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8/2024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모든 나라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예배하리니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주재심이로다" (시 22:27-28)
시편 22편은 수천년 전 다윗의 경험입니다. 다윗은 극한 고난 중에 여호와께 기도했습니다. 여호와는 그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이제 이것은 다윗의 찬송이 되었습니다. 또한 이 사실은 자기 백성에게 알려져 그들의 찬송도 되었습니다. 하지만 얘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다윗은 이 사실이 땅 끝 모든 족속에게까지 알려질 것을 기대합니다. 그들은 이 사실을 듣고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올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처럼 여호와를 예배할 것입니다. 이것이 이 시편에 담긴 다윗의 전망입니다. 물론 이것은 다윗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전망입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다윗과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모든 나라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로부터 수천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겁니다. 다윗의 경험은 우리의 것이 되어 함께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 놀라운 원리의 완성은 우리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메시아의 고난을 예언한 이사야 53장 말씀입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사 53:6-12). 메시아의 죽음은 많은 사람의 죄를 위한 대속적 죽음입니다. 나중에 바울도 이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 3:23-24).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말마암는 구원이 어느날 우리의 경험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를 통해서도 계속 알려지게 될 것입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엡 2:5-7). 우리는 이 일을 위해 바울처럼 수고해야합니다.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 (엡 3:6-7). 여기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는 구원의 은혜가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경험과 찬송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여기서 멈추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와 증거를 통해 계속 다른 사람의 경험과 찬송도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저희 경험이 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놀라운 구원의 은혜가 저희를 통해 또다른 사람의 경험이 되게 해주십시오. 그들도 저희와 함께 당신을 찬양하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시 135-139편 >
6/27/2024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 (시 22:26)
사람마다 얼마나 독특합니까? 생긴 모습만큼이나 생각도 성격도 취향도 사는 방식도 다양합니다. 따라서 누구에게든 나와 같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심지어 자식에게도 이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이것이 가능합니다.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삶의 원리가 그렇습니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것입니다. 어느 때나 어떤 상황에서도 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 원리를 실제로 경험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 경험은 자신의 것으로만 남아있지 않게 됩니다. 그는 다른 사람도 함께 경험하기를 간절히 바라게 됩니다. 당연히 그는 이 원리를 다른 사람에게도 주장할 것입니다. 아마 그는 이것이 다른 사람의 경험이 되도록 기도하며 애쓸겁니다. 내게 부어진 축복은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야 합니다. 지금 다윗이 이스라엘을 향해 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이 단순한 원리에 얼마나 깊고 많은 내용이 담겨 있습니까? 이 원리는 다윗 자신이 절절하게 경험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다 경험해야할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오늘 우리의 경험도 되어야 합니다. 평생 이 말씀의 원리를 붙들고 살기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어떻게 실제가 되는지를 보게 될겁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을 향한 다윗의 축복입니다.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 다윗은 그들이 영적으로 늘 살아 있기를 축복합니다. 이 축복에는 '결코 포기하지 말라'는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먹고 배부를 것입니다. 여호와를 찾는 사람은 그를 찬송할 것입니다. 이것은 언제나 그렇게 될 것입니다. 이 원리의 클라이막스는 역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겸손한 순종이 그의 부활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그분과 함께 죽으면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롬 6:4). 하나님, 저희가 겸손히 당신을 구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나 새생명 가운데 행하게 해주십시오. 오늘 저희의 넘치는 복이 다른 사람에게도 흘러가게 하옵소서.
<오늘의 성경읽기 시 130-134편>
6/26/2024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큰 회중 가운데에서 나의 찬송은 주께로부터 온 것이니 주를 경외하는 자 앞에서 나의 서원을 갚으리이다" (시 22:24-25)
아무래도 밝고 힘있는 사람에게 마음이 갑니다. 기왕이면 이런 사람과 함께 하고싶습니다. 그와 함께 일하면 모든게 술술 풀릴 것같습니다. 혹 그에게 어떤 필요가 생기면 적극적으로 달려가 돕고 싶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본성입니다. 반면에 가능하면 연약하고 힘든 사람은 피하고 싶습니다. 그의 어둡고 괴로운 형편이 부담스럽습니다. 혹 그가 뭔가를 부탁할까봐 조마조마 합니다. 그에게 엮이면 괜히 손해가 많을 것같은 두려움도 있습니다. 이것도 우리의 본성입니다. 그런데 만일 주님이 우리를 이런 식으로 대하신다면 어떻게될까요? 주님이 우리가 좋을 때만 좋아하신다고 상상해보십시오. 하지만 우리가 어려울 때는 외면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가 성공할 때만 받아주시고 실패할 때는 거절하시면 어떻게됩니까? 우리가 가장 외롭고 힘들 때 주님은 눈앞에서 사라지실겁니다. 슬픔과 좌절로 쓰러져 있는 우리에게서 주님은 얼굴을 돌리실겁니다. 더이상 우리에게는 부르짖어 도움을 구할 분이 없어지는겁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 주님의 본성이 아닙니다. 주님은 힘없는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겪는 고통과 슬픔을 공감하십니다. 우리에게 닥친 위험에 눈감지 않으십니다. 이럴 때 오히려 더 마음을 쓰십니다. 아마 눈을 더 크게 뜨고 우리를 살피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의 경험이었습니다.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우리 주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 주님의 성품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어떻게 느끼든 상관없이 사실입니다. 또한 우리 형편이 어떻든 상관없이 사실입니다. 이 사실은 무엇보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가장 잘 나타납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 (롬 5:6-10). 하나님, 예수님의 죽음으로 저희 죄를 용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의 연약함을 외면치 않고 살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이 사실을 근거로 어떤 형편에서도 당신을 의지하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시 125-129편>
6/25/2024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 가운데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지어다 야곱의 모든 자손이여 그에게 영광을 돌릴지어다 너희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여 그를 경외할지어다" (시 22:22-23)
'고난과 기쁨'만큼 서로 안어울리는 것이 있을까요? 하지만 이 두가지가 절묘하게 어우러질 때가 있습니다. '고생 끝에 낙이 오는' 경우입니다. 해산의 고통이 기쁨이 됩니다. 고난 중에 얻는 '발견의 기쁨'도 있습니다. 고난이 없었다면 결코 얻지 못할 소중한 깨달음같은 것입니다. 여기 다윗의 경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당하는 고난은 극단적인 것입니다. 마치 거의 죽게 된 위기와 고통입니다. 하지만 그가 여기서 선포하는 것을 보십시오. 이것은 기쁨으로 가득한 찬송입니다. 이제 그의 기도가 응답되었습니다. 여호와의 구원이 확실해졌습니다. 멀리 계시던 것같던 여호와가 가까이 계십니다. 여호와의 임재와 손길이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이것이 다윗에게 찬송이 됩니다. 여기서 다윗은 자신만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함께 찬송하도록 촉구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구원을 이스라엘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 가운데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지어다." 자신의 찬송이 모든 형제들의 찬송이라는 것입니다. 이 둘의 연관성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어느정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입니다. 다윗처럼 이스라엘도 하나님을 두려워 합니다. 마치 몸 안에 있는 지체처럼 다윗의 경험은 그의 믿음의 형제들과 연결됩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이 슬픔이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로 이것이 기쁨이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 자신만의 구원이 아닙니다. 이것은 믿는 모두의 구원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기쁨의 찬송이 됩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구원이 어디서 온 것입니까? 바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서 온 것입니다. 하나님, 당신의 거룩하심과 사랑을 찬양합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담긴 당신의 능력과 지혜를 찬양합니다. 이로써 저희가 오늘도 누리는 구원 감사합니다.
<오늘의 성경읽기 시 120-124편>
6/24/2024
"여호와여 멀리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내 생명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나를 사자의 입에서 구하소서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들소의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 (시 22:19-21)
기도의 신비 중 하나가 '내적 평안'입니다. 이것은 기도하는 사람만 아는 특별한 경험입니다. 이런 평안에는 질서, 안정, 용서, 위로, 소망, 등이 함께 섞여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기도 응답의 확신입니다. 기도하면서 응답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확신과는 다릅니다. 오히려 주님이 주시는 신비한 어떤 것입니다. 아직 구체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없습니다. 상황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입니다. 하지만 기도 응답을 미리 보는 것입니다. 여기 다윗의 기도에 있는 놀라운 반전을 보십시오. 그것이 바로 기도 응답의 확신입니다. 또한 이 확신과 함께 찾아온 '내적 평안'입니다. 당시 그가 얼마나 다급하고 위험했는지가 기도에 잘 나타납니다. 살려달라고 외치는 그의 절박한 기도를 보십시오. "여호와여 멀리 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내 생명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나를 사자의 입에서 구하소서." 하지만 순식간에 기도의 내용과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그 절박함이 확신과 평안으로 바뀐 것입니다.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들소의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 그는 주님이 살려주실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죽음의 위협과 고통이 그대로인 가운데 그가 맛보았던 '내적 평안'입니다. 이런 평안은 예수님의 고난 가운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고통은 고통 그 자체입니다. 예수님의 죽음도 실제적인 죽음입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그 내적인 평안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는 이 고난이 필연적이었습니다. 아울러 고난과 죽음 이후 부활도 필연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어도 다시 산다는 확신 가운데 돌아가신 것입니다. 이것이 그 어떤 고난도 흔들 수 없었던 확신과 평안입니다. 오늘 무엇보다 기도로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무거운 짐으로 고통받고 있다면 더 그렇게 하십시오. 주님, 당신께 나아갑니다. 저희가 다윗의 고통과 평안을 알게 해주십시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비밀을 깨닫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시 119편>
6/22/2024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그들이 나를 주목하여 보고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시 22:16-18)
공감이 되는 고통이 있습니다. 우리 자신도 겪어본 고통이면 더 그럴겁니다. 아무래도 아파본 사람이 아픈 사람을 더 잘 이해합니다. 속상했던 마음은 다른 속상한 마음을 함께 느낍니다. 하지만 우리의 공감을 뛰어넘는 고통도 있습니다.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한 고통이 그럴겁니다. 물론 다 경험해야만 공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의 경험너머에 또다른 고통의 세계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런 것이 '극단적인 고통'입니다. 여기 다윗이 표현하는 고통이 이런 것입니다. 그는 악한 원수들에게 에워싸여 있습니다. 그에게 그들은 야생개들과 같습니다. 이 개들은 주로 죽은 동물의 고기를 먹고 삽니다. 몰려든 개들이 눈을 번득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윗 자신이 거의 죽어가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 마지막 숨이 끊어지면 개들이 일제히 덤벼들 것입니다. 그들 중에 일부는 이미 그의 살을 물어뜯기 시작합니다.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라는 표현이 이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다윗 자신을 넘는 특별한 상황입니다. 여기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눅 24:39-40). 이렇게 '찔리신 손과 발'은 예수님의 고난을 상징합니다. 다윗은 계속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이미 그의 죽음을 확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살아서 자기 옷을 다시 입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도 다윗의 경험을 넘는 예언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고난과 연관하여 우리에게 익숙한 장면입니다.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마 27:35). 사람들은 예수님을 이미 죽은 사람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자신의 옷을 입을 가능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직접 경험하신 극단적인 고통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런 고통을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조금씩 더 깊이 공감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죄의 깊이를 깨달을수록 예수님의 고통이 더 생생해질 것입니다. 하나님, 저희 죄를 깨닫게 해주십시오. 예수님의 극단적인 고통을 깨닫게 해주십시오. 이를 통해 당신이 주신 구원의 은혜가 얼마나 큰 지를 알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시 106-112편>
6/21/2024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러쌌으며 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으며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 (시 22:12-15)
서로 치고받는 싸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맞는 싸움도 있습니다. 아무 저항 없이 그저 당하는 경우입니다. 여기 다윗의 형편이 그렇게 보입니다. 그가 어떤 상황에서 이렇게 당했는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당시 그의 상태는 너무 생생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원수를 동물로 비유합니다. 그 원수는 바산의 힘센 황소떼처럼 그를 에워싸고 있습니다. 그들은 굶주린 사자처럼 소리지르며 입벌려 찢으려고 덤벼듭니다. 여기서 다윗이 저항하는 모습은 없습니다. 아마 그렇게하기에는 원수가 너무 강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쩌면 처음에는 맞서다가 꺾여버렸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다윗은 때리면 맞고 찢으면 찢겨야 하는 처지입니다. 그의 몸에 있는 모든 물은 다 쏟아져 버렸습니다. 모든 뼈는 어그러졌습니다. 그 마음은 두려움과 절망으로 초처럼 다 녹았습니다. 질그릇 조각처럼 그의 힘은 다 말랐습니다. 그의 혀는 입천장에 붙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죽기 직전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이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처지를 주님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 주님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죽음의 진토에 빠지지 않았을거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위기와 고난이 원수의 공격 때문에 생긴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뜻이 아니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다윗은 자신의 처지를 주님의 뜻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다윗의 고백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완성됩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작정한 세력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던 무리를 생각해 보십시오. 마녀사냥같던 엉터리 재판정에 서서 심문받으신 예수님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군인들이 때리고 조롱할 때 그대로 당하시던 예수님의 모습은요? 십자가에 매달면 매달리시고 죽임을 당하시던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이것은 예수님이 이 고난과 죽음이 아버지의 뜻임을 정확하게 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처럼 겸손히 우리의 고난을 받아들이십시오. 이것을 통해 하나님이 당신의 계획을 이루실 것입니다. 하나님, 예수님이 짊어지신 고난의 십자가 감사합니다. 이를 통해 저희가 누리는 구원의 축복 감사합니다. 저희에게 주신 고난의 몫을 잘 감당하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시 99-105편>
6/20/2024
"오직 주께서 나오게 하시고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 나를 멀리 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까우나 도울 자 없나이다" (시 22:9-11)
공기없이 어떻게 삽니까? 물이나 햇볕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몸은 처음부터 이렇게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것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만일 공기가 희박해지면 그 자체로 치명적입니다. 이렇게 우리 몸은 공기와 분리될 수 없습니다. 물이나 햇볕 없는 상황은 어떻겠습니까? 다윗에게는 하나님이 그런 분입니다. 그의 탄생은 주님으로 말미암았습니다. 주님은 그가 어머니의 젖을 먹던 때에 주님을 의지하게 하셨습니다. 처음 태어난 순간부터 그는 주님께 맡겨졌습니다. 그때부터 주님은 그의 하나님이신겁니다. 한마디로 다윗은 하나님 없이 살 수 없습니다. 처음부터 이렇게 살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삶은 전적으로 주님께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그에게 주님이 안계신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런 면에서 다윗의 탄식이 더 절절합니다. "나를 멀리 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까우나 도울 자 없나이다." 다윗에게는 주님이 아니면 그 누구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물론 다윗은 주님 외에 어떤 것도 의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기서 다윗의 태도는 주님이 계시면 좋고 안계시더라도 어쩔수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도와주신다면 정말 좋겠다는 바램도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 없이는 죽겠다는 태도입니다. 주님과의 단절이 곧 사망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죽어도 주님과의 관계만큼은 양보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면서도 주를 의지하는 이유입니다. 죽고사는 절박한 순간에 죽어도 주와 함께 하고 살아도 주와 함께 하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님과 함께 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있을까요? 좋은 일에도 힘든 일에도 주님과 함께 하기 바랍니다. 주님, 주님 없이는 한순간도 살 수 없습니다. 오늘 저희와 꼭 함께 해주십시오.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과 함께 하는 것만큼은 양보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시 92-98편>
6/19/2024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시 22:6-8)
속이 뒤집어질 때가 있습니다. 특히 어떤 일이 자존심과 연결될 때 더욱 그렇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생각하면서 벌레를 떠올립니다. 자신을 사람으로 보기에는 너무 무가치하고 연약한 처지입니다. 사람들도 이런 다윗을 보면서 비방하고 조롱합니다. 더우기 다윗은 여호와를 의지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여호와가 도우신다는 증거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에게 고난과 수치는 멈추지 않고 계속됩니다. 사람들은 그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건지실 걸" 하며 그의 속을 뒤집어놓습니다. 여기서 이 다윗의 시편은 예수님의 고난을 그대로 예언하고 있습니다.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 그와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마 27:39-44). 어찌보면 십자가의 예수님은 벌레처럼 무가치하고 연약합니다. 그때 사람들이 하는 조롱은 속을 뒤집어놓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조롱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을 원망하거나 저주하지 않습니다. 또한 십자가에서 뛰어내려와 그 능력을 보이며 그들을 부끄럽고 두렵게 만들지 않습니다. 속이 뒤집어지면 우리는 보통 충동적인 보복으로 나아갑니다. 하지만 예수님께는 이런 모습을 찾을 수 없습니다. 바로 예수님께는 십자가 고난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당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는 자신을 구원하는 것보다 자신의 고난을 통해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예수님처럼 고난을 그냥 당하고 있어야 될 때가 있습니다.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처량하고 힘든 처지를 그대로 받아야하는 것입니다. 이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십자가 고난를 묵묵히 지신 예수님의 사랑 감사합니다. 십자가를 통해 저희에게 주신 구원의 은혜 감사합니다. 당신이 저희에게 허락하신 고난을 피하지 않고 잘 감당하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시 85-91편>
6/18/2024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우리 조상들이 주께 의뢰하고 의뢰하였으므로 그들을 건지셨나이다 그들이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였나이다" (시 22:3-5)
겉으로는 서로 모순되어 보이지만 그것이 진리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것을 '역설적'이라고 합니다. 이 시편에서 다윗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고통에 무심하신 듯합니다. 자신의 탄식에 아무런 반응도 보여주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지금 다윗은 바로 그 하나님을 찾고 있는겁니다. 불러도 응답하지 않으신 하나님을 부르고 있습니다. 자신의 신음소리를 듣지 않으신 하나님께 탄식합니다. 여기 서로 어긋나 보이는 것에 소중한 진리가 있습니다. 바로 '무슨 일이 있어도 찾을 분은 하나님 한분'이라는 것입니다. 기쁠 때나 괴로울 때나 우리가 찾을 분은 하나님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신 듯해도 우리는 그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을 찾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먼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안계시는 것같아도 계십니다. 하나님은 무심하신 것같아도 모든 것을 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신 것같아도 꼭 붙들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때에도 당신의 계획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어떤 다른 신을 우리 하나님과 비교하겠습니까? 그 어떤 좋은 것이 하나님을 대신하겠습니까? 다윗이 고백한 것처럼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구별되신 분입니다. 우리 하나님만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 찾는 근거는 하나님이 반응하신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이 사실입니다. 또 그 침묵이 길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본성적으로 무심하시고, 듣지 않으시고, 침묵하시는 분이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옛날부터 놀랍게 반응해오신 분이십니다. 다윗이 얘기한 것처럼 조상들이 의뢰하면 그들을 건지셨습니다. 그들이 부르짖어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들이 의뢰할 때 수치를 당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분이셨습니까? 여기서 다시 십자가에 달리신 우리 예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 저주와 버림을 받으시는 동안 예수님이 찾았던 분이 누구입니까 ? 십자가의 고통을 통해 예수님은 누구에게 순종하고 계신겁니까? 하늘의 침묵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누구의 계획입니까? 그 끔찍한 십자가에 드러난 거룩함과 사랑은 누구에게서 나온 것입니까? 바로 그 아들을 십자가에 죽도록 내어주신 '하나님 아버지'가 아닙니까? 십자가에 이렇게 역설이 있습니다. 하나님, 당신은 저희 하나님이십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을 찾게 해주십시오. 고통 중에라도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시 79-84장>
6/17/2024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시 22:1-2)
삶에 분리의 경험은 다반사입니다. 익숙한 일과 장소를 떠날 때가 있습니다. 가까이 있던 사람과 헤어져 사는 때도 있습니다. 경우마다 다르지만 대개 분리에는 고통이 따릅니다. 가끔 분리의 고통이 끔찍한 경우도 있습니다. 아마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낼 때가 그럴겁니다. 또다른 끔찍한 분리도 있습니다. 바로 무언가에 의해 버림받을 때입니다. 그것도 사랑하는 것에게 버림받는 것은 끔찍한 고통입니다. 수십년 충성을 바친 직장에서 어느날 해고당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평생을 함께 하던 배우자나 자녀에게 배신당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그런데 만일 억울한 누명을 쓰고 버림받는다면 어떻게 됩니까? 이런 경험의 일부만으로도 우리는 끔찍해질겁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보다 더 끔찍한 일은 하나님과의 분리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되는지에 상관없이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된 느낌만큼 처참한 경우가 어디있을까요? 특히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같은 느낌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이 경험한 끔찍한 일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때문에 그렇게 느꼈는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그의 탄원을 통해 그것이 얼마나 처참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내 신음소리를 듣지 않습니다. 내가 밤낮 부르짖어도 전혀 응답하지 않습니다.' 결국 다윗은 이런 확신에 이릅니다. '하나님은 나를 버리신 것이 틀림없다.' 그리스도의 고통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의 경험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하나님께 버림받는 아들의 고통입니다. 아무 죄가 없으시면서 죄를 뒤집어쓰고 죽는 죽음의 고통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 자체로 저주의 죽음입니다. 그리스도가 죽는 순간 하나님과의 관계는 끊어집니다. 그리스도는 철저하게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입니다. 그가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하실 때 이것은 버림받는 고통입니다. 그리스도가 당한 육체적인 고통도 상상하기 힘듭니다. 하지만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그 고통을 어떻게 다 헤아리겠습니까? 하나님, 그리스도의 버림받는 고통을 알게 해주십시오. 저희가 받아야 했던 그 저주의 죽음을 깨닫게 해주십시오. 그 고통에 담긴 사랑을 알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시 74-18편>
6/15/2024
"여호와여 주의 능력으로 높임을 받으소서 우리가 주의 권능을 노래하고 칭송하겠나이다"
시 21:13)
결국 우리가 하게 될 것은 무엇일까요? 분명한 것 하나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풍성한 찬양도 이것을 말해줍니다. 찬양은 완성될 천국에서 우리가 할 가장 중요한 일일겁니다. 찬양은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우리의 반응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행하신 것에 대한 우리의 노래입니다. 우리는 우리 삶의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된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삶의 조각조각들이 어떻게 퍼즐처럼 맞추어진 것을 보며 놀랄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결코 이렇게 될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이것을 최종적으로 확인하며 우리가 하게 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찬양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노래할 것입니다. 여기 이 시편의 결론도 백성들의 찬양입니다. 그들은 지금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또한 하나님의 권능을 노래하고 칭송할 것을 결단합니다. 얼마전 이 백성은 큰 전쟁을 치루었습니다. 그들의 왕 다윗을 전쟁터에 보내며 그들은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들의 기도는 다윗이 전쟁 중에 그의 구원과 승리를 위해 간구하면 들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그들이 기도한대로 다윗은 전쟁에서 목숨을 보존하고 승리했습니다. 이 승리는 하나님이 다윗에게 주신 영원토록 지극한 복의 한 부분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영원한 왕이 오실 때의 영광과 존귀와 위엄에 대한 그림자이기도 합니다. 백성들은 방금전 전쟁의 승리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임을 찬양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행하실 일이 여기서 끝이 아닌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그들은 계속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앞으로도 우리는 계속 하나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마침내 우리는 영원토록 찬양할 것입니다. 하나님, 당신이 행하신 일을 찬양합니다. 앞으로도 계속 찬양하게 해주십시오. 오늘 하루도 당신의 능력을 찬양하게 하옵소서.
<오늘의 성경읽기 시 63-68편>
6/14/2024
"대저 저희는 너를 해하려 하여 계교를 품었으나 이루지 못하도다 네가 저희로 돌아서게 함이여 그 얼굴을 향하여 활시위를 당기리로다" (시 21:11-12)
항상 성공만 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실패를 해본적이 없는 사람말입니다. 혹 어딘가에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을 보기는 어렵습니다. 대개 우리는 수없이 실패를 반복합니다. 순간순간 우리는 실패와 성공에 울고 웃습니다. 하지만 긴세월 지내면서 깨닫는 것은 실패와 성공이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실패와 성공이 날줄과 씨줄처럼 엮여 결국 뭐가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반복된 성공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에는 허무한 실패로 끝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연속된 실패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멋진 성공으로 끝날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 믿는 사람의 비밀이 있습니다. 믿는 사람은 실패할 때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믿는 사람은 성공할 때도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실패와 성공은 하나님 손에 놓입니다. 이것들은 그 손에서 새로운 것으로 빚어집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는 모든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8). 여기 다윗을 향한 백성들의 축복이 이것입니다. 다윗을 해하려 하는 대적의 계략이 있습니다. 따라서 다윗에게 위험과 어려움은 끊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결국 승리하는 것은 다윗이 될 것입니다. 방금전 거두었던 전쟁의 승리는 한 과정일뿐입니다. 전쟁터로 나가기 전에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전쟁 중에도 하나님께 구원과 승리를 간구합니다. 전쟁을 마친 다음에는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결국 이 전쟁은 하나님 손에서 다윗의 믿음을 굳게 하는 재료가 됩니다. 오늘 하루 어떤 일이 닥칠지 모릅니다. 하지만 한가지를 분명히 하면 됩니다. 어떤 경우든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하나님, 이 하루 무슨 일이 있을지 다 모릅니다. 하지만 어떤 것이든 당신을 의지하게 해주십시오. 이것이 당신 손에서 선으로 빚어지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시 57-62편>
6/13/2024
"네 손이 네 모든 원수를 발견함이여 네 오른손이 너를 미워하는 자를 발견하리로다 네가 노할 때에 저희로 풀무 같게 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진노로 저희를 삼키시리니 불이 저희를 소멸하리로다 네가 저희 후손을 땅에서 멸함이여 저희 자손을 인생 중에서 끊으리로다" (시 21:8-10)
기쁠 때 함께 기뻐하는 사람이 소중합니다. 슬플 때 함께 슬퍼하는 사람이 얼마나 든든합니까? 가족이든 친구든 이런 사람이 복입니다. 화날 때 함께 화내주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물론 이 화는 정당한 화라야 합니다. 간혹 부당한 취급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에 대해 우리는 분노하게 됩니다. 이럴 때 함께 분노하는 사람은 특별합니다. 따지고 싸워야할 때 함께 싸워주는 사람말입니다. 여기서 백성은 다윗을 축복하고 있습니다. 바로 다윗이 그의 모든 원수를 물리친다는 것입니다. 다윗을 미워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다윗을 망하게 하려고 작정한 사람들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들의 공격은 교활하고 악하고 강합니다. 한번 공격받을 때마다 휘청하게 될 정도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이들을 깨끗이 쓸어버릴 것입니다. 방금전 전쟁에서도 다윗은 이것을 실감했습니다. 결국 망하는 것은 다윗이 아니라 그의 원수입니다. 이 사실을 확신하며 산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다윗이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진노로 저희를 삼키시리니 불이 저희를 소멸하리로다." 다윗의 원수를 향해 하나님이 진노하십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시면 어느 누가 견디겠습니까? 다윗에게는 함께 분노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는겁니다. 다윗이 당하는 괴롭힘에 대해 하나님이 함께 싸워주십니다. 하나님이 마치 다윗의 부모나 큰 형처럼 주먹을 쥐고 벌떡 일어서십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어둠의 세력이 있습니다. 이 세력은 결국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떼어내려고 합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무슨 짓이라도 합니다. 때로는 달콤한 유혹으로 또 다른 때는 강력한 압박으로 우리를 공격합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 자신은 이러한 공격에 매우 취약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원수가 하나님께도 원수입니다. 그의 괴롭힘에 대해 하나님도 함께 분노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괴로움 중에도 소망입니다. 하나님, 저희 형편을 살피고 계시는 것 감사합니다. 저희를 괴롭히는 세력을 향해 함께 분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원수의 공격 가운데서도 승리를 확신하며 살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시 50-56편>
6/12/2024
"왕이 여호와를 의지하오니 지극히 높으신 자의 인자함으로 요동치 아니하리이다" (시 21:7)
기질적으로 차분한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좀 예민하고 쉽게 흥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느쪽이 더 좋은 기질일까요? 이에 대해서는 정답이 없습니다. 둘다 장점도 단점도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한쪽이 다른쪽보다 더 성숙한 것도 아닙니다. 성숙은 오히려 한쪽이 다른쪽을 보완하는 것입니다. 기질이 무엇이든 또 다른 차원의 '안정'이 있습니다. 어떤 일에 대해 차분한 사람은 침착하게 반응합니다. 반면에 다른 사람은 이리뛰고 저리뛰면서 반응합니다. 하지만 이런 기질적 반응을 넘어 그 중심이 견고한 사람이 있습니다. 소위 믿는 구석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믿는 대상이 하나님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기서 다윗이 의지하는 대상은 여호와입니다. 그의 생명과 삶과 다른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그는 방금전 전쟁터에서도 이것을 생생하게 경험했습니다. 전쟁의 상황인데도 그의 중심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그가 전쟁터에서 마냥 느긋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긴장, 초조, 예민, 불안, 두려움 같은 것이 왜 없었겠습니까? 하지만 그의 마음 깊은 곳에는 '안정'도 있었습니다. 그에게 이것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이것은 전장 한복판에서도 하나님이 임재하신다는 확신입니다. 하나님이 이 전쟁을 주관하시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능력으로 그가 생존할 뿐만 아니라 승리할 것을 믿는 것입니다. 다윗에게 그 중심의 '안정'은 무엇보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인자함 때문입니다. 여기서 인자는 '끝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다함이 없는 사랑을 아십니까? 하나님께 사랑받는 사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깊고 높고 길고 넓은지를 헤아려 보십시오. 그 사랑이 곧 중심의 '안정'이 될겁니다. 하나님, 당신의 끝없는 사랑 감사합니다. 지금도 변함없이 부어 주시는 사랑 감사합니다. 이 사랑때문에 오늘 저희 중심이 흔들리지 않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시 43-49편>
6/11/2024
"저가 생명을 구하매 주께서 주셨으니 곧 영영한 장수로소이다 주의 구원으로 그 영광을 크게 하시고 존귀와 위엄으로 저에게 입히시나이다" (시 21:4-5)
우리의 일상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늘 반복되고 예측 가능한 것라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여기서' (here and now) 일하십니다. 우리도 일상의 작은 것에 충성을 다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일상이 다는 아닙니다. 일상을 넘는 어떤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신비한 것이며 미래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도 가끔 살짝 열린 커튼 너머로 아주 조금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미래 어느날 온전히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도 살짝 경험하는 맛보기 같은 것입니다. 여기서 다윗이 고백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다윗은 주님 은혜로 전쟁터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이것을 "영영한 장수"라고 표현합니다. 마치 이것은 '영원한 생명" 같은 것입니다. 여기서 주의가 필요합니다. 이것을 신약의 '영원한 생명'과 같은 것으로 보면 곤란합니다. 신약의 '영원한 생명'은 이보다 훨씬 더 발전된 개념입니다. 다윗의 경우 이것은 오히려 단순히 '오래 사는 것'에 더 가깝습니다. 주님이 전쟁터에서 그의 생명을 구해주셔서 오래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단순히 오래 사는 것만 얘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이상의 뭔가를 말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다윗은 신약적인 차원은 아니더라도 뭔가 그 비슷한 어떤 것을 경험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다윗이 전쟁에서 살아남았을 때 그의 눈앞에 신비한 어떤 것이 커튼 사이로 조금 드러난 것입니다. 또 다른 차원이지만 이런 일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날 '영원한 생명'을 온전히 누릴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도 '영원한 생명'을 경험합니다. 이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 17:3). 이것은 미래적이지만(not yet) 또한 현재적입니다(already). 오늘 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바랍니다. 또한 '영원한 생명'의 온전한 모습을 소망하기 바랍니다. 하나님, 오늘 하루 저희에게 주신 생명 감사합니다. 오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해주십시오. 또한 미래의 '영원한 생명'도 소망하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시 36-42편>
6/10/2024
"그 마음의 소원을 주셨으며 그 입술의 구함을 거절치 아니하셨나이다(셀라) 주의 아름다운 복으로 저를 영접하시고 정금 면류관을 그 머리에 씌우셨나이다" (시 21:2-3)
"뭐든지 원하는 것은 다 해줄께!" 누군가에게 이런 얘기를 듣는다면 어떻겠습니까? 아마 누구도 말대로 그렇게 해주지는 못할겁니다. 대개 그런줄 알지만 말만이라도 고마울뿐입니다. 그런데 가끔 말대로 몇가지를 진짜 해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빽'이 있다면 얼마나 든든할까요? 사람 가운데는 아무 '빽'이 없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다른 '빽'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 마음에 소원을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그 소원을 말씀드리는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입니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시 37:4). 여기서 전쟁터의 다윗에게 소원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위험한 전투 가운데서도 살아남고 결국은 이기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제 이런 마음의 소원과 입술의 기도대로 다 이루어진 것입니다. 다윗처럼 하나님을 그 '빽'으로 모신 사람을 누가 당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든든한 '빽'이신 것을 아십니까?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도 소원을 주십니다. 가만히 하나님이 주시는 소원을 헤아려 보십시오. 이 소원은 때로 사랑하는 사람의 구원일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험한 시련을 끝까지 잘 견디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불의가 판치는 곳에서 정의가 서는 것이기도 합니다. 지금 정리하는 일이 깔끔하게 되기를 바라는 소박한 소원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하루도 건강했으면 하고 소원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소원을 그대로 하나님께 아뢰어 보십시오. 우리에게는 이것을 이루어 주실 하나님이 계십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요 15:7). 하나님, 저희 마음에 주신 소원을 잘 헤아리게 해주십시오. 이 소원을 따라 아뢰는 기도를 들어주십시오. 오늘 저희의 든든한 '빽'이신 당신으로 만족하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시 28-35편>
6/8/2024
"여호와여 왕이 주의 힘을 인하여 기뻐하며 주의 구원을 인하여 크게 즐거워하리이다" (시 21:1)
선물은 사람을 기쁘게 합니다. 꼭 필요한 것이면 더 기쁩니다. 하지만 선물이 선물 주는 사람을 대신하지는 못합니다. 선물의 기쁨은 선물 주는 사람에 대한 기쁨입니다. 선물 주는 사람이 있는 것이 기쁩니다. 또한 그의 마음 씀씀이가 기쁩니다. 여기서 시편기자는 주님의 선물을 기뻐합니다. 그가 받은 선물은 주님의 힘과 구원입니다. 만일 이 시편의 배경이 시 20편이라면 이 선물이 무엇인지가 분명해집니다. 시 20편에서 다윗은 막 전쟁터로 나가려던 순간이었습니다. 그때 백성은 하나님께 다윗을 구원해달라고 간구합니다. 이것은 전쟁터에서 왕을 지켜주시고 승리케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그 기도대로 하나님이 왕을 구원해주신 것입니다. 다윗은 이제 백성과 더불어 하나님이 주신 구원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전쟁터로 나가기 전의 긴장이 이제는 기쁨이 된 것입니다. 물론 이 기쁨은 하나님이 주신 힘과 구원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작 다윗의 기쁨은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니까 전쟁에서 지켜주시고 이기게도 하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확인하면서 그는 기뻤던겁니다. 오늘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헤아려 보십시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도 살펴보십시오. 이것이 기쁨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 하며 기뻐할 것입니다. 하나님, 당신이 주시는 선물 감사합니다. 당신이 행하시는 일 감사합니다. 오늘 당신이 살아계신 것이 저희에게 생생하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시 15-21편>
6/5/2024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속한바 기름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줄 이제 내가 아노니 그 오른손에 구원하는 힘으로 그 거룩한 하늘에서 저에게 응락하시리로다" (시 20:6)
시험결과는 시험을 다 치른 후에 나옵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합격을 예측하고 시험을 치른다면 어떻겠습니까? 선수가 이길 것을 알고 경기를 뛰는 것은 어떻습니까? 사업하려는 사람이 성공을 알고 일을 시작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군인이 승리를 알고 전쟁터로 나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것이 한마디로 '확신'입니다. 미래에 이루어질 것을 이미 된 것으로 믿는 것입니다. 다윗이 전쟁터로 나가면서 가진 것이 바로 이 '확신'입니다. 그는 전쟁을 치르기 전부터 여호와가 자신을 구원하실 것을 알았습니다. 여기서 그에게 구원은 미래적이지만 이미 이루어진 것입니다. 소극적으로는 그는 전쟁의 위험에서 틀림없이 건짐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적극적으로는 그는 이번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그가 전쟁터에서 소원하고 도모하며 기도하는 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동시에 그렇게 해달라고 중보하는 백성의 기도대로 될 것입니다. 여기 이 구원이 확실한 근거가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에 대한 그 자신의 강한 느낌이 아닙니다. 또한 백성의 간절한 바램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의 구원의 확실함은 하나님께 그 근거가 있습니다. 좀더 구체적으로는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에 그 근거가 있습니다. 다윗의 고백이 바로 이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속한바 기름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줄 이제 내가 아노니." 그의 확신은 아울러 하나님의 능력에도 근거합니다. "그 오른손에 구원하는 힘으로 그 거룩한 하늘에서 저에게 응락하시리로다."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틀림없이 승리할 것을 믿으십시오. 그 근거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능력 때문입니다. 승리를 확신하며 이 하루를 시작해 보십시오. 하나님, 당신의 자녀가 여기 있습니다. 당신의 능력으로 함께 해주십시오. 오늘 어떤 도전에도 승리하게 하옵소서.
<오늘의 성경읽기 시 1-5편>
6/4/2024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도모를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우리가 너의 승리로 인하여 개가를 부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 기를 세우리니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시 20:4-5)
'한마음'은 '같은 마음'입니다. 한마음인 부부가 있습니다. 한마음인 부모 자녀도 있습니다. 한마음인 교회도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획일적으로 똑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마다 개성도, 형편도, 역할도 다릅니다. 하지만 가치와 바램이 같은 것입니다. 서로 어긋나는 것은 사랑으로 조절되는 것입니다. 신약적으로는 각자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면 한마음이 됩니다. 이렇게 주님과도, 다른 형제들과도 한마음인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 다윗을 위한 백성들의 기도에 이것이 잘 나타납니다. 그들은 전쟁터에서 다윗이 소원하는 대로 이루시기를 기도합니다. 다윗이 도모하는 것과 기도하는 것을 이루시도록 기도합니다. 이 기도에 두가지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과 다윗이 한마음입니다. 주시는 분과 요구하는 사람이 한마음입니다. 다윗이 소원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다윗의 도모와 기도가 곧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다윗이 전쟁터에서 원하는 대로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신 약속에도 그대로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요 15:7). 또한, 이스라엘 백성과 다윗이 한마음입니다. 다윗이 전쟁터에서 소원하는 것이 곧 백성의 소원입니다. 다윗이 안전과 승리를 위해 도모하고 기도하는 것이 곧 백성의 것입니다. 따라서 다윗의 승리는 백성의 승리와 기쁨이 됩니다. 동시에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너의 승리로 인하여 개가를 부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 기를 세우리니" 그러니 다윗의 기도를 이루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마음'에 담긴 위력이며 비밀입니다. 주님을 중심으로 '한마음'인 공동체를 꼭 경험하기 바랍니다. 하나님, 당신과 '한마음'되게 해주십시오. 서로 '한마음'인 공동체를 허락해 주십시오. 오늘 ....의 소원과 도모와 기도가 꼭 이루어지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욥 40-42장>
6/3/2024
"성소에서 너를 도와주시고 시온에서 너를 붙드시며 네 모든 소제를 기억하시며 네 번제를 받으시기를 원하노라(셀라)" (시 20:2-3)
기초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건물의 기초나 식물의 뿌리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몸과 마음의 건강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과 일터의 안정도 이에 해당합니다. 기초가 흔들리면 모든 것이 흔들립니다. 따라서 어떤 문제가 생기면 곧장 기초부터 살펴보게 됩니다. 삶의 기초 중에 기초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여기에 삶의 모든것이 달려있습니다. 이 관계가 어긋나면 모든 것이 어긋납니다. 반면에 이 관계가 든든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든든합니다. 여기 전쟁터로 나가는 다윗을 위한 기도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근거해서 다윗을 지켜달라는 것입니다. 당시 성소와 시온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곳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어찌 이 장소에 제한되어 계시겠습니까? 하지만 이 장소를 통해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도록 되어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이 장소는 마치 하나님이 계시는 본부같은 곳이었습니다. 전쟁터의 다윗을 도우시고 붙드실 분은 이곳에 계시는 하나님입니다. 성소에서 맺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전쟁에도 영향을 끼치는겁니다. 이곳에서 예배를 받으신 하나님이 전쟁의 위험에서 다윗을 지켜주실겁니다. 평소 성소에서 경험한 하나님이 전쟁터의 하나님이 되시는겁니다. 하나님과의 든든한 관계가 이렇게 전쟁의 환난도 이기게 합니다. 이 하루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따라서 하루를 시작하며 가장 먼저 할 것은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높이며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앞에 하나님의 자녀로, 종으로 서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당신은 저희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루 저희의 곤경 가운데서 저희를 도우시고 붙들어 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욥 36-39장 >
6/1/2024
"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 (시 20:1)
경기를 앞둔 선수의 긴장이 있습니다. 큰 공연 직전의 예술가나 합격을 기다리는 사람의 긴장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전쟁터로 나가는 군인의 긴장만큼은 아닐겁니다. 전쟁터의 위험과 불안과 두려움은 상상이상입니다. 이 시편은 다윗이 전쟁터로 출정하기 직전에 쓴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곧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됩니다. 여기 전쟁터로 나가는 왕이 있습니다. 또한 그를 위해 중보기도하는 백성이 있습니다. 이 긴장된 순간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환난 가운데서 기도하면 응답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 환난은 전쟁에서 겪게될 어려움을 말합니다. 전쟁터에서 아무 어려움 없도록 기도하지는 않습니다. 틀림없이 혹독한 어려움을 당할텐데 그때 부르짖으면 응답해주실 것을 구합니다. 물론 이렇게 기도한대로 하나님은 환난 날에 응답하실겁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 믿는 사람에게 이것만큼 든든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 어떤 병력과 무기가 이것을 대신하겠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도 환난이 다양한 모습으로 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환난 날 응답하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환난의 소용돌이 속으로도 묵묵히 들어가는 이유입니다. 물론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꼭 우리가 원하는대로 응답하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때에, 당신의 방식으로 응답하십니다. 이것이 때로는 기도하는 사람의 갑갑함입니다. 환난 날에 우리가 원하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으면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눈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보이는게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다른 차원으로 행하시는 일입니다. 사실 우리가 원하는대로 되면 안심은 되겠지만 오히려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갑갑하고 괴로워도 하나님이 원하시는대로 되어야만 안전합니다. 환난 날에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환란을 주관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안전(security)입니다. 하나님, 저희의 환난에 응답해 주십시오. 당신이 이 환난을 주관해 주십시오. 저희 눈을 열어 당신이 행하시는 일을 보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욥 25-30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