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9/2024
"또 주의 종이 이로 경계를 받고 이를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시 19:11-12)
거울 앞을 그냥 지나치는 사람은 드뭅니다. 바쁘면 슬쩍이라도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봅니다. 멋있는 사람을 보면 김탄만 하고 끝나지 않습니다. 대개 그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는 자연을 통해 하나님을 봅니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있는 사람은 어떻겠습니까? 멈추지 않고 찬양과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그런데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바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알면 이렇게 자신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있을수록 자신이 더 적나라하게 보입니다. 대개 자신의 속모습을 보는 것은 괴로운 일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본능은 이것을 감추고싶어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만나면 달라집니다. 우리 속에 정결함에 대한 열망이 생깁니다. 그동안 끌어안고 있던 온갖 지저분한 것을 다 털어버리고 싶어집니다. 심지어 속에 꼭꼭 숨어 있는 죄까지도 다 찾아내어 처리하고 싶어집니다. 이렇게 정결해지고 싶은 열망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오직 하나님 앞에서만 이런 열망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이런 열망이 곧 정결함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정결케 하시는 하나님의 처분이 필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또 하나님께 구하는겁니다. 시편기자의 기도가 이것입니다.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정결해지고 싶습니까?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데서 시작하십시오. 죄에 대한 자각, 회개, 용서, 정결함에 대한 열망, 순종이 바로 거기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당신 앞에 섭니다. 저희 자신을 속속들이 드러내 주십시오. 저희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욥 7-12장>
5/28/2024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시 19:9-10)
우리는 가치있는 것에 지갑을 엽니다. 좀더 좋은 물건을 구하려고 애씁니다. 의미있는 일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시간을 냅니다. 우리는 가치를 추구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가치가 우리를 움직이는겁니다. 가치는 이렇게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어떤 가치냐 하는겁니다. 잘못되거나 쓸데없는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뭔가를 열심히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바른 것을 하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운전할 때 잘못된 길로 열심히 달린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열심히 달리면 달릴수록 더 많이 어긋나게 될 것입니다. 예를들어, 유용성을 따라 사람을 대하는 가치가 있습니다. 이런 가치는 자신에게 쓸모있는 사람만 존중합니다. 하지만 연약한 사람조차 소중히 여기는 가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영원까지 가는 가치가 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여기 시편기자가 말하는 가치가 바로 이것입니다. 바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영원히 가치있습니다. 이것이 율법의 목적입니다. 신명기에 이것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네가 호렙산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섰던 날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나를 위하여 백성을 모으라 내가 그들에게 내 말을 들려서 그들로 세상에 사는 날 동안 나 경외함을 배우게 하며 그 자녀에게 가르치게 하려 하노라 하시매" (신 4:10). 어떻게 하면 '하나님 경외'하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이것을 가르쳐줍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면 하나님을 경외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더 알아갈수록 우리는 하나님을 더 경외하게 될겁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서 삶의 모든 지혜가 나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닮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영원까지 가는 가치가 되는 것입니다. 이 가치를 아는 사람은 그냥 있지 못할 것입니다. 시편기자의 표현대로 이 가치를 사모하게 될 것입니다.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오늘 하루도 열심히 살기 바랍니다. 하지만 무엇을 좇아 사는지에 꼭 주의하기 바랍니다. 하나님, 말씀을 통해 당신을 알게 해주십시오. 당신을 경외하게 해주십시오. 오늘 하루 바른 가치를 좇아 행하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욥 1-6장>
5/25/2024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시 19:7)
우리는 작품을 통해 작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작가를 직접 만나 얘기를 나눌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것도 오랜 기간 자주 그의 얘기를 듣는다면 정말 제대로 그를 알 수 있을겁니다. 우리는 자연을 통해 그것을 만드신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말씀을 통해 또다른 차원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깊이 알고 싶습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으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으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 지식적으로 '하나님에 대해' 알게 됩니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경험하게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경험적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시편기자는 율법의 다양한 기능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하여 우리 영혼을 소성시킵니다. 영혼의 깊은 침체를 경험해본 적이 있습니까? 이것은 흔히 낙심, 혼돈, 무기력, 죄책감, 불안, 불신, 등과 함께 옵니다. 이것은 마치 늪 같아서 허우적댈수록 더 깊이 빠져듭니다. 하지만 침체된 우리 영혼을 살려내는 것은 하나님 말씀입니다. 메마른 영혼에 시원한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이로 인해 거의 죽어가던 영혼이 파릇파릇 살아납니다. 어둡기만 하던 영혼에 밝은 빛이 비칩니다. 이것이 자주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시편기자가 얘기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려내지 못할 것이 없을 정도로 완전합니다. 혹 지금 영혼의 침체를 겪고 있습니까? 어느만큼이나 심각하게 침체해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것이 무엇이든 다 살려냅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영혼의 소성을 경험하기 바랍니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을 생생하게 알기 바랍니다. 하나님, 당신의 말씀을 깨닫게 해주십시오. 저희 영혼이 말씀의 생명력으로 넘치게 하옵소서. 오늘 당신을 생생하게 알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에 1-3장>
5/24/2024
"해는 그 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 온기에서 피하여 숨은 자 없도다" (시 19:5-6)
당연한 것에 놀랄 때가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해'입니다. 해만큼 당연한 것이 있을까요? 하지만 해만큼 신기한 것도 드뭅니다. 매일 눈뜨면 보는 것이 해입니다. 이것은 한번도 어긋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해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입니까? 해없이 사는 하루를 상상해 보십시오. 이것은 불편함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입니다. 해처럼 일반적인 것이 사실은 이렇게 특별합니다. 시편기자는 여기서 해에 대해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천체물리학 차원의 얘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보통사람이 매일 보고 느끼는 얘기입니다. 해는 신부를 맞기 위해 그 대기실에서 나오는 신랑같습니다. 또한 달리기 코스를 처음부터 끝까지 일등으로 달리는 챔피언같습니다. 얼마나 힘있고 시원한 모습입니까? 이 해의 따뜻함이 미치는 범위는 어느 정도입니까? 그 온기에서 피하여 숨는 자가 없을 정도입니다. 해의 따뜻함이 미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도 매일 이 따뜻함을 즐기고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해가 주는 빛도 있습니다. 이렇게 결정적인 것이 마침 값도 없습니다. 그런데 시편기자는 여기서 해를 찬양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하늘에 해를 두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찬양입니다. 해를 만드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해를 두시려고 하늘을 펼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해를 통해 따뜻함과 빛을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해와 그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의 움직임을 설계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해를 통해 온갖 식물과 동물을 살리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해를 통해 우리를 섬세하고 정확하게 돌보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 당연한 것에 담긴 특별한 은혜를 깨닫게 해주십시오. 오늘 저희 일상을 통해 베푸신 사랑을 알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느 9-13장>
5/23/2024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시 19:1-4)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까? 어느 누구도 스스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갱도가 무너져 깜깜한 동굴 속에 갖혀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몸을 움직여 이곳저곳을 더듬으며 입구를 찾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아무리 해도 입구를 찾지 못하면 포기하고 맙니다. 처음에는 어딘가에 입구가 있다고 믿고 찾기 시작했지만 어느새 입구는 없다고 믿게 됩니다. 하나님을 찾는 것도 이와 비슷합니다. 아무리 애써 찾아도 하나님을 찾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은 없다고 믿게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먼저 자신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마치 갱도 밖에서 구멍을 뚫고 입구를 내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알려주시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 핵심은 다름아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가장 잘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연을 통해서도 당신을 알려 주십니다. 물론 자연이 예수님과 말씀을 대신하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자연도 하나님이 당신을 알려주시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여기 시편기자가 찬양하는 내용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는 자연을 통해 하나님을 풍성하게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늘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하늘을 보며 그것을 만드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됩니다. 낮이면 낮마다 자연은 하나님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밤이면 밤마다 자연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물론 자연이 실제로 언어와 소리를 통해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연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 끊임없이 듣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높은 하늘을 한번 쳐다보십시오. 주위에 둘러있는 푸르른 나무들을 보십시오. 곳곳을 물들인 형형색색의 꽃들도 보십시오. 이들을 통해 하나님의 손길을 보기 바랍니다. 또한 이들이 들려주는 하나님 얘기를 듣기 바랍니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 주님의 솜씨 노래하도다!" 하나님, 자연 속에 담긴 당신 모습을 보게 해주십시오. 자연이 당신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게 해주십시오. 오늘 자연을 통해 당신을 풍성하게 경험하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느 5-8장>
5/22/2024
"여호와여 이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이다 여호와께서 그 왕에게 큰 구원을 주시며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인자를 베푸심이여 영영토록 다윗과 그 후손에게로다" (시 18:49-50)
가끔 지난 날을 돌아볼 때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시간을 내어 일부러 회상해 봅니다. 많은 경우는 예기치 않게 문득 돌아보게 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을 만나면서 잊었던 과거가 불쑥 되살아납니다. 어린 시절을 보냈던 장소나 어머니표 음식이 지난 세월을 생각나게 합니다. 여기서 다윗은 어떤 계기로 지난 날을 돌아보고 있습니다. 그의 머리 속에 과거 험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습니다. 어린시절 그는 여러 형제들 사이에서 존재감 없이 보냈습니다. 그가 한 일은 아버지의 양떼를 치는 것입니다. 아마 그 중에서도 가장 궂은 일은 그의 차지였을겁니다. 몸의 피곤, 짐승의 위험, 밤의 고독과 공포가 그의 삶이었습니다. 사울에게 쫓겨다니던 일, 여러 전쟁을 치루던 일, 왕으로서 받은 내외적인 압박, 어처구니없이 저지른 실수, 자식들에게 일어난 끔찍한 일, 오랜 소망의 좌절, 친자식에게 당한 배신과 반역, 등입니다. 힘들고, 슬프고, 두렵고, 외롭고, 위태롭고, 초라하고, 당황스럽고, 끔찍한 일의 연속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삶의 과정 속에서 정말 분명한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주님은 살아계신다'는 사실입니다. 다윗이 수많은 위험에서도 생존했던 것이 그 증거입니다. 그가 연약함 중에 일어섰던 것이 그 증거입니다. 그가 잘못에서 돌이켜 다시 바른 길 걸었던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자기 백성뿐만 아니라 열방들 위에 우뚝 선 것도 그렇습니다. 이 모든 것은 주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에 경험한 일들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당신의 사람에게 베푸신 인자입니다. 다윗의 삶에서 정말 부러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윗에게 주님의 역사가 너무 생생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향한 그의 예배도 너무 생생합니다.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주님의 생생한 역사가 있습니까? 살아있는 찬양, 자백,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까? 다윗의 주님은 오늘도 살아 계십니다! 살아계신 주님, 당신을 찬양합니다. 당신이 베푸신 인자 감사합니다. 오늘 저희도 당신을 생생하게 경험하게 하옵소서.
<오늘의 성경읽기 느 1-4장>
5/21/2024
"여호와는 생존하시니 나의 반석을 찬송하며 내 구원의 하나님을 높일찌로다 이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보수하시고 민족들로 내게 복종케 하시도다 주께서 나를 내 원수들에게서 구조하시니 주께서 실로 나를 대적하는 자의 위에 나를 드시고 나를 강포한 자에게서 건지시나이다" (시 18:46-48)
나름대로 다들 애쓰며 삽니다. 하나님의 백성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조금이라도 더 제대로 살려고 노력합니다. 좀더 절제하고, 좀더 베풀고, 좀더 살피려고 힘씁니다. 하지만 우리가 결국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에 비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우리의 노력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의 노력만으로는 늘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 위에 부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살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우리가 할 것은 바로 예배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깨달으면 우리는 예배로 반응합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행하신 일에 대한 우리의 온갖 표현이 예배입니다. 그것은 찬양, 감사, 고백, 회개, 결단, 행동, 등으로 나타납니다. 다윗은 이 시편을 마무리하며 지금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애를 돌아보며 하나님의 큰 은혜를 본 것입니다. 그의 눈은 자신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얼마나 노력했는지, 얼마나 잘 되었는지에 머물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어떻게 일하셨는지에 맞추어집니다. 그에게 하나님은 '그의 반석'과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은 그를 위해 싸우시는 분입니다. 강한 적에게서 건지시고 적들 위에 높이 드시는 분입니다. 같은 경우는 아니지만 이것은 우리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세월이 갈수록 우리는 더 많은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가 영원토록 하게 될 것도 예배입니다. 다윗의 고백처럼 '나의 반석'이시며 '나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 베푸신 은혜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저희를 지키시고 든든히 세워주신 당신을 찬양합니다. 오늘도 저희가 힘써 행할 때 그 위에 은혜를 부어 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스 7-10장>
5/20/2024
"주께서 나를 백성의 다툼에서 건지시고 열방의 으뜸을 삼으셨으니 내가 알지 못하는 백성이 나를 섬기리이다 저희가 내 풍성을 들은 즉시로 내게 순복함이여 이방인들이 내게 복종하리로다 이방인들이 쇠미하여 그 견고한 곳에서 떨며 나오리로다" (시 18:43-45)
우리가 미치는 영향의 범위가 있습니다. 기본적으로는 자신과 가족과 일터입니다. 소속된 그룹이나 사회에도 어느정도 그렇습니다. 영향은 세금이나 투표를 통해 나라에까지 미칩니다. 아울러 우리에게는 영향의 힘도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것에 미치는 영향의 질이나 강도같은 것입니다. 여기 다윗의 영향이 어느 정도인지가 나옵니다. 그의 영향의 범위는 자기 나라를 넘어 이방 나라들에까지 미칩니다. 그의 영향의 힘은 이방 백성들이 굴복하여 그를 섬길 정도입니다. 이것이 다윗 통치 하의 이스라엘의 위세입니다. 많은 나라 백성들이 이제 다윗의 명령에 복종합니다. 그 이전 어느 때도 이같은 적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솔로몬 때 최고조에 이르렀다가 결국 사그러듭니다. 이후 이스라엘은 이 시절의 영광을 늘 사모하게 됩니다. 여기서 다윗의 영향은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문화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종교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이같은 승리와 영광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도 다윗은 이 엄청난 영향력이 "주께서" 주신 것임을 분명히 합니다. 바로 "주께서" 그를 풍성케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같은 원리가 오늘날 우리의 삶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주께서" 우리를 풍성케 하십니다. 무엇보다 이 풍성함은 영적인 것입니다. 주님과의 막힘없는 교제를 통해 우리 속이 주님의 충만으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그 내용은 주님의 은혜, 지혜, 평안, 사랑, 거룩함, 성픔, 등등 셀 수 없이 많은 것들입니다. 이 모든 풍성은 결국 자신의 삶, 가정, 일터, 교제권을 지배합니다. 이것은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과 사회와 나라와 세계에까지 미치게 됩니다. 우리가 뭐라고 그렇게 되겠습니까? 우리가 과연 뭘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우리의 솔직한 마음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자녀입니다. 또한 "주님이" 하시면 됩니다. 주님, 여기 당신의 자녀가 있습니다. 저희를 당신의 것으로 풍성케 해주십시오. 오늘 이를 통해 다른 한사람이 당신을 경험케 하시옵소서.
<오늘의 성경읽기 스 4-6장>
5/18/2024
" 주께서 또 내 원수들로 등을 내게로 향하게 하시고 나로 나를 미워하는 자를 끊어버리게 하셨나이다 저희가 부르짖으나 구원할 자가 없었고 여호와께 부르짖어도 대답지 아니하셨나이다 내가 저희를 바람 앞에 티끌 같이 부숴뜨리고 거리의 진흙 같이 쏟아 버렸나이다" (시 18:40-42)
방어적인 전투가 있습니다. 적이 공격하면 그것을 막아내는 전투입니다. 하지만 전투에는 공격적인 요소도 있습니다. 먼저 적극적으로 적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전투의 중요한 한 원리는 역시 '공격이 최선의 방어'입니다. 늘 방어만 하다보면 아무리 잘 막아도 많은 피해를 당합니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공격하면 그 자체가 최고의 방어도 되는 것입니다. 공격하는 동안 적이 오히려 방어적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공격을 통해 적의 공격 역량에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권투, 축구, 농구같은 운동 경기도 같은 원리입니다. 여기 시편의 다윗은 어떻습니까? 그는 적의 공격에 당하기만 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에게 그런 때가 적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그는 적극적으로 적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가 공격하자 적이 등을 보이며 도망칩니다. 그의 공격이 얼마나 대단한지 적이 꼼짝 못하고 당합니다. 결국 적은 회복불능의 패배를 하고 맙니다. 이때 적의 모습에 대한 다윗의 묘사가 재미있습니다. 적이 아무리 부르짖어도 구원할 자가 없고 여호와께 부르짖어도 아무 대답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의 적은 바람 앞에 티끌 같이 부서지고 맙니다. 거리의 흙같이 쏟아지는 신세입니다. 우리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해보십시오. 당시 예수님을 공격하는 세력이 있었습니다. 그 공격은 마귀의 시험에서부터 십자가까지 계속되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소극적으로 당하기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공격하셨습니다. 때로는 귀신을 쫓아내시는 것으로, 다른 때는 잘못된 지도자들을 꾸중하신 것으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획을 좇아 사셨다는 점에서 공격적이었습니다. 어떤 방해에도 예수님은 묵묵히 이 길을 가셨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사단을 제압하고 우리를 그 속박에서 자유케 하는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것이 공격적이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당하신 십자가 죽음이 오히려 사단에게는 치명적인 패배가 되었습니다. 이 원리는 우리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적의 공격에 늘 당하기만 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다는 아닙니다. 물론 늘 깨어 적의 공격을 잘 막아야 합니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주님의 뜻을 행함으로써 공격적이어야 합니다. 빛의 자녀로서 한걸음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그러면 어둠은 한걸음 뒤로 물러납니다. 주님, 저희가 적의 공격을 잘 막아내게 해주십시오. 아울러 적극적으로 공격하게 해주십시오. 오늘 빛의 자녀로서 어둠을 밝히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대하 33-36장>
5/17/2024
"주께서 또 주의 구원하는 방패를 내게 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들고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 내 걸음을 넓게 하셨고 나로 실족지 않게 하셨나이다 내가 내 원수를 따라 미치리니 저희가 망하기 전에는 돌이키지 아니하리이다 내가 저희를 쳐서 능히 일어나지 못하게 하리니 저희가 내 발 아래 엎드러지리이다 대저 주께서 나로 전쟁케 하려고 능력으로 내게 띠 띠우사 일어나 나를 치는 자로 내게 굴복케 하셨나이다" (시 18:35-39)
군대 갔다온 사람만큼 얘기거리가 많은 사람도 드물겁니다. 직접 전투에 참여해본 사람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전쟁은 극단적인 상황을 만듭니다. 반걸음 왼쪽에 있다가 죽고 그 반대면 사는 일이 허다합니다. 전쟁으로 인간이 가장 비참하게 되고 또 전쟁으로 어떤 인간은 영웅이 됩니다. 여기 다윗의 시편은 전쟁 무용담입니다. 승승장구 하는 장수의 생생한 모습입니다. 이것은 다윗이 직접 전투를 치르며 경험한 내용일 것입니다. 다윗은 이 얘기하면서 아주 흥분되어 있는 듯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자세히 보십시오. 이것은 다윗 자신의 얘기가 아닙니다. 바로 주님 얘기입니다. 자신이 온갖 공격을 막아내고 살아남은 것은 주님이 방패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가 어떤 상황에서도 든든하고 안전했던 것은 주님의 오른손이 그를 꼭 붙들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군인보다 크게 되어 전투를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온유함이 그렇게 만들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가 하는 얘기의 주인공은 다윗 자신이 아니라 이렇게 주님이십니다. 다윗이 으쓱한 것은 자신이 잘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다윗이 신난 것은 자신이 이겨서가 아니라 주님이 이기게 하신 것입니다. 주님 때문에 위험한 데서도 안전할 수 있습니다. 주님 때문에 약한 자가 큰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주님 때문에 완벽하게 승리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오늘 하루 우리 삶의 주인공이시길 바랍니다. 주님 때문에 신나는 일이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 오늘 저희를 지켜주십시오. 저희에게 힘과 용기를 주십시오. 주님 때문에 신나는 승리를 경험하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대하 29-32장>
5/16/2024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뇨 이 하나님이 힘으로 내게 띠 띠우시며 내 길을 완전케 하시며 나의 발로 암사슴 발 같게 하시며 나를 나의 높은 곳에 세우시며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니 내 팔이 놋 활을 당기도다" (시 18:31-34)
공허한 말이 있습니다. 껍데기만 있고 속은 빈 말입니다. 이런 말은 하는 사람에게도 듣는 사람에게도 공허합니다. 말이 아무리 화려하고 또렷해도 그럴 수 있습니다. 때로는 믿는 사람의 말도 공허합니다. 들은 것이 많아서 쉼없이 말을 쏟아낼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말씀과 신학의 고상한 얘기까지도 합니다. 어떤 사안에 대해서 꽤 논리정연한 주장을 펼치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속 빈 강정같이 허무할뿐입니다. 여기 다윗의 말을 보십시오.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뇨?" 이 한마디에 얼마나 많은 것이 담겨있습니까? 이 단순한 고백이 얼마나 진하고 깊고 강합니까? 이 말이 칼처럼 예리해서 온몸이 해부되는 느낌입니다. 동시에 꿀처럼 달콤해서 말할 수 없는 감동과 위로를 경험합니다. 다윗처럼 이런 확신을 가지고 살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런 확신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다윗의 이 한마디에 그의 인생 전체가 담겨있습니다. 다윗의 인생은 그 아들 솔로몬만큼 화려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어린 시절부터 노년의 때까지 험한 일이 많았습니다. 이 모두를 거치며 그가 내린 결론은 '여호와만이 하나님이며 나의 하나님만이 반석이시다'는 것입니다. 운동선수는 무한반복의 연습을 통해서 연마됩니다. 일을 수도 없이 반복하면서 우리는 달인이 됩니다. 만일 다윗에게 시련이 한번 뿐이었다면 이런 고백을 하기 힘들었을겁니다. 수없는 시련을 거치며 차곡차곡 쌓인 하나님 경험이 바로 이 고백입니다. 아무리 큰 배도 빙산을 보면 무서워 합니다. 그것은 빙산의 일각 밑에 숨어 있는 어마어마한 얼음 덩어리 때문입니다. 다윗의 한마디 말이 이처럼 무겁게 다가 옵니다. 그것은 그속에 그의 평생의 시련과 하나님의 역사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나의 하나님만이 하나님이며 그분만이 반석이시다'라고 고백하기 바랍니다. 이것이 쌓여 인생 전체를 돌아보면서도 이렇게 고백하기 바랍니다. 하나님, 당신만이 참 하나님이십니다. 당신만이 저희 반석이십니다. 오늘 이 사실이 더 분명해지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대하 25-28장>
5/15/2024
"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심이여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시리이다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에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 넘나이다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정미하니 저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의 방패시로다" (시 18:28-30)
어려움 없는 사람이 있을까요? 물론 어려움이 비교적 가벼운 사람은 있습니다. 하지만 혹독한 어려움이 떠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작은 어려움에도 쉽게 넘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왠만한 어려움에는 흔들리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사람에게 어려움은 그 내용이나 그것을 보는 관점이 다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에게도 어려움은 여전히 어려움입니다. 누구나에게 그런 것처럼 어려움은 싫고, 괴롭고, 두렵고, 지겹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의 어려움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함께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려움의 터널 속에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터널 속에 우리만 홀로 있다면 얼마나 끔찍합니까? 하지만 거기에 우리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속에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다윗도 이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암흑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이 등불을 켜서 어두움을 밝히셨습니다. 그는 전장에서도 하나님 의지하며 적군들 사이를 달리며 담을 뛰어 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말씀의 완벽하고 섬세한 인도를 받으며 아슬아슬한 위기를 극복했습니다. 앞이 깜깜합니까? 함께 계시는 하나님의 빛이 어두움을 밝힐 것입니다. 치열한 전쟁을 치루고 있습니까? 함께 계시는 하나님의 힘으로 전투를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까다롭고 어려운 상황에 빠져 있습니까?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믿으십시오. 말씀의 완전하고 치밀한 인도를 따르십시오. 말씀만큼 안전하고 확실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 저희 눈을 밝혀 주십시오. 저희에게 힘을 주십시오. 저희를 말씀으로 인도해 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대하 21-24장>
5/14/2024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특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리심을 보이시리니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시리이다" (시 18:25-27)
우리 주님은 은혜로우신 분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누구도 구원받지 못합니다.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데도 우리가 누리는 구원은 오직 은혜입니다. 지금도 주님은 은혜로 우리를 대해 주십니다. 하지만 주님이 은혜로만 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를 공정하게도 대하십니다. 우리의 모습에 따라 달리 대하시는 것입니다. 다윗도 이런 주님의 공정함을 깊이 경험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자비한 자에게는 주님도 자비로 대하십니다. 완전한 자에게는 주님도 완전함을 보이십니다. 깨끗한 자에게는 주님도 깨끗함을 보이십니다. 반면에 주님은 악한 자를 거절하십니다. 주님은 겸손한 백성은 구원하시지만 교만한 자는 낮추십니다. 주님은 우리 마음의 동기를 보십니다. 우리의 성품과 행동도 관찰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맞는 방식으로 우리를 다루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서 주님 자신의 성품을 보실 때 기뻐하십니다. 물론 그 반대인 경우는 싫어하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주님의 성품에 참여할 수 있을까요? 어떤 방법보다는 주님과 가까이 하는 것이 최고입니다. 주님을 늘 가까이에서 만나다보면 주님의 성품을 조금씩 닮아갑니다. 주님 앞에서야 비로소 우리는 자신을 알고 겸손을 배워 갑니다. 주님의 빛 앞에서 우리는 깊은 죄성을 깨닫고 회개에 이릅니다. 우리가 주님 모습을 갖추어 가면 주님도 우리를 그에 맞게 대하십니다. 이것은 이 땅에 사는 동안 멈추지 않고 계속되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런 길에서 이탈하면 주님도 우리를 엄격하게 다루실겁니다. 우리 마음이 높아지면 주님은 혹독한 방식으로 우리를 낮추실 것입니다. 우리가 거리낌없이 나쁜짓을 하면 주님은 사랑의 매로 사정없이 내리치실 것입니다. 우리의 겉과 속이 다르다면 주님은 우리의 부끄러운 속을 다 드러내실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너무 좋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공정함도 너무 좋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늘 주님을 의지하는 근거입니다. 주님, 당신의 공정함 감사합니다. 저희를 자비롭고 바르고 깨끗하고 겸손하게 만들어 주십시오. 오늘 저희를 당신의 자비하심과 완전하심과 깨끗하심으로 대해 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대하 17-20장>
5/13/2024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상 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좇아 갚으셨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악하게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그 모든 규례가 내 앞에 있고 내게서 그 율례를 버리지 아니하였음이로다 내가 또한 그 앞에 완전하여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지켰나니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갚으시되 그 목전에 내 손의 깨끗한대로 내게 갚으셨도다" (시 18:20-24)
주님께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은 뭔가 다릅니다. 그는 틀림없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얼마나 주님의 은혜를 받았는지를 알려면 말씀에 얼마나 순종하는지를 보십시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는 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 말씀을 마음 속 깊이 새깁니다. 당연히 그 말씀을 좇아 삽니다. 그 말씀이 명령이면 순종합니다. 약속이면 믿음으로 붙듭니다. 격려와 위로이면 다시 벌떡 일어납니다. 교리이면 깊이 생각하며 소화합니다. 여기서 다윗은 주님이 자신을 어떻게 지켜주셨는지를 회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그를 기뻐하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이 기뻐하시는 다윗 자신은 어떻습니까? 그는 율법을 좇아 살고 있었습니다. 율법을 따라 죄 짓는 것을 거절했습니다. 율법을 지키면서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의로운 사람으로서 그 손은 깨끗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사는 다윗을 축복하셨습니다. 이 축복 중 하나가 주님의 보호였을겁니다. 주님이 어떻게 다 죽게 된 의인을 방치하시겠습니까? 그것도 주님을 향해 살려달라고 부르짖는 사람을 말입니다. 이렇게 주님이 먼저 은혜를 베푸신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그 은혜 때문에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 말씀을 순종합니다. 주님 말씀을 순종하면서 그는 주님을 더 알아갑니다. 이렇게 주님과 그는 뗄 수 없는 사이가 됩니다. 주님은 목자가 되시고 그는 그분의 양이 됩니다. 주님은 자기 양을 먹이고 지켜줍니다. 이렇게해서 그는 극단적인 위험과 고통도 이기게 됩니다. 주님, 당신의 은혜 감사합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의 말씀도 사랑합니다. 오늘도 당신의 말씀 좇아 순종하게 하옵소서. 저희 어려움을 넉넉히 이기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대하 13-16장>
5/11/2024
"저가 위에서 보내사 나를 취하심이여 많은 물에서 나를 건져 내셨도다 나를 강한 원수와 미워하는 자에게서 건지셨음이여 저희는 나보다 힘센 연고로다 저희가 나의 재앙의 날에 내게 이르렀으나 여호와께서 나의 의지가 되셨도다 나를 또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심으로 구원하셨도다" (시 18:16-19)
기쁨이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입니까? 바르고 성실하게 사는 사람,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하는 사람, 잘못한 것을 시인하는 사람, 자신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사람, 많은 짐을 묵묵히 감당하는 사람, 큰 슬픔을 잘 견디는 사람 등등입니다. 이런 사람은 보기만 해도 기쁩니다. 우리에게 늘 도움이 되는 사람도 그렇습니다. 물론 자식이나 제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에게 어려운 일이 생기면 어떻겠습니까? 그가 슬픈 만큼 슬프고, 힘든 만큼 힘들지 않을까요? 그가 위험하다면 그만큼 안타깝지 않겠습니까? 지금 다윗은 주님이 자신을 어떻게 지켜주셨는지를 회상하고 있습니다. 그는 마치 홍수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 모양이었습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거센 물결에 힘없이 떠내려갈 뿐입니다. 그런데 그때 주님이 위에서 그를 건져내신 것입니다. 이젠 끝장이라고 생각한 순간에 일어난 놀라운 일입니다. 마치 오늘날 물에 빠진 사람을 헬리콥터가 구조하는 것과 같습니다. 다윗은 또한 자신을 미워하는 자에게 포로로 잡혀있는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때 주님이 구출해 내신 것입니다. 꼼짝없이 죽었구나 하는 순간에 살려주신 것입니다. 마치 전쟁 영화의 극적인 명장면같습니다. 이런 일이 다윗에게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이에 대한 다윗의 고백이 놀랍습니다. "여호와께서 ... 나를 기뻐하심으로 구원하셨도다". 주님이 자신을 기뻐하셔서 구원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기뻐하십니다. 이것을 믿습니까? 오히려 우리를 인해 기쁨을 이기지 못하십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따라서 주님이 우리의 위험을 어떻게 외면하시겠습니까? 주님이 우리의 안타까운 부르짖음에 어떻게 무심하시겠습니까? 헬리콥터를 띄워서라도 건져주십니다. 정예 특수부대를 투입해서라도 구출하십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주님을 의지하십시오. 주님, 저희를 기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를 향한 사랑 감사합니다. 오늘 저희의 부르짖음을 들어주십시오. 저희를 원수의 손에서 건져 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대하 5-8장>
5/10/2024
"저가 흑암으로 그 숨는 곳을 삼으사 장막 같이 자기를 두르게 하심이여 곧 물의 흑암과 공중의 빽빽한 구름으로 그리하시도다 그 앞에 광채로 인하여 빽빽한 구름이 지나며 우박과 숯불이 내리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뇌성을 발하시고 지존하신 자가 음성을 내시며 우박과 숯불이 내리도다 그 살을 날려 저희를 흩으심이여 많은 번개로 파하셨도다 이럴 때에 여호와의 꾸지람과 콧김을 인하여 물밑이 드러나고 세상의 터가 나타났도다" (시 18:11-15)
'뭐라고 해야할지 모르겠다', '할 말을 잃었다', '말문이 막힌다'같은 표현이 있습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상황이 일어났을 때 쓰는 표현입니다. 감당 못할 슬픔이든, 너무 엄청난 광경이든, 깜짝 놀랄만한 일이 든 우리는 이런 말로 반응합니다. 이와 같이 말로는 다 담아낼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에 대해서는 얼마나 더 그렇겠습니까? 무슨 말로 주님을 충분히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지극히 제한적이지만 다만 최선을 다해 표현할 뿐입니다. 여기 주님에 대한 다윗의 표현을 보십시오. 주님은 마치 먹구름 뒤에 있는 해같은 모습입니다. 누구도 그 광채를 감당하지 못합니다. 그래서인지 먹구름 뒤에 숨어서 천둥과 번개와 우박을 내리고 계십니다. 마치 단단히 화나셔서 큰 소리로 꾸중하시는 모습입니다. 주님의 화는 폭풍처럼 땅과 물을 질타합니다. 그 앞에서 누가 잘난 척 할 수 있습니까? 다 바짝 엎드려 숨을 죽여야 됩니다. 여기서 주님이 이렇게 화나신 것은 바로 다윗의 대적때문입니다. 악의로 다윗을 괴롭히는 자들을 견디지 못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의 억울한 고통을 그냥 넘어가지 못하시는겁니다. 다윗의 다급한 비명을 듣고 주님이 이렇게 직접 나서십니다. 주님의 진노는 마치 하늘에서 쏟아지는 화살같습니다. 따라서 누구도 이것을 피하지 못합니다. 결국 다윗의 대적은 끔찍하게 파멸합니다. 이것이 다윗에게는 구원이고 사랑입니다. 다윗에게 주님은 바로 이런 분이십니다. 물론 이 표현은 주님을 다 담기에는 너무 모자랍니다. 하지만 이 표현은 그림처럼 주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속에 주님의 위엄과 의와 사랑이 생생합니다. 우리 주님이 바로 이런 분이십니다. 다윗처럼 주님을 믿고 의지하십시오. 어떤 어려움도 바로 주님께 아뢰십시오. 버거운 짐을 주님께 맡기십시오. 그리고 주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 보십시오. 주님, 당신의 위엄과 의와 사랑을 찬양합니다. 당신이 저희 주님이신 것 감사합니다. 저희 부르짖음을 들어주십시오. 오늘 당신을 생생하게 경험하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역하 1-4장>
5/9/2024
"이에 땅이 진동하고 산의 터도 요동하였으니 그의 진노를 인함이로다 그 코에서 연기가 오르고 입에서 불이 나와 사름이여 그 불에 숯이 피었도다 저가 또 하늘을 드리우시고 강림하시니 그 발 아래는 어둑캄캄하도다 그룹을 타고 날으심이여 바람 날개로 높이 뜨셨도다" (시 18:7-10)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전화가 있습니다. 멀리 계신 부모님 소식 같은 것입니다. 갑자기 자식에게 걸려온 전화도 어떤 때는 긴장이 됩니다. 평소 카톡같은 것으로 소식을 주고받아 왔다면 더 그럴겁니다. 우리에게 늘 이런저런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유독 자식에게 생긴 어려움은 더 견디기 힘듭니다. 만일 자식에게 급한 위험이 닥쳤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마 소리 지르며 이리 펄쩍 저리 펄쩍 뛰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자식이 어떤 '나쁜 놈'에게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평소 점잖은 사람이라도 험한 말을 하며 주먹으로 뭔가를 내리치지 않겠습니까? 심장은 뛰고, 눈은 이글거리고, 얼굴은 불그락푸르락 하지 않겠습니까? 이마 이 '나쁜 놈'을 그냥 안두겠다고 자리를 박차고 나갈지도 모릅니다. 지금 다윗이 얘기하는 주님 모습은 어떻습니까? 그는 급박한 위기 가운데 주님께 부르짖었습니다. '나쁜놈'이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꼼짝없이 죽게 생겼는데 살려달라는 것입니다. 다윗의 주님은 이 부르짖음을 들으셨습니다. 주님은 듣기만 하고 가만히 계신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주님이 그 계시던 곳에서 벌떡 일어나 나서시는 것으로 느꼈습니다. 주님이 자신의 위기에 직접 뛰어드신 것입니다. 주님은 분노 가운데 '누가 내 자식을 건드려'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주님이 나서시니 천지가 당신의 위엄과 진노를 감당하지 못합니다. 땅이 진동하고 산도 요동칩니다. 주님의 코에서 연기가 나오고 입에서 불이 나와 사를 때 다 숯이 되어 버립니다. 이 주님의 진노는 '나쁜놈'을 싹 쓸어버릴 기세입니다. 어느 누가 그분 앞에 고개를 쳐들고 버티겠습니까? 그분의 출현 앞에서도 계속 못된 짓을 할 자가 어디 있습니까? 다윗이 묘사한 주님 모습은 물론 상징적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가 실제로 경험한 주님의 도우심에 대한 묘사입니다. 그가 죽을 지경이 되어 주님을 찾았을 때 주님이 이렇게 나서주신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 그 기세등등하던 '나쁜놈'은 굴복했습니다. 그는 지금 주님 때문에 구원받아 이렇게 복을 누리고 있는겁니다. 우리의 간청에도 주님은 이렇게 움직이실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하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 당신의 위엄을 찬양합니다. 우리 주님과 아버지이신 당신을 찬양합니다. 오늘 저희 간구를 들어주시고 당신의 일을 행하시옵소서.
<오늘의 성경읽기 대상 28-29장>
5/8/2024
"사망의 줄이 나를 얽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스올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 (시 18:4-6)
꼼짝없이 죽게 생긴 때가 있습니다. 이정도는 아니지만 죽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여기서 다윗은 죽을 것같은 위기를 만났습니다. 아마 이것은 실제로 생명의 위협이었을겁니다. 다윗에게 이런 일은 적잖게 일어났습니다. 그는 "사망의 줄이 나를 얽고 ... 스올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라고 탄식합니다. 위기가 홍수처럼 급하게 밀려 옵니다. 이 물결에 한번 휩쓸리면 빠져나올 길이 없습니다. 이런 위기는 우리에게도 예외가 아닙니다. 때때로 재정적인 압박이 홍수처럼 살기등등하게 밀려옵니다. 이것은 자녀들의 문제, 일터의 불안함, 뒤틀린 일과 관계, 등 여러 위협적인 모양으로 옵니다. 이런 경우 대개 우리는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쳐봅니다. 하지만 결국 모든 노력을 포기하고맙니다. 우리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을 깨닫습니다. 사실 너무 초라하고 비참하지만 이것도 삶의 실제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순간을 우리를 빚으시는 소중한 재료로 삼으십니다. 우리는 자주 이런 삶의 소용돌이 속에서 변합니다. 경우마다 다르지만 변화가 일어나는 패턴은 다음과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뭔가 사용할만한 것도 없습니다. 자신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 매달립니다. 주님 이외에 다른 소망이 없습니다. 만일 주님마저 외면하시면 달리 갈 데가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 의지합니다.' 이것이 가장 큰 변화입니다. 자기 중심으로 살다가 주님 중심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여기 다윗도 "내가 환란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라고 했습니다. 죽게 된 순간 그가 달려가 매달린 분도 바로 주님이었습니다. 이제 '살려달라'는 부르짖음을 주님이 들으시면 됩니다. 주님이 일어나셔서 개입하시면 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대로 자유롭게 일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주님, 오늘도 당신께 나아옵니다. 일상 속에서 저희의 주인되어 주십시오. 홍수같은 위기 중에서도 저희를 지켜주옵소서.
<오늘의 성경읽기 대상 25-27장>
5/7/2024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시 18:2-3)
돌이켜보면 위험한 순간이 많았습니다. 사고의 위험, 죄의 유혹, 외적인 압박, 병의 위협, 등등입니다.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철렁하고 섬뜩합니다. 어떻게 이런 순간들을 지나 지금 여기에 있는지 신기할 뿐입니다. 다윗의 한평생도 참 험난했습니다. 하지만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며 그는 한가지 결론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지켜주셨다'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이 안전장치였습니다. 자신의 운, 건강, 지혜, 싸움기술, 친구, 무기, 군사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하나님 아니었으면 아마 벌써 끝장났을 것입니다. 위기때마다 그것을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다 하나님 덕이었습니다.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반석, 요새, 바위, 방패, 구원의 뿔, 산성이시라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오늘날 우리에게는 피부적으로 다가오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하나님의 보호에 대한 최고의 표현이었을 것입니다. 이 모든 표현을 다 동원해서 그는 선포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셨다!' 이 선포는 동시에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됩니다. '온갖 위험에서 건져주신 당신을 찬양합니다! 지금도 저희의 보호자이신 당신을 찬양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지 않으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불쑥 다가오는 사고에서 지켜주지 않으시면? 강한 유혹에서 지켜주지 않으시면? 저항하기 힘든 압박에서 지켜주지 않으시면? 심각한 병으로부터 지켜주지 않으시면? 가정과 일터의 위기에서 지켜주지 않으시면? 한마디로 그 상황은 우리에게 치명적일겁니다. 하지만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하나님, 지금까지 저희를 보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당신을 의지합니다. 저희를 온갖 위험에서 건져 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대상 22-24장>
5/6/2024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시 18:1)
주님을 생생하게 경험하고 있습니까? 주님에 대한 경험은 아주 다양합니다. 그 경험의 강도도 다양합니다. 주님을 경험하는 사람은 대개 예배로 반응합니다. 우리에게 주님이 생생한만큼 예배도 생생합니다. 우리는 여러 모양으로 예배드릴 수 있습니다. 그중에 한가지가 사랑의 고백입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이 시편은 다윗이 지난 세월을 돌아보며 쓴 것입니다. 그에게 주님이 어떤 분이셨는지가 너무 생생했습니다. 그동안 주님이 어떻게 해주셨는지도 생생했습니다. '주님이 어떻게 함께 하셨는지? 어떻게 지켜주셨는지? 어떻게 인도하셨고 어떻게 축복해주셨는지?' 이 모든 것은 이론도, 상상도, 바램도 아닙니다. 오히려 생생한 실제입니다. 부인할 수도, 지울 수도, 잊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주님의 생생한 실제에 대해 그가 한 반응입니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그의 반응은 바로 사랑 고백이었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나의 힘"이셨습니다. 주님은 저 멀리 계신 힘있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실제로 경험하는 "나의 힘"이십니다. 오늘도 우리는 "나의 힘"이신 주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다윗처럼 주님께 사랑을 고백하게 됩니다. 여기서 사랑은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온 어떤 것입니다. 이 사랑은 사실 우리에게서 생긴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이 먼저 부어주셔서 경험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사랑 고백은 주님의 사랑을 되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마치 어떤 물건이 빛을 받아 반사하는 것처럼 드리는겁니다. 오늘 주님을 생생히 경험하기 바랍니다. 따라서 생생한 사랑 고백으로 주님을 예배하기 바랍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주님, 당신은 저희의 힘이십니다. 당신은 저희의 사랑이십니다. 오늘도 당신을 생생하게 경험하게 해주십시오.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오늘의 성경읽기 대상 18-21장>
5/2/2024
"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사 나를 압제하는 악인과 나를 에워싼 극한 원수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 (시 17:8-9)
우리에게 소중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금', '보석' 같다고 표현합니다. 여기 시편기자의 표현은 어떻습니까? 소중한 것에 대한 그의 두가지 표현은 정말 극적입니다. 먼저는 '눈동자'입니다. '눈동자'같이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몸에서 소중하지 않은 부분이 있습니까? 하지만 '눈동자'는 뭔가 특별하게 느껴지는 어떤 것입니다. 마치 조금이라도 다치면 큰 일 날 것 같은 것입니다. 너무 소중해서 조심조심 다루어야할 그 어떤 것 말입니다. 만일 '눈동자'가 공격받으면 어떻게 합니까? 온 몸을 동원해서 방어하지 않겠습니까? 눈꺼풀을 꼭 감고, 손으로 막고, 머리는 숙이지 않겠습니까? 또 다른 표현도 있습니다. 바로 새의 '새끼'입니다. 이 또한 얼마나 극적인 표현입니까? 새에게 자기 '새끼'는 어떤 존재이겠습니까? 새는 자기 '새끼'에게 보통 어떻게 합니까? 만일 공격이 있으면 어떻게 자기 '새끼' 보호합니까? 시편기자는 새가 새끼를 자기 날개 아래 감추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새는 이런 위험 가운데 죽고사는 각오로 자기 새끼를 날개로 덮을 것입니다. 누구도 내 새끼를 건드릴 수 없다는 태도일겁니다. 내 새끼에게 조금의 상처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그렇게 할겁니다. 새에게 자기 '새끼'가 이만큼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시편기자가 결국 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자신이 하나님께 '눈동자'나 '새끼'같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지금 그에게 무자비한 악인의 공격이 있습니다. 이 공격은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없을만큼 강하고 위험합니다. 하지만 그는 이 순간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잘 알고 기도합니다. 당신의 소중한 자녀가 지금 위험하다고 아뢰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소중한 자녀를 보호하십니다. 마치 '눈동자'처럼, '새끼'처럼 반드시 지켜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우리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고 드리는 기도가 이렇게 확실합니다. 하나님, 저희를 눈동자처럼 여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새끼'처럼 소중하게 여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어떤 공격과 위험에서도 저희를 지켜주옵소서.
<오늘의 성경읽기 대상 4-6장>
5/1/2024
"하나님이여 내게 응답하시겠는고로 내가 불렀사오니 귀를 기울여 내 말을 들으소서 주께 피하는 자를 그 일어나 치는 자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주의 기이한 인자를 나타내소서"
(시편 17:6-7)
청결한 마음과 바른 행동이 사람을 당당하게 합니다. 이것은 위기를 당해서 하나님을 찾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정직한 사람의 기도를 들으실 것이라고 믿는겁니다. 잘못이 없는 사람을 불의한 세력에게 내어주지 않으실 것을 믿는겁니다. 따라서 매순간 주의 말씀을 좇아 바른 길을 걷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당당함은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우리가 기도로 나아가는 분을 잘 모르고 어떻게 당당하겠습니까? 우리 기도의 당당함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에 근거합니다. 여기서 다윗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바로 인자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피하는 자에게 특히 인자하십니다. 따라서 당신께 피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인자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께 피하는 자를 "그 일어나 치는 자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근거해서 이것은 언제나 사실입니다. 인자하신 하나님께 인자하심을 나타내실 것을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만큼 확실한 기도가 있을까요? 이것만큼 당당할 수 있는 기도가 있을까요? 우리의 뜨거운 기도 때문에 응답을 확신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를 들으시는 분의 성품과 뜻 때문에 응답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기도는 이렇게 응답을 확신하며 드리는 기도였습니다. "하나님이여 내게 응답하시겠는고로 내가 불렀사오니 귀를 기울여 내 말을 들으소서". 어려울 때 바로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기도하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특히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붙들고 기도해보십시오. 하나님은 당신께 피하는 자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는 것을 믿으십시오. 인자하신 하나님은 그 인자하심을 반드시 나타내실 것입니다. 하나님, 당신의 인자하심을 의지합니다. 지금 당신께 피합니다. 당신의 인자하심을 나타내시옵소서.
<오늘의 성경읽기 대상 1-3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