. 주님의 소리가 이 천둥소리같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이 표현에 바다와 바람과 천둥을 만드신 창조주의 위엄이 담겨 있습니다. 또한 이것들을 그 뜻대로 다스리시는 주권자의 위엄도 있습니다. 천둥소리같은 주님의 소리는 마치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아울러 지금도 말씀으로 명령하시는 모습도 보입니다. 지금 다윗의 시편 속으로 한번 뛰어 들어가 보십시오. 바다 가운데에서 거대한 위력으로 닥치는 폭풍우를 진짜처럼 느껴보십시오. 그 폭풍우 가운데서 치는 무서운 천둥소리를 생생하게 들어보십시오. 그리고 거기서 주님의 위엄도 느껴보십시오. "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이 우렛소리를 내시니 여호와는 많은 물 위에 계시도다 여호와의 소리가 힘 있음이여 여호와의 소리가 위엄차도다." 주님, 저희의 무딘 가슴을 일깨워 주십시오. 당신의 위엄을 폭풍우와 천둥소리만큼 생생하게 느끼게 해주십시오. 오늘 저희에게 당신의 말씀을 들려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렘 46-48장>
8/15/2024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 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시 29:1-2)
알고보면 멋진 사람이 있습니다. 그에게서 이전에 못보던 멋진 모습을 보게됩니다. 그 모습이 놀라우면서 참 신선합니다. 그를 생각하면 왠지 든든하고 흐뭇합니다. 마치 무엇이든 편하게 부탁할 수 있을 것같습니다. 사람들을 볼 때마다 그 사람 멋있다고 칭찬합니다. 만일 그들도 정말 맞다고 하면 더 신이 납니다. 칭찬은 이렇게 개인을 넘어 사람들 사이에 넓게 퍼지게 됩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점이 있습니다. 칭찬보다 먼저는 역시 칭찬할만한 내용입니다. 멋진 사람에 대한 칭찬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괴로움일 뿐입니다. 주님을 향한 찬양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찬양보다 먼저는 주님의 모습입니다. 다윗은 "권능 있는 자들," 곧 하늘의 천사들을 향해 외칩니다.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 여기서 영광과 능력은 누구의 것일까요? 이것은 우리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 영광과 능력을 주님께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주님 것입니다. 주님의 것을 주님께 드린다는 것입니다. 다른말로 주님의 영광과 능력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곧 그것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영광과 능력이 없다면 이런 신뢰도 없습니다. 이것은 먼저 다윗 개인의 반응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자신을 넘어 하늘의 천사들의 반응도 되어야합니다. 주님의 영광과 능력은 하늘과 땅이 함께 신뢰해야할 것입니다. 다윗은 계속 "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라고 촉구합니다. 주님의 이름은 주님의 성품, 행동, 말씀같은 계시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런 계시에 주님의 영광이 있습니다. 다윗 자신은 이런 영광스러운 계시를 인정하고 신뢰합니다. 하늘의 천사들도 그렇게 해야할 것입니다. 다윗은 또한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라고 외칩니다. 거룩함은 주님의 것입니다. 다윗 자신에게 있는 거룩함은 다 주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다윗은 주님의 거룩하심을 인정하고 신뢰합니다. 이제 하늘의 천사들도 거룩하신 주님께 예배드려야합니다. 오늘 이렇게 주님을 찬양하십시오. 주님께 영광과 능력이 있습니다. 주님의 계시가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거룩하심이 있습니다. 주님, 당신의 영광과 능력을 찬양합니다. 당신의 이름을 신뢰합니다. 거룩하신 당신께 엎드립니다. 저희 경배를 받아주옵소서.
<오늘의 성경읽기 렘 43-45장>
8/14/2024
"여호와는 그들의 힘이시요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의 구원의 요새이시로다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며 주의 산업에 복을 주시고 또 그들의 목자가 되시어 영원토록 그들을 인도하소서" (시 28:8-9)
대개 '엄마'는 강합니다. 많이 배우지 못해도 엄마는 똑똑합니다. 많은 것을 가졌어도 쉽게 내려놓습니다. 썩 건강하지 못해도 힘이 넘칩니다. 성격이 얌전해도 용감합니다. 성격이 급해도 끝까지 기다립니다. 실망스러운 일에도 쉽게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바로 챙겨야할 자식때문입니다. 엄마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혼자 잘먹고 잘사는 것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비록 자신은 힘들어도 자식이 편하면 됩니다. 엄마가 자신의 건강을 열심히 챙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조차 자식을 위해서 하는 엄마가 있습니다. 큰 위기에 놓인 엄마는 자식 생각하면서 그 상황을 이겨냅니다. 이것이 대개 엄마가 사는 방식입니다. 아마 챙겨야할 사람이 있다면 누구나 비슷할겁니다. 여기 다윗은 어떻습니까? 다윗에게는 아래로 챙겨야할 백성이 있습니다. 그는 백성을 챙기라고 기름부음받은 왕입니다. 백성은 그를 바라보며 살고 있습니다. 그와 백성은 운명 공동체입니다. 지금 자신이 무너지면 백성이 위험해집니다. 자신의 구원이 백성의 구원과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을 위한 절박한 기도는 여기서 백성을 위한 기도가 됩니다. 그는 먼저 그들을 구원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이것은 안전을 위한 기도입니다. 또한 주의 산업에 복을 주시도록 기도합니다. 주님의 백성이 주님께 복받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이 그들의 목자가 되시도록 기도합니다. 주님이 이 백성을 영원토록 인도해주시도록 기도합니다. 왕으로서 다윗이 이보다 잘하는 것이 있겠습니까? 오늘도 우리가 챙겨야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저런 일들이 우리를 기다립니다. 하지만 그들을 주님께 부탁드리는 것보다 먼저인 것은 없습니다. 주님이 친히 그들의 안전과 복과 목자가 되신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주님, 저희에게 맡기신 사람들을 지켜주십시오. 저들에게 당신의 복을 주십시오. 저들의 목자가 되셔서 인도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렘 40-42장>
8/13/2024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시니 내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그를 찬송하리로다" (시 28:7)
법적인 후견인이 있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후견인도 있습니다. 말그대로 뒤를 돌봐주는 사람입니다. 이런 후견인이 있습니까? 어릴 적 후견인은 역시 부모님이나 큰형 또는 큰언니였습니다. 나이 든 지금은 자녀가 오히려 후견인이 되기도 합니다. 간혹 사회적으로 유력한 지인이 뒤를 돌봐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말만 하면 언제든 달려와줄 친구도, 뒤에서 묵묵히 기도해주는 교우도, 멀리 있지만 무슨 얘기든 나누는 사람도 다 이에 해당합니다. 이런 후견인이 얼마나 든든하고 고맙습니까? 하지만 어느 누구도 완전한 후견인은 될 수 없습니다. 시간으로나 능력으로나 너무 제한적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부모조차도 그렇게 되지 못합니다. 우리 자신이 다른 사람의 후견인인 경우도 있습니다. 아무리 잘한다고 해도 얼마나 부족합니까? 단지 부분적으로만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하지만 믿는 사람에게는 진짜 든든한 후견인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 주님입니다. 우리 뒤를 돌봐주시는 분이 주님인겁니다. 무엇이 이 주님을 대신하겠습니까? 여기서 주님은 다윗에게 어떤 후견인입니까? 바로 지금같은 환난중에 그를 살려주실 분입니다. 주님과 그는 그럴만큼 특별한 사이입니다. 주님께는 기꺼이 그를 건져주실 마음이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주님께는 그럴만한 능력도 있습니다. 다윗에게 주님은 "나의 힘과 나의 방패"입니다. 지금 그는 주님의 능력을 이미 자신의 것으로 보고 있는겁니다. 그에게 이 능력은 공격을 위한 '힘'이 되고, 방어를 위한 '방패'도 됩니다. 지금 주님이 '내 후견인'도 되십니까? 주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이 사실이 얼마나 엄청난 일입니까?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할 것은 분명합니다. 바로 마음만 잘 먹으면 됩니다. 곧 우리 마음이 주님을 의지하면 됩니다. 그러면 다윗처럼 틀림없이 주님께 도움을 받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 마음이 주님을 기뻐하면 됩니다. 그러면 우리도 노래로 주님을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 후견인이 아니라면 이런 일은 없습니다. 하지만 변함없는 사실이 있습니다. 바로 지금 주님이 우리 후견인이라는 것입니다. 주님, 당신은 저희의 힘이시요 방패이십니다. 곤경에서 저희를 건져주십시오. 당신을 의지합니다.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렘 37-39장>
8/12/2024
"그들은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과 손으로 지으신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파괴하고 건설하지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를 찬송함이여 내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심이로다" (시 28:5-6)
일상 중에 갑자기 찬양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의지적으로 찬양하다가 찬양의 마음이 생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절박함이 찬양으로 바뀌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실 절박함과 찬양은 서로 정반대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이 둘이 신비하게도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합니다. 깊은 절박함 속에서 순전한 찬양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윗은 마치 죽을 것같이 두렵고 갑갑했습니다. 따라서 주님을 향한 그의 기도는 절박함 그 자체였습니다. 그의 부르짖음은 한마디로 '살려달라'는겁니다. 그런데 그에게 이 절박함이 놀랍게도 찬양이 된 것입니다. 그는 지금 "여호와를 찬송함이여"라고 합니다. 바로 그가 간구하는 소리를 주님이 들으신 것입니다. 기도를 들으시는 주님이 계시는 것이 찬양이 됩니다. 그 기도에 대한 주님의 반응도 찬양이 됩니다. 여기서는 다윗이 호소한 주님의 공의가 찬양입니다. '나쁜놈'과 나쁜짓이 벌받는 것이 찬양이 된 것입니다. 악인은 주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는 주님이 행하신 일과 손으로 지으신 것을 무시합니다. 따라서 그는 아무 거리낌없이 악을 행합니다. 그가 지금 아무리 기세등등해도 주님은 그가 일어서지도 못하도록 꺾으실 것입니다. 반면에 바른 길을 걷는 자가 '나쁜놈'처럼 벌받지 않는 것이 찬양입니다. 얼마간 억울한 일을 당하지만 그는 결국 건짐을 받게 됩니다. 비록 이 땅에서 약한 자처럼 살지라도 마지막에는 우뚝 설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 사람은 지금도 주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무슨 이유에서건 절박함 가운데 있습니까? 있는 그대로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그 절박함이 오히려 찬양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 저희 부르짖음을 들어 주십시오. 저희 절박함이 찬양이 되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렘 34-36장>
8/10/2024
"악인과 악을 행하는 자들과 함께 나를 끌어내지 마옵소서 그들은 그 이웃에게 화평을 말하나 그들의 마음에는 악독이 있나이다 그들이 하는 일과 그들의 행위가 악한 대로 갚으시며 그들의 손이 지은 대로 그들에게 갚아 그 마땅히 받을 것으로 그들에게 갚으소서" (시 28:3-4)
하루하루 생존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악에게 상처를 입는 경우가 생깁니다. 이 악은 굶주린 사자처럼 그 먹잇감을 찾습니다. 이것은 거짓, 사기, 멸시, 착취, 비방, 다툼, 등 다양한 모양으로 사람을 괴롭힙니다. 이것이 개인이 아니라 구조적인 압박이면 더 견디기 어렵습니다. 악에게 할퀸 상처가 얼마나 아픈지는 당해본 사람이 잘 압니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아픈 것이 있습니다. 바로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악인 취급받는 것입니다. 어느날 갑자기 자신이 '나쁜놈'이 되어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다른 진짜 '나쁜놈'들처럼 취급되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진짜 '나쁜놈'들과 똑같은 벌을 받아야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나쁜놈'이 나쁜 짓을 한 만큼 벌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바르게 사는 사람이 벌받는다면 어떻겠습니까? 이런 일이 없는 것이 '공의'입니다. 하지만 이런 일은 적잖게 일어납니다. 이것은 개인적인 억울함을 넘어 '불의'입니다. 이런 일이 버젓이 벌어지고 이에 대해 사람들이 무심하다면 이야말로 '불의한' 사회입니다. 여기서 다윗은 주님의 '공의'에 호소합니다. 세상의 공의는 심각하게 고장나 있습니다. 그중에는 공의의 기능이 거의 다 망가진 사회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암담해도 한가지는 분명합니다. 주님만큼은 언제나 공의로우시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주님의 공의는 엄연히 살아서 역사합니다. 주님의 공의에 따르면 '나쁜놈'은 반드시 벌받아야 합니다. 언제 어떻게 그렇게 될지는 주님께 달려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공의는 악과 악한 짓을 눈감아 주지 않습니다. 아울러 주님의 공의는 의인을 벌하지 않습니다. 의인이 일시적으로 억울함을 겪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영원히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주님은 벌받는 악인들 가운데서 의인을 반드시 건져내십니다. 따라서 불의한 세상에서도 우리는 묵묵히 바르게 살아갑니다. 혹 억울한 일을 당하더라도 주님의 공의를 믿고 견딥니다. 오늘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무슨 일이 있든 바르게 살면 됩니다. 주님의 공의가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당신의 공의를 믿습니다. 오늘 하루 바르게 살게 해주십시오. 어떤 압박에도 잘 견디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렘 28-30장>
8/9/2024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나의 반석이여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을까 하나이다 내가 주의 지성소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시 28:1-2)
죽을 것같은 때가 있습니다. 실제 병이나 사고로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 생깁니다. 이것은 자신이 아니라 가족의 경우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는 실패, 분노, 슬픔, 궁핍, 좌절, 등으로 죽을 것같습니다. 바울의 표현에 의하면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고, 버림을 받고, 거꾸러뜨림을 당하는' 경우입니다. 죽을 것같을 때 믿는 사람이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주님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여기에 무슨 형식이나 절차는 없습니다. 고상하고 멋있고 복잡한 말도 필요없습니다. 말그대로 그저 부르짖는 것입니다. 이 부르짖음은 단순한 몇마디 말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몇마디에 온 마음과 힘이 담겨 있습니다. 여기 다윗의 부르짖음이 있습니다. 그는 지금 '무덤에 내려가게 생긴' 처지입니다. 이 말은 자신이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지금 무슨 다른 말을 하겠습니까? 그의 부르짖음은 한마디로 '살려달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에게 지금 절실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이 이 부르짖음을 꼭 들으시는 것입니다. 그가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라고 호소하는 이유입니다. 또한 주님이 자신의 부르짖음에 꼭 반응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호소는 이렇게 처절합니다.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을까 하나이다." 다윗의 부르짖음에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이제 자신의 목숨은 병이나 다른 요인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가 찾는 주님께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이 부르짖음을 들으시면 됩니다. 주님이 뭐든 반응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살 수 있습니다. 지금 죽을 것같은 어려움이 있습니까? 바로 주님께 부를짖을 때입니다. 주님, 죽을 것같은 형편을 살펴주십시오. 저희의 부르짖음을 들어주십시오. 저희를 살려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렘 25-27장>
8/8/2024
"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 확실히 믿었도다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시 27:13-14)
하루하루가 만만치 않습니다. 여기에다 덜컹 큰일까지 터지면 참 힘듭니다. 그런데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면 더 갑갑합니다. 어디로 갈지 모른 채 깜깜한 밤길을 걷는다면 어떻겠습니까? 사실 우리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앞으로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 잘 모릅니다. 어떻게 끝날지도 정확하지 않습니다. 지금 다윗도 원수가 있는 위험한 길을 걷고 있습니다. 언제 어떻게 공격받을지 모르는 긴박한 상황입니다. 과연 앞으로 그 자신은 어떻게 될까요? 그런데 여기 다윗의 고백이 놀랍습니다. 이것은 스스로를 다짐하는 말이 아닙니다. 다 잘될거라는 막연한 희망사항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의 고백은 믿음에 근거한 확실한 소망입니다. "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 확실히 믿었도다." 지금 그에게 여호와의 선하심은 환난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그가 산 자들의 땅에 있다는 것은 죽지 않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에게 큰 어려움과 위험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는 틀림없이 생존할 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가 걷는 길에 주님의 선하신 손길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는 주님의 선하심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을 포함해서 모두에게 외칩니다.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게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매순간 주님이 살펴주시도록 기다립니다. 주님이 바른 길 가르쳐주시도록 기다립니다. 인내하며 이 길을 끝까지 잘 가도록 힘주시는 주님을 기다립니다. 주님이 모든 것을 합력하여 당신의 선하심을 이루시도록 기다립니다. 오늘 무슨 일이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한가지는 분명합니다. 결국은 주님의 선하심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 당신은 저희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저희 앞에 있는 험한 길을 잘 걷게 도와주십시오. 이 과정과 끝에 당신의 선하심을 보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렘 22-24장>
8/7/2024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시고 내 원수를 생각하셔서 평탄한 길로 나를 인도하소서 내 생명을 내 대적에게 맡기지 마소서 위증자와 악을 토하는 자가 일어나 나를 치려 함이니이다" (시 27:11-12)
한적한 곳이 그리울 때가 있습니다. 일상을 벗어나 좀 쉬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기왕이면 주변 자연이 아름다우면 더 좋겠지요. 얽힌 생각이 시원하게 정리되고, 감정도 차분하게 가라앉고, 뭔가 새로운 의욕이 생긴다면 최고입니다. 하지만 만일 한적한 곳에서 마냥 지내야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그렇다면 얘기는 달라집니다. 이 한적한 곳이 오히려 고독하고, 무료하고, 우울한 장소가 될 수가 있습니다. 한적한 곳은 역시 돌아갈 복잡하고 치열한 일상이 있을 때 더 소중합니다. 골방이나 조용한 곳이 주님을 깊이 만나는데 도움이 됩니다. 다윗에게는 성소가, 또다른 사람에게는 기도원이 그럴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일상 속에서는 주님을 깊이 만나지 못합니까? 그런 법은 없습니다. 오히려 일상 속에서 만나는 주님이 훨씬 더 생생할 수도 있습니다. 이 시편에서 다윗은 성소에서 주님과 함께 있기를 얼마나 사모하고 있습니까? 하지만 이것이 성소라는 공간 속에서만 지내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윗이 바라는 것은 주님과의 깊은 교제 자체입니다. 다윗이 지금 간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자신에게 주님의 도를 가르쳐 달라는 것입니다. 여기 '도'라는 말에는 길을 걷는다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지금 다윗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신비한 것을 체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어떻게 길을 걸어야할지를 아는 것입니다. 지금 그가 걷는 길에는 그의 목숨을 노리는 원수가 있습니다. 조금만 빈틈을 보여도 원수는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달려들겁니다. 거짓증거와 악을 독화살처럼 쏟아내어 다윗을 망가뜨리려고 작정하고 있습니다. 다윗에게 지금 평탄한 길을 찾아 가는 것이 얼마나 절박합니까? 그는 어떻게 죽고사는 이 상황을 뚫고 나갈 수 있을까요? 여기서 '평탄한 길'은 아무 문제없는 평안한 길은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오히려 이 길은 '바른 길'이라고 하는 것이 맞습니다. 주님 곁에 있다는 것은 자주 이런 모습입니다. 바로 아슬아슬한 가운데 바른 길 찾아가는 것입니다. 이 하루는 어떻게 살아야겠습니까? 무엇보다 먼저 주님 가까이에 머물기 바랍니다. 거기서 주님께 도를 배워 바른 길 찾아가기 바랍니다. 주님, 오늘 당신과 함께 있게 해주십시오. 저희에게 당신의 도를 가르쳐주십시오. 오늘 바른 길 찾아 걸어가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렘 19-21장>
8/6/2024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마시고 떠나지 마소서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시 27:9-10)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바램은 종종 바램으로 끝납니다. 심지어 어떤 때는 꼭 그런 일들만 골라서 일어납니다. 삶이 심술궃게 느껴질 때입니다. 귀찮고, 싫고, 버겁고, 두렵고, 힘든 일들이 이렇게 삶의 한부분이 됩니다. 그런데 정말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이 있습니다. 이 일만큼은 절대 허용할 수 없습니다. 바로 주님께 버림받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내버려두고 떠나신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이 함께 하시면 무슨 일도 견딜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안계시면 그 자체로 끝장입니다. 이것은 아이가 갑자기 엄마가 곁에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의 끔찍함같은 것입니다. 아픈 몸을 위해 주님께 매달릴 수 있습니다. 힘든 문제를 위해, 모자라는 돈을 위해, 들끓는 분노를 위해 간절히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도를 들으시는 주님이 안계시면 어떻게 됩니까? 환난과 위기 가운데 다윗이 드리는 기도가 이것입니다. 그에게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이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곁에 계셔야 소리내어 부르짖기도 하고 불쌍히 여겨달라고 매달릴 수도 있는겁니다. 그의 기도가 정말 처절합니다. "... 버리지 마소서 ... 버리지 마시고 떠나지 마소서 ..." 다윗이 함께 있어달라고 주님께 호소하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먼저, 주님이 시키신대로 주님의 얼굴을 구하고 있다는겁니다.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가 마음으로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8절). 시키신대로 주님을 찾는데 주님이 외면하시겠습니까? 둘째로, 자신이 주의 종이라는겁니다. 주님이 어떻게 당신의 종을 버리시겠습니까? 지금까지 주님이 당신의 종을 어떻게 도우셨는데 이제와서 버리시겠습니까? 마지막으로, 이런 일은 주님의 속성에 맞지 않다는 겁니다. 부모가 자기 자식을 버리는 것이 가능합니까? 설사 부모는 버릴지라도 주님께 그런 일은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런 확신으로 주님께 함께 해달라고 부르짖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선물이나 도움보다 주님 자신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오늘 주님 자신을 찾는 자녀가 되어보십시오. 주님께 이런 자녀가 얼마나 소중하겠습니까? 주님, 저희를 떠나지 말아주십시오. 오늘 매순간 저희와 함께 해주십시오. 특히 저희가 연약함 가운데 있을 때 꼭 곁에 계셔 주옵소서.
<오늘의 성경읽기 렘 16-18장>
8/5/2024
"여호와여 내가 소리 내어 부르짖을 때에 들으시고 또한 나를 긍휼히 여기사 응답하소서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가 마음으로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시 27:7-8)
늘 주님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거기서 주님의 아름다움을 봅니다. 우러나는 감사와 찬양으로 주님을 예배합니다. 거기 머무는 동안 주님이 보호자도 되십니다. 여기서 더 바랄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지만 주님 곁에 있다고 아무 문제없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가 있기 때문에 주님의 보호가 필요한겁니다. 성소에 머문 다윗에게도 환난이 있었습니다. 원수의 위협적인 공격이 여전했습니다. 주님의 보호로 확신과 평안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보호 가운데서 환난과 위협도 있습니다. 여기 주님 가까이 있던 다윗의 기도를 보십시오. "여호와여 내가 소리내어 부르짖을 때에 들으시고 또한 나를 긍휼히 여기사 응답하소서." 소리내어 부르짖어본 적 있습니까? 불쌍히 여겨달라고 매달려본 적 있습니까? 이렇게 기도할 정도의 형편은 어떤 것입니까? 다윗의 이 기도를 통해 두가지가 분명해집니다. 먼저, 주님 곁에서도 이런 형편이 생긴다는겁니다. 주님 곁에 있는데 큰 문제와 어려움을 만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임재 가운데서도 소리내어 부르짖을 일이 생깁니다. 또한, 주님 곁에 있다는 것은 이렇게 기도하는 것도 포함한다는겁니다. 물론 주님 곁에서 찬양과 감사는 기본입니다. 하지만 절박함으로 주님께 부르짖는 것도 기본입니다. 부르짖어야할 때 주님이 멀리 계신다고 생각해보십시오. 하지만 주님 곁에 있을 때는 부르짖을 주님이 가까이 계신겁니다. 오늘도 주님 가까이 머무십시오. 혹 소리내어 부르짖을 일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곁에 계시는 주님께 바로 아뢰십시오. 주님, 오늘도 당신 곁에 머물겠습니다. 저희의 부르짖는 기도를 들어주십시오. 저희를 불쌍히 여겨 응답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렘 13-15장>
8/3/2024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 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둘러싼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의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며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시 27:5-6)
아이는 언제 가장 행복할까요? 갖고 싶었던 장난감을 가지고 놀 때가 행복할겁니다. 맛있는거 먹을 때도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것이 있어도 엄마가 곁에 없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뭘하든 아이는 엄마가 가까이에 있어야 합니다. 아이가 잘 놀면서도 수시로 엄마의 존재를 확인하는 이유입니다. 엄마 곁에 있는 아이는 두려울게 없습니다. 그저 편안하고 든든할뿐입니다. 주님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야말로 그렇습니다. 주님의 임재 가운데 있는 사람의 유익은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그중에 한가지 중요한 것이 주님의 보호입니다. 다윗처럼 성소에 머무십시오. 거기서 주님의 아름다움을 보고 누리게 될겁니다. 자연히 주님을 향한 찬양과 감사가 멈추지 않게 될겁니다. 이렇게 하루를 살고 이틀을 살다가 평생 가게 되는겁니다. 주님 곁에 머무는 사이에 다른 일도 있습니다. 바로 주님의 보호입니다. 주님과 함께 있는 사람을 누가 건드립니까? 다윗이 성소에 머무는 동안도 그의 환난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원수의 위협적인 공격은 여전히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성소에 머물고 있던 다윗은 안전했습니다. 성소에 무슨 안전장치가 있었습니까? 그의 안전은 오히려 함께 계시는 주님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를 지키실뿐 아니라 이기게도 하십니다. 이로인해 그는 성소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고 노래하며 여호와를 찬송하게 될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안전할까요? 무엇보다 주님 가까이에 머무십시오. 주님의 보호보다 더 안전한 것이 있습니까? 주님, 당신 가까이 머물러 있겠습니다. 오늘 저희를 모든 환난과 위험에서 지켜주십시오. 오늘 저희가 노래하며 찬송하게 하옵소서.
<오늘의 성경읽기 렘 7-9장>
8/2/2024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시 27:4)
요즘 관심사가 무엇입니까? 최근에 많이 하는 생각은 무엇입니까? 시간과 에너지를 많이 쓰는 곳은 어디입니까? 그런데 요즘 많이 기도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중에서도 가장 우선적인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주님께 가장 바라는 것말입니다. 이것은 아마 사람마다 경우마다 다를겁니다. 솔로몬처럼 지혜일 수 있습니다. 어떤 아버지처럼 자식의 회복일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인도나 공급일 수도 있습니다. 여기 다윗의 바램은 어떻습니까? 그가 주님께 바라는 한 가지 일입니다. 많은 바램 중에서 한 가지만 고르라면 택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의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사는 것입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집은 성소를 말합니다. 물론 그가 제사장이나 레위인처럼 되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어디서나 주님의 임재 앞에서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서 주님의 아름다움을 보고싶다는 것입니다. 이 아름다움은 영광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주님의 성품이든, 말씀이든, 행동이든 그것을 매일 본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의 아름다움 한조각만 봐도 바로 예배로 반응하게 됩니다. 평생 이렇게 사는 것이 다윗이 가장 바라는 것입니다. 아마 이것은 다른 일은 전혀 안하겠다는 말은 아닐겁니다. 이것만 고상하고 다른 일은 저급하다는 뜻도 아닐겁니다. 오히려 그가 어디 있든, 무엇을 하건 이것 없이는 못산다는 말일겁니다. 하루라도 주님의 임재 앞에 있지 않는 것은 끔찍한 일입니다. 주님의 아름다움을 보지 않고 어떻게 그냥 넘어갑니까? 주님께 찬양과 감사로 예배드리지 않고 어떻게 하루를 보냅니까? 하루하루 이렇게 살다가 평생 이렇게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만의 독특한 바램이 아닙니다. 주님을 아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바램입니다. 오늘 이 하루부터 이렇게 살기 바랍니다. 이런 하루하루가 더해져서 평생이 되는겁니다. 주님, 오늘 당신의 임재 앞에서 살게 해주십시오. 당신의 아름다움을 보게 해주십시오. 오늘 예배로 당신을 높이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렘 4-6장>
8/1/2024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으나 나의 대적들, 나의 원수들인 그들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 (시 27:1-3)
싸우다가 적의 공격에 무너집니다. 하지만 싸우기도 전에 두려움으로 무너집니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나름의 방법들이 있습니다. 그중에 한가지는 '할 수 있다'고 주문처럼 되뇌이며 마음을 다잡는 것입니다. 적들이 '별 것 아니다'라고 되뇌이는 것도 있습니다. 냉철하게 적을 분석해서 이길 전략을 찾아내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이런 방법들이 부분적으로는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주님 아는 것'을 대신하지는 못합니다. 싸울 때 적을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하지만 '주님을 아는 것'이 먼저입니다. 또한 자신을 아는 것보다 '주님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 아는 사람은 그 이유를 압니다. 이 시편에서 다윗이 가장 먼저 선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주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 아는 사람은 다윗처럼 외칠겁니다.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주님을 알면 적이 얼마나 악하고 강한지는 큰 문제가 아닙니다. 심지어 자신이 얼마나 약한지도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닙니다. 다윗에게 주님은 어떤 분입니까? 그의 빛이십니다. 빛이라는 말 속에 온갖 긍정적인 요소들이 다 담겨있습니다. 바로 주님은 힘과 지혜와 인도자와 기쁨과 소망이 되신다는겁니다. 주님은 또한 그의 구원이십니다. 바로 주님은 위험과 속박과 고통과 죽음에서 건져주시는 분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주님은 그의 생명의 능력이 되십니다. 여기서 능력은 생명을 지키는 강력한 보호벽과 같은 것입니다. 주님이 보호하신다면 누가 생명을 건드리겠습니까? 이 세상에 우리 자신을 이길 것은 널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이길 것은 없습니다. 오늘 우리 앞에 위험과 유혹과 문제와 짐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들을 보기 전에 주님을 보십시오. 주님이 어떤 분인지를 먼저 선포하며 찬양하십시오. 이것이 두려움을 이기는 길입니다. 주님, 당신은 저희 빛이십니다. 저희 구원과 생명의 능력이십니다. 이 하루 두려움없이 살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렘 1-3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