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2024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로 말미암아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 (시 5:7-8)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습니까?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표지(mark)가 여럿 있습니다. 그중에 두가지 전형적인 표지가 여기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 의지하는 사람은 예배를 멈추지 않습니다. 불의에 큰 어려움을 당하는 중에도 그는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그는 불의한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며 잘난체하지 않습니다. 불의를 비난하면서 자신은 의롭다고 자랑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악에 빠지지 않은 것이 자신의 힘이 아니라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된 것임을 인정합니다. 따라서 그가 할 일은 자신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 엎드려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이것도 자신의 의지보다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그렇게 합니다. 하나님 의지하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사는지를 보십시오. 하나님께 겸손히 엎드리는지를 보십시오. 언제든 하나님을 찾아 예배드리는지를 보십시오. 둘째로, 하나님 의지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모든 처리를 맡깁니다. 불의에 어려움 당하는 사람은 대개 복수심에 불타게 됩니다. 그는 당한 것을 되돌려주려고 뭔가를 도모합니다. 나아가 스스로 응징하려고 시도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의지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하시기를 기대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대로 그 손으로 하시기를 바라봅니다. 그는 자신에게 불의로 고통을 준 사람에 대한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원수들"에 대해 당신의 의를 행하시면 됩니다. 그들을 향한 자신의 태도도 주의 뜻대로 바르게 하시기를 기대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들을 향해 긍휼을 가지고 계시면 자신도 긍휼을 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 의지하는 것을 압니까? 하나님께 모든 처리를 맡기는지를 보십시오. 만일 하나님이 불의한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면 자신도 그렇게 하는지를 보십시오. 오늘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지하십시오. 하나님, 당신을 의지합니다. 당신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오늘 당신을 예배하게 해주십시오. 불의로 저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당신의 뜻대로 처리해 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출 36-38장>

1/29/2024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머물지 못하며 오만한 자들이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거짓말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시리이다 여호와께서는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와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 (시 5:4-6)

어려울 때 믿음직한 한사람이 큰 힘입니다. 이런 사람은 가만히 있기만 해도 든든합니다. 그런데 그가 어려움을 잘 이해하고, 기꺼이 도와주고, 한마음으로 기도해주는 사람이라면 어떻겠습니까? 어두운 시대에 믿음직한 한 인물이 얼마나 고맙습니까? 사람들은 그에게 귀기울이며 주목합니다. 그들은 그 영웅에게 희망을 걸고 기쁘게 헌신합니다. 불의에 피해를 당해본 적이 있습니까? 그것이 얼마나 속상하고 분하고 억울한지는 당해본 사람이 잘 압니다. 그렇게 당하고도 그 모든 피해를 그냥 끌어안고 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만일 이 사실을 알아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더우기 함께 분노하며 대신 나서는 누군가가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여기 시편기자도 불의때문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는 바로 '죄짓는 자', '악을 행하는 자', '거짓말하는 자', '피 흘리는 자' ,'속이는 자'에게 당한 것이 분명합니다. 아마 이것만 있다면 그는 깊은 좌절과 분노와 우울로 망가지고 말았을겁니다. 하지만 이때 그에게는 의지할 든든한 분이 계셨습니다. 바로 주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면 쉽게 좌절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지 알면 너무 억울해 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 모든 처리를 맡기는 사람은 오히려 소망의 기쁨과 평안을 누립니다. 시편기자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죄악을 기뻐하지 않는 분',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는 분',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와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는 분'입니다. 이런 하나님께 기대되는 행동은 무엇입니까? 바로 '거짓말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시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을 이렇게 알고 있습니까? 불의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나쁜 짓을 반드시 응징하시는 하나님께 모든걸 맡기십시오. 이것이 불의의 피해를 입고도 생존하는 길입니다. 나아가 확신과 소망으로 당당하게 서는 길입니다. 하나님, 지금 저희와 함께 해주십시오. 저희가 당하는 불의를 미워하시고 꼭 응징해 주십시오. 오늘 이 하루 당신을 의지하며 기죽지 않고 당당히 살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출 33-35장>

1/27/2024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시 5:3)

가끔 크게 당황할 때가 있습니다. 바로 셀폰을 집에 두고 나왔을 때입니다. 셀폰없이도 잘 지내던 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느새 '셀폰없이 살 수 있을까' 하는 정도가 되었습니다. 셀폰은 거의 때와 장소에 상관없이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셀폰 덕분에 우리는 전천후로 검색하고, 연락하고, 연락받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이것과 차원이 다른 또다른 도구가 있습니다. 바로 기도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통해 만나는 분이 누구입니까? 그분이 가지고 계신 지식과 능력이 어느 만큼입니까? 그분이 우리를 얼마나 잘 아십니까? 그분이 우리를 얼마나 잘 챙겨주십니까? 그분은 우리가 기도로 찾는 것을 얼마나 좋아하십니까? 여기 시편기자의 기도는 제사장이 성소에서 드리는 제사를 연상시킵니다. 제사를 위한 모든 준비를 마치고 드디어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여기 두번이나 "아침에"가 나오는데 마치 아침에 드리는 첫 제사를 연상시킵니다. 당시 제사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소중한 장치였습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자유롭게 하나님께 나아가는 '새롭고도 산 길'입니다. 그야말로 우리는 전천후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만나는 데 무슨 약속이 필요합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때와 장소에 상관없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만나는 일을 주선해줄 제사장같은 사람이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만나는 것에 필요한 어떤 컨디션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밤이든 낮이든, 일하는 중이든 쉬는 중이든, 기분이 좋든 나쁘든, 사람들 사이에 있든 혼자 있든, 기도하고 싶을 때든 아니든, 잘 지내든 못 지내든...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은 늘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또 우리가 드리는 기도를 들으십니다. 언제 어디서든 기도하십시오. 특히 '아침에' 꼭 기도하십시오. 마치 수확의 첫열매를 드리는 것처럼 아침 기도는 하루를 기도로 사는 첫열매가 될 것입니다. 아침 기도는 흠없고 점없는 제물처럼 가장 맑고 깨끗한 시간에 하나님을 만나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 만나 무엇이든 말씀드리십시오. 달콤한 고백이든, 간절한 요청이든, 깊은 상처를 드러내는 것이든, 뭐든지 다 털어내십시오. 그리고 잠잠히 하나님의 반응을 기다리십시오. 시편기자처럼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실지 귀를 기울이십시오. 하나님의 손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살펴보십시오. 하나님, 지금 당신께 나아갑니다. 제 기도를 들어주십시오. 당신의 음성을 듣게 하시고 당신의 일을 보게 하옵소서.

<오늘의 성경읽기 출 27-29장>

1/26/2024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 (시 5:1-2)

누군가에게 속을 털어놓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나에게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붙들고 얘기할 좋은 대상이 있다면 그게 복입니다. 만일 그 대상이 가까이 있다면 더 바랄게 없습니다. 늘 막힘없이 대화를 주고받는 부부를 상상해 보십시오. 둘은 사소한 것에서부터 즐거운 일, 궂은 일 다 나눕니다. 이런 부부에게는 어떤 험한 도전도 헤쳐나갈 저력이 있습니다. 이것은 자녀, 친구, 교회 식구, 스승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을 다 쏟아내어도 묵묵히 들어줄 사람이 누구입니까? 아픔과 상처를 드러내어도 비난하지 않을 사람이 누구입니까? 연약함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도 깔보지 않을 사람은 누구입니까? 주변에 이런 사람이 꼭 있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사람의 위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사람과의 깊고 따뜻한 대화가 큰 도움이라도 이것만으로 안되는 영역이 있습니다. 바로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영역입니다. 여기 시편기자에게는 지금 큰 어려움이 있습니다.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같은 표현은 이런 형편을 잘 보여줍니다. 이 호소에 그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상처가 느껴집니다. 또한 그의 처절한 고통도 보입니다. 이 가운데 그는 누구에게 자신의 마음을 쏟아내고 있습니까? 사람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입니다. 그에게 하나님은 "나의 왕 나의 하나님"입니다. 그가 언제든 달려가 만날 수 있는 분입니다. 속삭이듯 말해도 귀를 기울여 주시는 분입니다. 마음 속 깊은 것을 헤아려 정확히 아시는 분입니다. 크게 부르짖는 소리도 들으시는 분입니다. 여기서 풀리지 않던 것이 풀립니다. 또한 사람에게서는 얻지 못하는 위로를 얻습니다. 여기에 완벽한 치유와 회복이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새로운 길이 열립니다. 하나님과의 대화하는 사람에게 두려울게 없는 이유입니다. 뭐든지 하나님께 쏟아내는 사람에게 거칠게 뭡니까? 순간순간 우리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대화가 열려 있다면 무엇이 걱정입니까? 오늘 하나님과 대화하는 사람으로서 이 하루를 시작하십시오. 하나님, 당신은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어떤 형편에서도 당신과 대화하게 해주십시오. 이로써 어떤 어려움도 넉넉히 이기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출 25-26장>

1/25/2024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 (시 4:8)

하나님의 사람이 누리는 신비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입니다. 또 있는데 여기 나오는 안전입니다. 우리가 언제 어디서나 안전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다윗이 처한 상황이나 우리의 경험을 보면 안전에 대해 두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그 하나는 '이렇게까지 되지 않게 해주실 수는 없었는가?'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뚜렷한 대답이 없는 질문입니다. 하나님 믿는 사람도 힘든일을 많이 당하기 때문입니다. 그중에는 극단적인 어려움도 있습니다. 일을 당하기 전에 하나님이 미리 막아 주실 수는 없었을까요?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일뿐 입니다. 실제로는 여전히 혹독한 어려움이 찾아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어려움이 덜 한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여전히 그만큼 어렵고, 아프고, 슬프고, 힘들고, 무겁습니다. 다 이해하지 못해도 이것이 삶입니다.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께 이런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미 생긴 어려움을 현실로 받아들일뿐입니다. 두번째 질문은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도 안전을 누리는가?'입니다. 현실은 너무 위험하고 힘든데 안전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말 가능합니까? 적의 공격에 거의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데 다윗처럼 '평안히 눕고 자는 것'입니다. 지금 아들의 반역으로 궁에서 쫓겨나 있으면서도 그는 안전히 산다고 고백합니다. 분명히 매우 불안정한 상황인데 그 가운데서 하나님이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다 이해할 수 없지만 이것도 믿는 사람의 삶입니다. 서로 모순되는 것같지만 신비하게도 실제로 있는 일입니다. '믿는 사람도 큰 어려움을 당합니다. 하지만 그 어려움 중에서도 안전합니다.' 지금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의지하기 바랍니다. 그러면 신비한 안전을 경험하게 될겁니다. 하나님, 어떤 일이 있어도 당신을 의지합니다. 저희에게 닥치는 어려움을 현실로 인정하게 하옵소서. 또한 그 어려움 가운데서도 당신때문에 안전하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출 22-24장>

1/24/2024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시 4:7)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는 일이 있습니다. 논리적으로 쉽게 설명이 안되는 신기한 경우입니다. 바로 형편은 너무 힘든데 마음은 기쁜 것입니다. 물론 이 기쁨은 가볍게 웃고 떠드는 것과는 다릅니다. 오히려 이것은 뭔가 마음을 가득 채우는 평안과 확신과 연관된 것입니다. 위협과 문제는 그대로인데 사라지지 않는 기쁨입니다. 몸은 피곤하고 아파도 마음의 중심을 붙드는 기쁨입니다. 이것은 성격상 낙천적인 사람이 갖는 기쁨과는 다릅니다. 또한 이것은 적극적인 사고방식에서 나온 기쁨과도 다릅니다. 이 기쁨은 성격이나 생각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다윗이 이것을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이라고 말한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마음에 부어주시는 기쁨을 무엇이 막겠습니까? 뼈아픈 배신, 사라지지 않은 위협, 주변의 낙심, 초라해진 처지, 그 무엇도 다윗에게서 이 기쁨을 뺏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한 이 기쁨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만일 하나님으로부터 등돌리고 다른 것을 의지한다면, 이 기쁨은 순식간에 염려와 분노와 두려움으로 바뀔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모든 것을 하나님께 거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지금도 나를 살피시고 사랑하시는 것을 알면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반드시 불의를 심판하실 것을 믿으면 달라집니다. 비로 상황과 처지는 그대로인데 마음에는 기쁨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맛본 것도 바로 이 기쁨이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합 3:17-18). 하나님, 당신을 의지합니다. 오늘 저희를 지키시고 인도해 주십시오. 어떤 형편에서도 당신이 부으시는 기쁨을 누리게 하옵소서.

<오늘의 성경읽기 출 19-21장>

1/23/2024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시 4:6)

'패배주의'는 싸워보기도 전에 자신감없이 질 것을 기정사실화하는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것이 '낙심'입니다. 이런 패배주의는 아주 위험한 내부의 적입니다. 외부의 적때문에 힘든 중에 이런 내부의 적은 사람의 마음을 무너뜨립니다.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겨날 때 함께 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런 상황에서도 함께 해준 고마운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중에 많은 사람들이 다윗에게 어려움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바로 그들이 패배주의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좋은 전망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앞날은 깜깜하기만 했습니다. 흔히 이런 패배주의는 전염병처럼 빠르게 퍼집니다. 다윗의 친구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패배를 확신했습니다. 가까운 사람들이 다들 "끝났다"고 하며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여기서 다윗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하나님 믿는 사람은 쉽게 패배주의에 빠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모든게 끝난 것처럼 보여도 쉽게 포기하지 않습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다들 회의적이어도 그들과 함께 실망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그는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하나님이 하시면 상황은 순식간에 뒤집어질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굴을 들어 비추시면 다들 은혜를 입을 것입니다. 그러면 부정적인 것으로 가득찬 마음이 희망적인 것으로 바뀝니다. "모든게 끝장이다"는 말이 "할 수 있어, 한번 해보자"라는 말로 바뀝니다. 당연히 늘 외부의 적을 경계해야 합니다. 하지만 내부의 적에 대해서도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특히 패배주의의 분위기를 조심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람은 이런 압박을 뚫고 하나님께 희망을 겁니다. 하나님, 주변의 우울하고 부정적인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게 해주십시오. 특히 패배주의에 빠지지 않게 해주십시오. 아무리 어려워도 믿음과 용기를 버리지 않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출 16-18 장>

1/22/2024

"너희는 떨며 범죄하지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지할지어다" (시 4:4-5)

원리(principle)란 기초적이고 보편적인 이치입니다. 이것은 나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다른 사람에게도 해당됩니다. 다윗에게는 자신에게 해당되는 삶의 원리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 원리가 자신의 적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바로 이 원리로 적들에게 호소합니다. 여기서 그 원리는 두가지입니다. 그 하나는 자제하라는 것입니다. 대개 사람이 죄짓기 쉬운 상태는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는 때입니다. 여기서 "떨며"는 분을 못이겨 어쩔줄 모르는 모습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성급하게 결정하거나 행동하면 실수와 죄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윗의 적들은 더 나아가기 전에 바로 거기서 멈춰야 했습니다. 그들은 분노와 성급함을 자제하고 잠잠해야 했습니다. 두번째 원리는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떨며" 범죄하기 전에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죄짓는 것을 두렵게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은 들끓는 마음이 식힙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연약함을 시인하고 도움을 구하는 사람을 외면치 않으십니다. 여기 다윗의 적들은 자신들의 불법을 합리화하기 위한 눈가림식 제사를 그만두어야 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의의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이 두가지는 평소 다윗 자신이 붙들고 살아온 소중한 원리입니다. 또한 왕궁에서 쫓겨나 들끓는 감정으로 일을 저지르고 싶은 이 순간에도 그가 붙잡아야할 원리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원리들은 자신을 죽이려는 적들이 살 길이기도 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 두가지는 소중한 원리입니다. 자제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혹 불의로 괴롭힘을 당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 두가지 원리를 꼭 붙들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 원리는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에게도 꼭 필요합니다. 그가 이 원리를 따라 변하도록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분노로 쉽게 들끓는 저희 감정을 다스려 주십시오. 저희를 도우셔서 죄짓지 않게 해주십시오. 저희를 힘들게 하는 사람도 그렇게 되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출 13-15장>

1/20/2024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며 헛된 일을 좋아하고 거짓을 구하려는가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그를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시 4:2-3)

"우리 아빠한테 일러바친다." 아이가 자신를 괴롭히는 다른 아이에게 하는 말입니다. 만일 우리 아빠가 이것을 알면 어떻게 될지를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빠의 존재는 아이에게 강력한 무기입니다. 지금 다윗은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들을 향해 묻습니다. 저희가 언제까지 헛된 반역과 거짓으로 자신의 영광을 욕되게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대답을 기대하고 하는 질문은 아닙니다. 오히려 더 이상 자신의 명예를 짓밟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여기서 다윗은 자신의 원수들을 "인생들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무리 강해도 한낱 "인생들"일 뿐입니다. 이들과는 대조적으로 다윗에게는 "여호와"가 함께 계십니다. 다윗은 '여호와께서 선택하신 경건한 자'입니다. 이런 관계를 근거로 그가 여호와를 부르면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 믿고 하나님의 자녀된 사람에게도 그대로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도 사람들에게 괴롭힘을 당합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든든한 빽이신 아버지 하나님이 계십니다. 지금 누군가가 힘들게 하고 있습니까?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그를 일러바치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괴롭히는 자들을 직접 처리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괴로움 자체도 하나님 손에 맡기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가 부를 때 들으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나서시면 일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오늘도 뭐든지 아버지께 다 일러바쳐 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지 지켜보십시오. 하나님 아버지, 저희의 괴로움을 아룁니다. 들어주시고 살펴주십시오. 당신의 손으로 처리해 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출 7-9장>

1/19/2024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시 4:1)

사람들 사이에 의외로 상처가 많습니다. 그중에는 가까운 사람에게 받는 쓰린 상처도 있습니다. 상처를 받고 또 되갚으면서 마음과 삶이 만신창입니다. 대개 상처에는 혼란, 패배감, 원통함, 분노, 복수심이 따릅니다. 따라서 상처받으면 극단적이고 무모한 행동도 쉽게 합니다. 과연 이런 상처의 아픔을 극복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오늘 이 시편은 그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시편 4편은 3편과 같이 압살롬의 반란으로 쫓겨난 다윗이 쓴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다윗은 목숨을 위협받는 아슬아슬한 처지였습니다. 그동안 이루어낸 모든 것을 상실하는 아픔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바로 자신의 아들에게 당한 배신보다 더 큰 상처가 있었을까요? 그런데 이 상처를 안고 다윗이 가장 먼저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사람이 자신의 상처를 다루는 한 모델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를 먼저 하나님께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부르짖고 호소하면서 그 아픔을 털어놓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상처가 다루어지게 먼저입니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상처가 조명되고 이해되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이 부으시는 은혜로 치유되고 새로와져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품 안에서만 다시 용기를 갖고 일어설 수 있습니다. 상처를 안고 우리가 하나님께 달려가야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먼저, "내 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나의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한 불의를 그냥 지나치치 않으십니다. 또한,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상처에 가장 좋은 치료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가장 깊은 상처도 아물게 됩니다. 분노와 자학과 복수는 상처를 치유하지 못합니다. 상처로 아플 때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부르짖으며 하나님의 공의와 은혜를 구하십시오. 하나님, 지금 당신께 나아왔습니다. 당신의 의와 은혜로 저희와 함께 해주십시오. 특히 저희의 상처를 당신 손으로 다루어 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출 4-6장>

1/17/2024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시 3:6)

우리에게 부족한게 얼마나 많습니까? 그중에 가장 부족한 것은 역시 믿음입니다. 물론 다들 나름대로의 믿음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참으로 깊고 진득한 믿음은 보기 힘듭니다. 이런 믿음을 갖기에는 사실 우리가 너무 계산적입니다. 우리에게는 자신의 유익과 생각과 자존심이 너무 큽니다. 우리는 자신의 머리와 경험과 가진 것을 지나치게 의지합니다. 그 반면에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쉽게 우월감과 열등감에 빠집니다. 이렇게 우리의 중심은 불안정하고 믿음의 뿌리는 옅습니다. 따라서 조그만 어려움에도 근본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다윗의 고백을 한번 보십시오.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비유적인 표현이지만 천만 대 일의 전투를 상상해 보십시오. 더우기 그 천만 명은 싸움에 익숙한 군인들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천만인에 에워싸인 그 한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적의 숫자는 더이상 중요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지도 큰 문제가 아닙니다. 단지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느냐 아니냐 하는 것뿐입니다. 어려움은 자주 천만 군대의 공격처럼 커 보입니다. 이런 순간 머리를 써서 계산하면 해결 방법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바라보면 모든 계산과 합리적인 생각을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심한 어려움에도 하나님이 커 보이면 두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방패요, 영광이요, 머리를 드시는 분이면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면 됩니다. 또한 하나님이 그 손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시면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려움 중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뜻을 좇아 흔들림없이 자신의 몫을 다하는 것입니다. 다윗같은 믿음의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또한 이런 믿음의 사람을 보고 싶습니다. 다윗이 의지한 하나님은 지금도 그대로 살아계십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을 다윗처럼 믿는 사람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 당신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합니다. 다윗과 함께 하신 것처럼 오늘 저희와 함께 해주십시오. 어떤 압박에도 믿음으로 당당하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창 49-50장>

1/16/2024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시 3:5)

안전(security)은 먹는 것이나 잠같은 기본욕구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안전을 추구합니다. '어디 가야 안전할까? 무엇이 안전할까? 어떻게 해야 안전할까? 노년의 삶에 좋은 안전 장치는 무엇인가? ...' 우리의 계속되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대개 안전을 위해 애쓰는 편입니다. 안전에 신경을 쓰면 아무래도 좀 낫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애써도 안전이 늘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안전을 위협하는 요소가 도처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중에 어떤 위협은 우리에게 치명적인 것입니다. 여기 다윗이 처한 위험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는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왕궁을 급히 빠져나왔습니다. 이제 그는 광야의 노출된 환경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만일 압살롬의 군대가 좇아와 치면 그대로 당하게 되는 위험한 순간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이런 외적인 위협 외에도 두려움, 불안, 분노, 낙담, 염려같은 위협도 있습니다. 그동안 다윗에게 중요했던 안전장치는 거의 해체된 상태입니다. 하지만 진짜 안전장치는 이 순간에도 여전히 그대로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손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손만큼 안전한 곳이 어디 있을까요? 하나님이 붙들고 계시면 무엇이 건드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손이 얼마나 안전한지를 보여주는 멋진 고백이 여기 있습니다.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다윗과 같은 형편 중에도 누워서 잠잘 수 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더우기 평안하게 자고 아침에 깨어난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긍정적인 성격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붙드시면 극단적인 위협 가운데서도 이렇게 안전합니다. 또한 하나님이 붙드시면 마음도 평안합니다. 어디를 가든, 무슨 일이 있든, 심지어 실패와 아픔과 가난 중에서도 안전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를 붙드심으로 도우십니다. 지금 우리를 위협하는 무서운 것이 무엇입니까?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붙들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희를 붙들어 주십시오. 온갖 위협에서 저희를 지켜주옵소서. 당신의 손을 의지하며 용기있게 이 하루를 살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창 46-48장>

1/15/2024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시 3:4)

어려움이 생기면 얼마나 갑갑합니까? 그런데 호소할 데도 없으면 어떻겠습니까? 추위에 보일러가 고장났을 때, 세금 문제가 생겨서 곤란할 때, 몸의 어떤 부분이 이상할 때,...물어볼 사람이 있으면 얼마나 든든합니까? 더우기 연락하자마자 곧장 달려와 도와주는 사람이 얼마나 큰 힘입니까? 그런데 우리에게는 우리를 도우시는 확실한 분이 계십니다. 바로 우리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멀리서 팔짱끼고 우리를 보고만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를 돕기위해 행동하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도움은 구체적이고 실제적입니다. 시편기자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하나님은 우리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심으로 우리를 도우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는 결코 공허하거나 무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부르짖음을 외면치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잘 들으시고 어떤 형태로든 응답하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성산은 다윗 때 언약궤가 있던 곳입니다. 상징적으로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입니다. 또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마치 하늘과 땅이 만나는 것같은 그림이 여기 있습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또한 그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세상에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뜻을 꺾지 못합니다. 압살롬의 반란으로 다윗이 왕궁에서 쫓겨나는 일이 생겼어도 하나님의 뜻은 꺽이지 않습니다. 우리 앞에 있는 어떤 불의, 불행, 슬픔, 고난도 하나님의 뜻을 바꾸지는 못합니다. 우리의 부르짖음은 하나님의 뜻을 바꾸려는 시도가 아닙니다. 부르짖음으로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고 그 뜻에 순종하려는 것입니다. 부르짖는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 한마음이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부르짖음과 하나님의 응답이 만나는 지점입니다. 오늘 하나님께 부르짖음으로 하루를 시작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응답을 경험해 보십시오. 하나님, 저희의 도움이 되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당신께 부르짖게 하시옵소서. 당신의 응답을 붙들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창 43-45장>

1/13/2024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시 3:3)

사실(fact)의 힘은 강합니다. 가끔 심한 고난으로 어려운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 하나님도 침묵하시면 낙심이 참 큽니다. 여기에 사람들의 비아냥은 괴로움을 더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주저앉을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이것을 뚫고 나갈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에게 있는 변함없는 사실(fact)입니다. 이 사실을 선포하고 주장하는 것에서 시작해 보십시오. 시편기자가 택한 길도 바로 이것입니다. 지금 그는 하나님에 관한 변함없는 사실을 선포하며 의지합니다. 느낌이 어떻든, 사람들이 뭐라하든 하나님에 관한 사실은 그대로니다. 시편기자의 이 선포가 강력한 것은 이것이 사실이기때문입니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먼저, 하나님은 우리의 방패이십니다. 고대의 전쟁에서 방패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하지만 방패를 든 병사라고 다 사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잘 만든 방패라도 헛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방패이시면 어떻게 됩니까? 또한, 하나님은 우리의 영광이십니다.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겨날 때의 굴욕을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초라하고 비참했었겠습니까? 하지만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에게는 영광이 있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영광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밑바닥에 내팽개쳐져도 하나님의 영광은 떠나지 않습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를 드십니다. 재판 중에 선고를 기다리는 죄인을 상상해보십시오. 하지만 마지막에 무죄가 선고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는 떨구었던 고개를 들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당신의 사람의 명예를 세우십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런 하나님을 믿기 바랍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우리의 방패요 영광이요 머리를 드시는 분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힘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이 힘입니다. 하나님, 당신은 저희의 방패시요 저희의 영광이시요 저희의 머리를 드는 분이십니다. 당신과 이 사실을 의지합니다. 오늘 무엇이든 당당히 직면하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창 37-39장>

1/12/2024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 (시 3:1-2)

고난이 사람을 깊고 여물게 만듭니다. 긴 세월 살다보니 이것이 정말 사실입니다. 하지만 눈앞에 고난이 닥치면 얘기는 달라집니다. 고난의 유익 같은 것은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그냥 당황하고, 낙담하고, 염려하게 됩니다. 눈앞은 깜깜해지고 보이는 것은 어려움 뿐입니다. 여기 시편기자가 힘들어하는 모습이 이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치는 대적이 "많다"는 말을 세번이나 반복합니다. 사실 고난을 당하면 공격하는 적이 벌떼처럼 많아 보입니다. 그에 비해 자신의 모습은 너무 초라하고 무기력합니다. 이 시편기자가 다윗이라면 이 상황은 그 아들 압살롬의 반란 때문에 처한 위기로 보입니다. 이렇게 고난당할 때 정말 더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특히 믿는 사람을 심하게 흔드는 공격입니다. 바로 사람들이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겪고있는 고난에 하나님이 침묵하신다는 것입니다. 마치 힘들어 하는 우리를 하나님이 외면하시는 것같습니다. 고난 자체도 어려운데 이런 느낌은 더 큰 어려움이 됩니다. 여기에다 사람들이 이 사실을 가지고 비아냥거리면 견디기 힘듭니다. 고난의 무게가 두세 배로 가중되는 것입니다. 이런 지점에서 우리는 둘중에 하나로 반응할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이 말을 듣고 하나님에 대한 기대를 접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상관없이 자신의 힘으로 고난을 어떻게 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이런 말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습니다. 상황이 어떠하든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과 인도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따라서 있는 형편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가고 또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한해 고난이 우리를 피해가지 않을겁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 하나님의 도움도 끊어진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겁니다. 이런 때 하나님께 실망하고 돌아서겠습니까? 아니면 누가 뭐래도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하겠습니까? 하나님, 이 한해 어떤 고난에도 꺽이지않게 해주십시오. 당신이 침묵하시는 순간에도 당신을 의지하게 해주십시오. 저희의 고난 가운데서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33-36장>

1/11/2024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재판관들아 너희는 교훈을 받을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시 2:10-12)

'경고'란 위험을 미리 알리는 것입니다. 어떤 경고는 매우 엄중합니다. 이런 경고를 무시하면 큰 화를 당합니다. 쓰나미나 지진 같은 것을 상상해보십시오. 여기서 시편기자의 경고가 이것입니다. 바로 하나님께 굴복하라는 것입니다. 이 경고의 일차적인 대상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권력자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상관없이 사는 모든 사람에게도 해당됩니다. 이 경고를 받아들인다면 이것은 지혜와 교훈이 되어 바른 처신을 도울 것입니다. 만일 이 경고를 가볍게 여긴다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고집피우고, 힘 자랑하고, 잘난척하지 마십시오. 무엇보다 하나님을 대적하지 말기 바랍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두려워 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기뻐하며 경배하십시오. 혹 하나님을 거역하며 살고 있다면 즉각 돌이키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입맞추십시오.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방법은 그 아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예배와 자유와 변화와 기쁨을 누리십시오. 오늘 이 경고대로 하나님께 굴복하십시오. 이미 굴복한 사람도 계속 굴복하기 바랍니다. 이 한해는 하나님께 굴복하는 해가 되기 바랍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은혜를 풍성히 누리기 바랍니다. 하나님, 이시간 당신께 굴복합니다. 당신의 아들로 말미암는 구원의 은혜를 풍성히 누리게 하시옵소서. 아울러 저희 가정과 주변에 이 은혜가 넘치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창 31-‐32장>

1/10/2024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시 2:7-9)

늘 되돌아와서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그래서 나는 뭘 해야 하는가?' 우리의 정체와 사명에 대한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분명하면 삶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 답이 불분명하면 삶도 어수선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믿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믿는다고 하면서 그가 누구인지 잘 모르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의 믿음에 대해 의심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믿는 대상이 어떤 분이십니까? 여기 시편기자는 그분을 하나님이 세우신 왕,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왕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입니다. 신약은 일제히 이분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증거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분입니다. 이런 방법으로 아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셨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저주의 십자가를 진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당하신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누룩처럼 작게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들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는 점점 커져서 땅끝까지 이르게 됩니다. 왕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모든 악한 세력은 굴복할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믿고 구원받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 더해집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예수님의 정체와 사명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권세와 스케일입니다. 따라서 예수님 믿는 사람은 세상의 불의에 주눅들지 않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승리를 주장하며 당당하게 삽니다. 또한 예수님 믿는 사람의 관심은 자기에게만 머물지 않습니다. 그의 관심은 가까운 이웃과 그 너머 땅끝에 있는 사람에게로 뻗어나갑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눈앞에 있는 현실만 보고 살지도 않습니다. 과거와 함께 미래에 반드시 될 일까지 보며 삽니다. 이 한해 예수님을 제대로 믿어 보십시오. 어느새 예수님의 스케일을 품고 살게될 것입니다. 하나님, 왕과 아들이신 예수님을 정확히 알게 해주십시오. 예수님에 대해 바른 믿음 갖게 해주십시오. 이 한해 예수님 권세와 스케일을 의지하며 살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창 28-30장>

1/9/2024

"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그들을 놀라게 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시 2:5-6)

보기에 속이 뒤틀리는 것이 있습니다. 불의가 기세등등한 모습입니다. 불의가 제어되지 않고 곳곳에서 날뜁니다. 심지어는 이것이 옳은 것으로 둔갑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불의는 언제나 불의입니다. 아무리 교묘히 자신을 포장해도 불의일뿐입니다. 불의 자체는 결코 옳은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이 불의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진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불의에 대해아주 무서운 분입니다. 냉혹하고, 정확하고, 타협하지 않는 분입니다. 이것이 불의한 자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때문에 오히려 안심하게 됩니다. 불의에 진노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는 소망입니다. 이때문에 우리는 힘들어도 바른 길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불의에 대해 한번 화내고 끝내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는 불의를 다루실 놀라운 계획이 있습니다. 바로 불의를 완전히 제압할 치밀한 계획입니다. 하나님은 왕을 세워 새로운 나라를 만드실 것입니다. 당시 이 왕은 앞으로 오실 메시아입니다. 신약은 이 왕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증거합니다. 그 나라가 메시아 예수를 통해 세워지는 '하나님 나라' 또는 '천국'입니다. 오늘날 이 나라는 이미 시작되어 (already) 완성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not yet). 지금 예수 믿는 우리는 이 나라의 백성입니다. 불의는 더이상 우리의 주인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유롭게 불의를 거부하고 의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물론 아직은 여전히 부족하고 실패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조금씩 나아지다가 어느날 완전히 불의를 정복할 것입니다. 이 한해 이런 면에서 진보가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지금 저희가 속해 있는 당신의 나라 감사합니다. 우리 왕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이 한해 저희가 당신의 백성답게 살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창 26-27장>

1/8/2024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시 2:4)

"미치겠다! 죽고싶다!" 드물지 않게 듣게 되는 극단적인 탄식입니다. 하지만 가끔은 심지어 우리 자신도 이렇게 탄식합니다. 특히 불의에 의해 큰 피해를 당할 때 이런 탄식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에는 속이고, 빼앗고, 짓밟고, 무시하고, 억압하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따라서 분노, 원통함, 억울함, 역겨움, 슬픔, 좌절의 탄식이 끊이지 않습니다. 이런 세상만 보면 우리에게는 두려움와 불안과 실망과 한숨뿐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다는 아닙니다. 이런 가운데서도 우리는 소망과 확신을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요? 여기 이 말씀을 보십시오.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지금도 하늘의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늘은 세상이 결코 침범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강해도 하늘의 하나님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아주 우스울 뿐인 것입니다. 하늘의 통치와 질서는 세상의 어떤 강하고, 악하고, 교활한 세력도 어찌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불의가 기승을 부려도 이것은 흔들리지 않고 도도하게 자기 길을 갑니다. 시편기자에게는 미래에 오실 메시아의 통치가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오심으로 이미 시작되어 완성을 향해 가는 메시아의 통치입니다. 이것이 우리 앞에 있는 또다른 현실인 것입니다. 바로 이 사실에 우리의 소망이 있습니다. 이 한해도 우리는 이 세상에 발을 디디고 삽니다. 그래서 겪는 어려움도 많을겁니다. 하지만 하늘의 통치도 경험하며 살기 바랍니다. 그러면 힘든 중에도 소망과 확신을 갖게 될겁니다. 하늘의 하나님,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당신을 찬양합니다. 이 한해 당신의 통치와 질서 속에 순종하며 살게 해주십시오. 힘든 일 가운데서도 소망과 확신을 가지고 살게 하옵소서.

<오늘의 성경읽기 창 24-25장>

1/6/2024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버리자 하는도다" (시 2:1-3)

이 한해가 두루 평탄하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아마 거의 그렇게 되지는 않을겁니다. 오히려 거칠고 혹독한 도전이 기다리고 있겠지요. 이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 정말 만만치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세상이란 하나님을 거역하는 모든 것, 곧 국가와 통치자, 갖가지 사회 시스템, 풍속, 개인, 등입니다. 이 모두는 하나님이 처음 의도하신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 있습니다. 이것들은 하나님의 원리와 질서와 공의 대신 욕심과 무질서와 불의로 가득합니다. 이런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산다는 것은 그 자체로 전쟁입니다. 이것은 이 시편이 생생하게 묘사하는 그대로입니다. 이 시편의 배경은 당시 흔히 있었던 주변 나라와의 전쟁입니다. 여기서 시편기자는 이것을 이방 나라와 왕들이 하나님과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우신 왕을 대적하는 전쟁으로 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그 통치에 대한 세상의 반역입니다. 나아가 메시아를 통해 이루어질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반역입니다.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버리자 하는도다." 과연 우리는 세상의 이런 물리적 압박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요? 이런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는 것이 가능할까요? 먼저 이런 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정체요 현실임을 인정하십시오. 이것이 피할 수 없는 현실이지만 그렇다고 좌절할 필요는 없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또다른 현실도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지금도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공의도 여전하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이 사실을 의지하기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 앞에 놓인 험한 세상을 이기는 길입니다. 하나님, 세상의 정체와 현실을 정확히 알게 해주십시오. 이 한해 세상의 거친 도전에도 꺽이지 않게 해주십시오. 오늘 믿음으로 당신을 의지하며 이 세상에서 승리하게 하옵소서.

<오늘의 성경읽기 창 18-20장>

1/5/2024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시 1:5-6)

사람의 속을 어떻게 다 알겠습니까? 하지만 시간이 좀 지나면 사람의 실체는 드러납니다. 의인, 즉 복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같은 사람입니다. 또한 악인, 즉 복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바람에 나는 겨같은 사람입니다. 이 둘이 함께 섞여 있으면 처음에는 누가누군지 잘 모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둘 사이는 뚜렷이 구분됩니다. 악인은 이런 차이로 인해 의인을 떠납니다.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 일 때문에 견디지 못하고 떠납니다. 또한 의인과 함께 있는 것이 갑갑하고 편하지 않아서 떠납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욕구를 채워줄 다른 것을 찾아서 떠납나다. 언뜻보면 악인은 스스로 원해서 떠나기를 선택합니다. 하지만 사실 하나님이 의인에게서 악인을 이렇게 분리시키십니다. 악인이 돌이켜 주님께로 돌아오지 않는 한 그 둘은 더욱 멀어지게 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의인은 점점 더 청결하고 순전한 그룹이 되어갑니다. 반면에 악인은 점점 더 공허하고 불순한 그룹이 되어갑니다. 이게 끝이 아닙니다. 어느날 최종적인 심판이 있습니다. 이 심판은 완전한 분리를 의미합니다. 악인은 하나님께로부터 영원히 분리됩니다. 아울러 의인으로부터도 분리됩니다. 이때 의인의 길은 하나님이 인정하십니다. 하지만 악인의 길은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이 둘의 영원한 운명은 이렇게 극단적으로 갈라집니다. 새해 우리 앞에 두가지 길이 놓여 있습니다. 하나는 복 없는 악인의 길입니다. 바람에 나는 겨처럼 살다가 결국 영원히 망하는 길입니다. 또하나는 복 있는 의인의 길입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살다가 마지막에 하나님께 인정받는 길입니다. 이 한해 어떤 길을 걷겠습니까? 지금 우리 앞에 선택의 기회가 있습니다. 바로 악인의 길을 버릴 기회입니다. 동시에 의인의 길을 붙잡을 기회입니다. 하나님, 선택의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 복 있는 의인의 삶을 선택합니다. 저희가 이 길을 잘 걷게 도와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창 14-17 장>

1/4/2024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시 1:5-6)

사람의 속을 어떻게 다 알겠습니까? 하지만 시간이 좀 지나면 사람의 실체는 드러납니다. 의인, 즉 복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같은 사람입니다. 또한 악인, 즉 복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바람에 나는 겨같은 사람입니다. 이 둘이 함께 섞여 있으면 처음에는 누가누군지 잘 모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둘 사이는 뚜렷이 구분됩니다. 악인은 이런 차이로 인해 의인을 떠납니다.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 일 때문에 견디지 못하고 떠납니다. 또한 의인과 함께 있는 것이 갑갑하고 편하지 않아서 떠납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욕구를 채워줄 다른 것을 찾아서 떠납나다. 언뜻보면 악인은 스스로 원해서 떠나기를 선택합니다. 하지만 사실 하나님이 의인에게서 악인을 이렇게 분리시키십니다. 악인이 돌이켜 주님께로 돌아오지 않는 한 그 둘은 더욱 멀어지게 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의인은 점점 더 청결하고 순전한 그룹이 되어갑니다. 반면에 악인은 점점 더 공허하고 불순한 그룹이 되어갑니다. 이게 끝이 아닙니다. 어느날 최종적인 심판이 있습니다. 이 심판은 완전한 분리를 의미합니다. 악인은 하나님께로부터 영원히 분리됩니다. 아울러 의인으로부터도 분리됩니다. 이때 의인의 길은 하나님이 인정하십니다. 하지만 악인의 길은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이 둘의 영원한 운명은 이렇게 극단적으로 갈라집니다. 새해 우리 앞에 두가지 길이 놓여 있습니다. 하나는 복 없는 악인의 길입니다. 바람에 나는 겨처럼 살다가 결국 영원히 망하는 길입니다. 또하나는 복 있는 의인의 길입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살다가 마지막에 하나님께 인정받는 길입니다. 이 한해 어떤 길을 걷겠습니까? 지금 우리 앞에 선택의 기회가 있습니다. 바로 악인의 길을 버릴 기회입니다. 동시에 의인의 길을 붙잡을 기회입니다. 하나님, 선택의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 복 있는 의인의 삶을 선택합니다. 저희가 이 길을 잘 걷게 도와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창 14-17 장>

1/3/2024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시 1:2)

복은 대개 공짜입니다. 하지만 아무나 복받는 것은 아닙니다. 복 받는 것에는 원칙이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죄를 거부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 뜻에 순종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의 본성이 그 반대로 간다는 것입니다. 내버려두면 우리는 쉽게 죄를 향해 달려갑니다. 하나님 뜻에 저항하면서 자기 맘대로 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런 본성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을까요? 여기 이에대한 두가지 비결이 있습니다. 먼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 하십시오. 여기서 율법은 율법서(모세오경)입니다. 좀더 확대하면 하나님이 계시하신 모든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좋으면 그 말씀이 즐겁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좋으면 그 말씀에 즐거이 순종합니다. 또한,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십시오. 우리는 속에 든 것대로 행동하게 됩니다. 지저분한 것을 생각하면 지저분하게 행동합니다. 속에 든 분노와 원망이 눈빛과 말과 행동이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는 사람은 그 뜻에 순종합니다. 소가 되새김질 하듯 밤낮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해 보십시오. 그러먄 그 말씀이 우리 삶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은 이런 사람에게 임합니다. 또한 이렇게 사는 것 자체가 복입니다. 모든 것을 가지고 있어도 하나님과 그 말씀이 빠져있으면 화입니다. 가진 것이 부족해도 하나님 말씀을 즐거워하면 복입니다. 이 한해 이 말씀대로 주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해 보십시오. 그리고 풍성한 하나님의 복을 경험해 보십시오. 하나님, 이 한해 당신의 말씀을 즐거워하게 해주십시오. 주야로 당신의 말씀을 묵상하여 저희 속이 말씀으로 채워지게 해주십시오. 이 한해를 복 있는 사람으로 살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창 4-6장>

1/2/2024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시 1:2)

복은 대개 공짜입니다. 하지만 아무나 복받는 것은 아닙니다. 복 받는 것에는 원칙이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죄를 거부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 뜻에 순종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의 본성이 그 반대로 간다는 것입니다. 내버려두면 우리는 쉽게 죄를 향해 달려갑니다. 하나님 뜻에 저항하면서 자기 맘대로 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런 본성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을까요? 여기 이에대한 두가지 비결이 있습니다. 먼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 하십시오. 여기서 율법은 율법서(모세오경)입니다. 좀더 확대하면 하나님이 계시하신 모든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좋으면 그 말씀이 즐겁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좋으면 그 말씀에 즐거이 순종합니다. 또한,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십시오. 우리는 속에 든 것대로 행동하게 됩니다. 지저분한 것을 생각하면 지저분하게 행동합니다. 속에 든 분노와 원망이 눈빛과 말과 행동이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는 사람은 그 뜻에 순종합니다. 소가 되새김질 하듯 밤낮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해 보십시오. 그러먄 그 말씀이 우리 삶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은 이런 사람에게 임합니다. 또한 이렇게 사는 것 자체가 복입니다. 모든 것을 가지고 있어도 하나님과 그 말씀이 빠져있으면 화입니다. 가진 것이 부족해도 하나님 말씀을 즐거워하면 복입니다. 이 한해 이 말씀대로 주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해 보십시오. 그리고 풍성한 하나님의 복을 경험해 보십시오. 하나님, 이 한해 당신의 말씀을 즐거워하게 해주십시오. 주야로 당신의 말씀을 묵상하여 저희 속이 말씀으로 채워지게 해주십시오. 이 한해를 복 있는 사람으로 살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창 4-6장>

1/1/2024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시 1:1)

2024년 첫날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가 받을 복은 어떤 복일까요? 이 복은 다름아닌 하나님과 연관된 복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 자신이 복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복입니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좋아 보여도 복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연관된 복은 당연히 도덕적입니다. 이 복에는 악이 포함되지 않습니다. 악한 방식으로 얻는 돈과 명예와 성공은 복이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복 있는 사람은 마땅히 악을 거부합니다. 악은 한번 발 디디면 쭉 빨려들어가는 특성이 있습니다. 한번 죄 지으면 두번 짓기가 쉬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것은 어느새 습관이 됩니다. 악인의 꾀를 따르다가, 죄인들의 길에 서게 되고, 결국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게 되는 것입니다. 악을 따르는 사람은 이렇게 악이 인격이 되어 "악인"이 됩니다. 또한 "죄인"이 되고 "오만한 자"가 됩니다. 반면에 복 있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그는 자유롭게 악을 거절합니다. 죄인의 길에서 뛰쳐나옵니다. 오만한 자의 자리를 박차고 나옵니다. 그는 죄가 자신에게 움트는 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것들이 채워집니다. 이것이 바로 복입니다. 2024년 한해 이런 주님의 복으로 복받기를 바랍니다! 이것을 위해 먼저 악과 죄와 오만함을 거부하십시오. 주님의 복은 커녕 이 한해를 다 망쳐버리는 확실한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악과 죄와 오만함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새해 첫 며칠을 조심하기 바랍니다. 모든게 잘 되고 있을 때도 조심하십시오. 실망과 걱정으로 마음이 무거울 때를 경계하십시오. 특히 화나서 뭔가를 저지르고 싶을 때를 조심하십시오. 순간순간 예상치 못한 곳에서 튀어나오는 죄의 유혹에 항상 깨어 있으십시오. 과거에도 늘 쉽게 당하던 죄에 대해서는 더이상 바보짓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하나님, 이 한해 죄의 유혹에 항상 깨어있게 해주십시오. 악과 죄는 어떤 모양이든 단호히 거부하게 해주십시오. 매순간 당신의 뜻을 따르게 하시고 당신의 복을 누리게 하옵소서.

<오늘의 성경읽기 창 1-3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