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2024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 받는 나의 고통을 보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찬송을 다 전할 것이요 딸 시온의 문에서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시 9:13-14)

'뺏고 빼앗기는'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살벌한 경쟁사회에서 경험합니다. '주고 받는' 관계도 있습니다. 가정이나 직장에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지는 관계입니다. 일한만큼 댓가를 받는 것이나 물건 살 때 합당한 값을 지불하는 것이 이에 해당합니다. 우리는 주는만큼 받을 것을 기대합니다. 만일 누군가에게 받으면 되갚아야 할 부담을 가집니다. 아마 '주고 받는' 관계만 잘 유지되어도 비교적 괜찮은 사회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또다른 종류의 관계도 있습니다. 이것은 '뺏고 빼앗기는' 것과는 반대로 오히려 '스스로 주는' 관계입니다. '주고 받는' 것과도 달리 '받지 않아도 주는' 관계입니다. 이런 것을 '헌신적인' 관계라고 이름 붙일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엄마와 자녀의 관계입니다. 물론 자녀가 자라면서 모양은 변하지만 그 관계는 그대로입니다. 어린 자녀가 엄마에게 뭐든 요구하는 이유입니다. 이 관계에 대한 완전한 모델이 있습니다. 바로 주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이것은 '주고 받는' 것만으로는 다 헤아릴 수 없는 관계입니다. 우리 주님은 '조건없이 주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시는', '기대보다 넘치게 주시는', '희생적으로 주시는' 분입니다. '은혜'가 이와 가까운 말입니다.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베푸시는 호의'입니다. 여기 시편기자는 그동안 이 은혜를 경험해 왔습니다. 그런데 그는 지금 심각한 위기와 고통에 빠져 있습니다. 그는 주님께 자신이 다 죽게 생겼으니 살려달라고 매달립니다. 자신을 미워하는 자에게서 받는 고통에서 건져달라고 호소합니다. 그가 여기서 구원받는다면 주님을 찬송하고 예루살렘에서 주의 구원을 기뻐할 것입니다. 시편기자가 이렇게 요구하는 것은 주님의 은혜를 알기 때문입니다. 혹 위기와 어려움에 처해 있습니까? 무엇보다 주님의 은혜를 구하십시오. 주님, 당신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오늘 저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저희를 시험과 어려움에서 건져 주십시오. 당신의 은혜로 찬송하며 기뻐하게 하옵소서.

<오늘의 성경읽기 신 17-18장>

2/27/2024

"여호와는 압제를 당하는 자의 요새시요 환난 때의 요새이시로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너희는 시온에 계신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행사를 백성 중에 선포할지어다 피흘림을 심문하시는 이가 그들을 기억하심이여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아니하시도다" (시 9:9-12)

'거절의 아픔'이 있습니다. 거절당할 때 느끼는 아픔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드물지 않게 경험합니다. 때때로 이것은 우리가 어떤 부탁이나 제안을 할 때와 상관없이도 옵니다. 존재나 인격 자체가 그냥 무시되고 짓밟히는 경우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자주 뼈가 부서지는 것같은 아픔입니다. 어떤 경우는 간절한 부탁이 거절되기도 합니다. 지금 사정이 너무 어려워 힘들게 부탁하는데 무시당한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대개 형편이 어려울 때는 거절의 아픔이 배가됩니다. 이 아픔은 자주 낙심과 좌절과 분노와 원망과 함께 옵니다. 이런 일을 겪다보면 자연히 '거절에 대한 두려움'이 생깁니다. '또 거절당하지 않을까' 하며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께만은 그러지 않아도 됩니다. 어떤 형편에서도 우리는 주님을 의지할 수 있습니다. 시편기자의 고백처럼, 주님은 어려움 당한 자를 거절하기는 커녕 오히려 든든한 피난처가 되십니다. 주님은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또한 주님은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당신께 나아가는 자를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겸손히 안타까움을 호소하는 자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때때로 우리가 죄짓고 갑갑함으로 나아갈 때도 주님은 받아주십니다. 우리의 사소하지만 어려운 사정에도 주의를 기울이십니다. 물론 어떤 부탁에 대해서는 주님이 거절하실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당신의 뜻에 따라 최선의 것을 주시기 위해 그렇게 하십니다. 이런 종류의 거절은 파괴적인 아픔이 아니라 성장통같은 아픔입니다. 그럴때조차 주님은 우리 자신을 거절하거나 내치지 않으십니다. 주님께 나아가기를 주저하지 마십시오. 어떤 형편과 사정에도 주님 먼저 찾으십시오. 주님은 당신을 찾는 자를 결코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주님, 지금 당신께 나아갑니다. 저희를 받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저희를 지켜주십시오. 저희 호소에 귀기울여 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신 15-18장>

2/26/2024

"여호와께서 영원히 앉으심이여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준비하셨도다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결을 내리시리로다" (시 9:7-8)

엔진 없는 차를 상상해 보십시오. 완벽한 차체를 가지고도 늘 그자리에 서 있을겁니다. 동기가 없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동기가 없는 아이는 등을 떠밀어도 학교 가기 싫어합니다. 동기가 떨어진 사람은 뭐든지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에게는 '왜 이것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 없습니다. 반면에 동기가 분명한 사람은 알아서 씩씩하게 움직입니다. 이런 사람은 혹 어려움이 생겨도 잘 견디며 뚫고 나아갑니다. 매일 우리가 뭘 하고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는 왜 그렇게 하는지를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거짓말을 멀리 합니다. 오히려 진실을 말합니다. 눈가림으로 적당하게 일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성실하게 최선을 다합니다. 근거없이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보다 남을 낫게 여깁니다. 사람들 사이에 끼어 나쁜 짓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른 길을 위해 소외와 비난을 선택합니다. 사람의 아픔에 무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족한 중에도 함께 하며 살핍니다. 그런데 여기서 해야하는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왜 우리는 나쁜 짓을 멀리해야 합니까? 왜 우리는 바르게 행해야 합니까? 더 나아가 이런 질문도 해보십시오. 왜 대부분이 무시하는 것을 신경쓰며 살아야 합니까? 이렇게 않해도 다들 잘 살고 있지 않나요? 이렇게 산다고 우리에게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이렇게 살다가 당하는 고통과 손해는 어떻게 합니까? 우리가 이런다고 세상이 달라집니까? 아마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이 분명하지 않으면 바르게 사는 것은 쉽지 않을겁니다. 바르게 살려고 합니까?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여기 시편기자의 고백에 결정적인 힌트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공의로운 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은 정확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유력한 변호사를 고용해서 유죄선고를 피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늘의 법정에서는 심판주 하나님의 정죄를 빠져나가지 못합니다. 반면에 믿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서는 주님이 친히 변호해 주십니다 (4절). 이 얼마나 통쾌한 일입니까? 공의의 하나님이 살아계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타락한 세상에서도 의로운 영역이 있습니다! 바로 이 사실에 우리가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매일 바르게 살아야할 동기가 있습니다. 하나님, 당신이 살아계십니다. 당신의 공의와 심판도 그대로입니다. 저희를 향한 사랑과 변호도 살아 있습니다. 오늘 불의한 세상에서도 저희가 바르게 살게 도와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신 13-14장>

2/24/2024

"내 원수들이 물러갈 때에 주 앞에서 넘어져 망함이니이다 주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으며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셨나이다 이방 나라들을 책망하시고 악인을 멸하시며 그들의 이름을 영원히 지우셨나이다 원수가 끊어져 영원히 멸망하였사오니 주께서 무너뜨린 성읍들을 기억할 수 없나이다" (시 9:3-6)

인생의 쓴맛을 보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물론 그 쓴맛은 경우마다 사람마다 그 종류나 정도가 다릅니다. 하지만 쓴맛없는 인생은 없을겁니다. 이런 쓴맛은 다양한 이유로 우리에게 옵니다. 자주 우리는 악한 세력의 공격으로 쓴맛을 봅니다. 우리가 비록 믿는 하나님의 자녀라도 이 공격에 당하고 맙니다. 우리가 어떤 싸움도 늘 이긴다는 것은 단지 희망사항일 뿐입니다. 실제로는 질 때가 많고 어떤 때는 처참하게 깨지기도 합니다. 바꾸어 생각하면 이 세상에는 악이 승리하는 때가 적지 않습니다. 마치 악한 세력이 세상을 완전히 통치하는 것같습니다. 이것은 우리 개개인의 경험을 넘어 공동체의 경험이기도 합니다. 믿는 사람의 모임이 악한 공격에 당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심한 공격으로 상처를 입어 생존의 기로에 서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악의 승리는 오래오래 가지는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어렵게 한 사람은 오래 못갑니다. 얼마지나면 어떤 형태로든 망하고 맙니다. 설사 끝까지 가더라도 마지막에는 꼭 망합니다. 인류 역사를 보면 악에 기초한 어떤 세력도 영영 승리하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얼마간 기세를 떨치다가 결국 망합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백성이 영영 패배하는 법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중에 얼마간 쓴맛을 보지만 결국 승리합니다. 이것이 확실한 것은 주님의 공의때문입니다. 주님이 살아계시는 것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주님의 공의도 살아있는 것을 믿기 바랍니다. 이것이 여기 시편기자의 고백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백성을 변호하십니다. 주님은 최고의 통치자로서 의롭게 심판하십니다. 주님은 결국 당신의 백성의 손을 들어주십니다. 마치 "네가 옳았다"고 말씀 해주시는 것과 같습니다. 반면에 그동안 기세등등하던 악한 세력은 멸망합니다. 그들의 이름은 영원히 지워집니다. 그들이 쌓아올린 모든 것은 무너집니다. 그들에게는 영원한 책망과 패배와 공허만 남습니다. 이제 우리를 공격하는 악한 세력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우리가 잠시 경험하는 패배를 어떻게 봐야 할까요? 주님, 당신의 공의를 믿습니다. 악의 승리가 결코 영원하지 않는 것을 믿습니다. 저희의 쓴맛도 영원하지 않는 것을 믿습니다. 저희가 오늘도 흔들림없이 바른 길 가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신 7-9장>

2/23/2024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내가 주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전하리이다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존하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 (시 9:1-2)

함께 하면 든든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 앞에서는 굳이 잘나보이려고 긴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편안하고 자유롭습니다. 함께 있으면 괜히 기분도 좋아지고 으쓱해집니다. 오래 함께 해도 지루한 법이 없습니다. 시키지 않아도 얘기가 술술 나옵니다. 그와 함께 보낸 시간만큼 영혼이 맑아집니다. 이 든든한 한사람이 우리를 이렇게 만듭니다. 이런 사람이 가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 얼마나 큰 복입니까? 그런데 만일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고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실 하나님만큼 든든한 분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의 성품을 하나씩 헤아려 보십시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도 헤아려 보십시오. 얼마나 든든합니까? 예를들어, 우리 하나님이 얼마나 정확하신 분입니까? 하나님의 때를 경험해 본적 있습니까? 얼마나 소름끼치도록 정확합니까? 우리에게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 헛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 헛점을 얼마나 정확하게 다루십니까? 우리 인생이 얼마나 다양한 조각들로 얽혀 있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의 손에서 이 조각들이 얼마나 정확하게 선(goodness)으로 만들어집니까? 지금 이런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고 있습니까? 이런 하나님의 성품과 행동을 날마다 맛보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시편기자처럼 반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전심으로 감사할 것입니다. 주님의 모든 기이한 일을 알릴 것입니다.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입니다. 그리고 지존하신 주의 이름을 찬송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감사하고, 선포하고, 기뻐하고, 찬송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이렇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애쓴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중심에 계신 하나님을 알면 그냥 됩니다. 우리를 그렇게 만드시는 분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당신이 저희 중심에 계셔서 감사합니다. 저희 속에서 당신을 향한 열정을 일으켜 주옵소서. 오늘 저희가 신나게 감사하고, 선포하고, 기뻐하고, 찬송하게 하옵소서.

<오늘의 성경읽기 신 4-6장>

2/22/2024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시 8:9)

시편기자의 이 찬양은 1절의 반복입니다. 하지만 내용적으로는 좀 다릅니다. 1절은 하늘과 땅과 거기 있는 자연을 보며 주님을 찬양합니다. 높고 푸른 하늘과 눈부신 해를 보며 주님이 얼마나 크신지를 느낍니다. 겨울을 지내고 파릇한 기운을 품는 작은 나무를 보며 주님의 섬세함을 느낍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통해 주님의 아름다우심을 봅니다. 하지만 이 시편의 마지막 구절은 인간을 보며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 자연 하나하나를 만드시면서 인간을 생각하셨다는 것을 알고 놀랍니다. 인간을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롭고 존귀하게 하셨다는 사실에 놀랍니다. 인간을 모든 자연 위에 두시고 당신과 함께 다스리게 하신 것이 놀랍습니다. 주님이 나자신을 이렇게 보고 계시는 것이 놀랍습니다. 주님이 다른 사람을 이렇게 취급하시는 것이 놀랍습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라고 찬양합니다. 요즘 조건을 따라 사람을 경시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가정이나 일터에서 무시당해본 적이 있습니까? 이것이 얼마나 큰 상처가 되는지요? 하지만 우리 자신은 다른 사람을 이렇게 경시하지 않는지요? 주님의 인간관을 깨닫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습니다. 물론 누구나 죄성과 연약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존중하신 것처럼 조금씩 더 존중하게 됩니다. 서로 존중하는 태도에서부터 가정이 살아납니다. 서로 존중하는 분위기의 교회와 일터가 아름답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주님의 인간관으로 자신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의 시선으로 자신을 존중해 보십시오. 그러면 자신을 함부로 취급하지 않게 됩니다. 자신에게 있는 것을 무책임하게 남용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이것을 주님의 선물로 알고 소중히 여깁니다. 이런 사람이 아름다운 인생이 됩니다. 물론 주님 나라가 완성되기 전까지는 부족한 것 투성이일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땅에서도 주님이 원래 의도하셨던 모습을 부분적으로나마 회복할 것입니다. 주님, 당신의 아름다운 이름을 찬양합니다. 저희를 이토록 존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도우셔서 저희도 사람을 이렇게 존중하게 해주십시오. 주님의 눈으로 저희 자신도 소중히 여기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신 1-3장>

2/21/2024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시 8:5-8)

자신을 대단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이 때때로 큰 힘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실 이것은 또한 위험한 함정도 됩니다. 반면에 자신을 지나치게 낮게 취급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늘 열등감과 자책으로 위축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언뜻보면 이것은 겸손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교만의 다른 얼굴입니다.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는 대개 교만과 열등감 사이를 수시로 오갑니다. 어떻게하면 우리가 건강한 자존감을 가질 수 있을까요? 이에대해 도움이 되는 여러 방법이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문제는 주님을 만날 때 근본적으로 해결됩니다. 주님이 우리를 당신의 목적과 계획을 가지고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정체성과 사명은 오직 주님께 있습니다. 여기 시편기자는 주님을 만난 뒤 깜짝 놀랍니다. 주님의 눈으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수준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어떤 번역에는 '천사보다'로 나오지만 원문은 '하나님보다'입니다.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존재가 될 수 있습니까? 아마 질적인 차이로 보면 도저히 이렇게 말할 수 없을겁니다. 우리는 단지 주님의 피조물일뿐입니다. 하지만 인간 이외의 다른 피조물과 비교하면 우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당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시고 다른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게 하신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대리인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영광스럽고 존귀하게 하시고 모든 만물을 우리 발 아래 두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주님을 거부하면서 주님이 세우신 이 질서가 뒤죽박죽이 된 것입니다.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면서 인간은 오히려 심각하게 타락하고맙니다. 인간의 눈은 어두워지고 결국 우리가 다스려야할 자연의 일부를 우상으로 섬깁니다. 시편기자는 인간이 이렇게 망가져 있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은 주님의 의도를 읽게 됩니다.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한 우리에게 주님의 의도는 계속됩니다. 주님을 만나기 바랍니다. 그러면 자신을 제대로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건강한 자존감의 근거가 됩니다. 주님, 당신을 알게 해주십시오. 그래서 저희 자신을 제대로 알게 해주십시오. 오늘 시편기자처럼 찬양하게 하시고 당신의 의도에 맞게 살게 하옵소서.

<오늘의 성경읽기 민 34-36장>

2/20/2024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시 8:3-4)

거듭 놀라는 때가 있습니다. 한번 놀라고 또 놀라는겁니다. 여기 시편기자는 하늘과 거기 있는 달과 별들을 보며 놀랐습니다. 이것을 만드신 주님의 솜씨와 위대함에 놀란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또 놀랍니다. 바로 그 하늘의 달과 별들이 우리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것을 알고 또 놀랍니다. 사실 어찌보면 인간은 거대한 자연에 비해 너무 미미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시편기자는 주님이 온 우주를 인간을 생각하시면서 만드신 것을 깨닫고 놀랍니다. 하나님은 빛을 만드시면서 인간을 생각하신 것입니다. 하늘, 땅, 바다, 온갖 식물과 동물을 인간을 위해 만드신겁니다. 이것을 알면 우리는 시편기자처럼 고백하게 됩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이것이 시편기자의 인간관입니다. 인간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물론 지금 인간은 죄로 망가져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주님이 처음 의도하신 모습과는 너무 달라져 있습니다. 하지만 또다른 면도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인간을 이토록 생각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인간을 여전히 자연 위에 두고 존중하십니다. 우리 인간을 향한 주님의 사랑과 관심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주변에 너무 못마땅하게 보이는 인간이 있습니까? 주님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우리 자신이 너무 초라하고 연약해 보일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주님, 연약하고 흠 많은 저희를 생각하시고 존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의 은혜로 저희가 씩씩하게 다시 일어서게 해주십시오. 아울러 당신의 마음으로 다른 연약한 사람을 존중하고 살피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민 31-33장>

2/19/2024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시 8:1-2)

부모가 꼭 필요한 시기에 부모를 등지는 자녀가 있습니다.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겨 그 눈에 부모가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의 역할이 절실할 때 오히려 교회를 떠나 숨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 어떻게 살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에 대해 눈감고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는 증거를 보지 못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이 주신 혜택을 누리면서도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러다가 어느날 눈이 열려 하나님이 보이기 시작하면 어떻게 됩니까? 여기 시편기자의 찬양을 보십시오. 그는 온 땅에 주의 이름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봅니다. 그는 하늘을 덮고 있는 주의 영광을 봅니다. 그는 하늘과 땅에 있는 자연을 통해 창조주의 위대함을 봅니다. 물론 자연 자체가 하나님은 아닙니다. 그는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손길을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눈에 들어오면 "아름답다"고 감탄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은 비단 자연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손길은 사람들에게도 나타납니다. 여기서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은 귀여움보다는 연약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시편기자는 연약한 아이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권능을 보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약한 자에게도 하나님의 권능이 담겨 있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대적은 잠잠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어디 있어?"라고 외치는 사람의 입이 닫힙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던 사람이 꼼짝 못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 있는 아무리 미미한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품고 있습니다. 그것조차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대적을 무릎꿇리는 권능이 있습니다. 이것이 보이면 시편기자처럼 찬양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 오늘 저희 눈을 열어 주십시오. 땅과 하늘과 사람들에게 담긴 당신의 영광을 보게 해주십시오. 오늘 당신의 아름다움과 권능을 찬양하게 하옵소서.

<오늘의 성경읽기 민 28-30장>

2/17/2024

"내가 여호와께 그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존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 (시 7:17)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입니다. 누가 이런 사람을 말리겠습니까? 무엇이 그를 막겠습니까? 지금 다윗은 애매한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가 겪는 고통은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악한 의도를 가진 자들의 중상모략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지금 대적이 사자같이 그를 찢고 뜯으려고 덤비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오히려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송으로 이 시편을 마칩니다. 주변 환경만 보면 그는 결코 그렇게 하지 못했을겁니다. 또한 자신의 처지와 연약함을 보더라도 쉽게 그러지 못했을겁니다. 하지만 그런 중에 그의 눈에는 하나님의 손길이 보였습니다. 그의 감사와 찬송은 하나님에 대한 확신에서 나온 것입니다.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의 의때문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지존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그에게 하나님은 미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그 성품에 있어서 흔들림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변함없이 공의를 행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악은 반드시 처리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애매히 어려움 겪는 사람을 반드시 지키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겪는 어려움이 꼭 불행만은 아닙니다. 더우기 애매한 고난이라도 꼭 비극만은 아닙니다. 지존하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의 의는 지금도 살아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도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감사와 찬양도 멈출 수 없습니다. 하나님, 지존하신 당신을 찬양합니다. 당신의 미쁘심 감사합니다. 오늘 저희 형편에 상관없이 감사 찬양하며 살게 하옵소서.

<오늘의 성경읽기 민 22-24장>

2/16/2024

"악인이 죄악을 낳음이여 재앙을 배어 거짓을 낳았도다 그가 웅덩이를 파 만듦이여 제가 만든 함정에 빠졌도다 그의 재앙은 자기 머리로 돌아가고 그의 포악은 자기 정수리에 내리리로다" (시 7:14-16)

최후의 심판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회개하지 않은 악인에게 심판이 머물러 있습니다. 지금 그 심판의 핵심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삶입니다. 그에게서 나오는 것은 죄악입니다. 그가 하는 모든 것이 공허한 거짓으로 끝납니다. 다른 사람을 해하려고 판 함정에 자신이 빠집니다. 그의 재앙과 포악이 도로 자신의 머리에 쏟아집니다. 그는 머리가 비상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는 강하고 힘있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는 많은 것을 가진 성공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삶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단절입니다. 그가 아무리 애쓰고 수고하더라도 결국 남는 것은 나쁜 열매입니다. 그의 삶은 한마디로 '바람에 나는 겨'일 뿐입니다. 따라서 이런 사람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울러 이런 사람의 위협에 기죽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때문에 겪는 어려움에 너무 좌절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의 본질과 운명이 무엇인지 훤히 알기 때문입니다. 원래 하나님이 의도하신 삶과 비교하면 너무 어긋난 인생일 뿐입니다. 그 겉모습이 어떠하든지 사실은 망가지고 허무한 인생입니다. 심지어 속히 회개가 필요한 불쌍하고 안타까운 인생입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우리에게 하나님과의 교제가 열려 있다면 이 얼마나 큰 복입니까? 이것은 우리가 아무리 연약하고, 궁핍하고, 어려워도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의도하신 의와 평강과 사랑의 열매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오늘 하나님과 교제하며 동행하는 하루 되기 바랍니다. 하나님, 회개하지 않는 악인을 부러워 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게 하옵소서. 비록 그로부터 당하는 심한 어려움 중에도 낙담하거나 위축되지 않게 하옵소서. 오늘 당신과의 교제를 통해 의와 평강과 사랑을 맛보게 하옵소서.

<오늘의 성경읽기 민 19-21장>

2/14/2024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핀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시 7:10-11)

'눈뜨고 코 베어 가는 세상'이란 말이 있습니다. 눈을 뜨고 있어도 코 베어 갈 만큼 인심이 사납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매순간 정신 바짝 차리고 살라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만만치 않습니다. 더우기 세상을 움직이는 거대한 영적 어두움의 세력이 있습니다. 이 세력은 호시탐탐 우리를 노립니다. 그러다가 순식간에 우리의 빈틈을 파고듭니다. 그것에 한번 장악되면 우리는 쉽게 쓰러지고 맙니다. 이렇게 적들로 가득한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이 시편에 나오는 다윗의 선포를 주목해 보십시오. 여기 의외로 단순한 두가지 원리가 나옵니다. 먼저, 하나님이 적들을 처리하시도록 맡기십시오.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십니다. 적들의 악행에 대해 그냥 넘어가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것에 반드시 분노하십니다. 그것도 '매일' 그렇게 하십니다. 우리는 쉽게 지쳐서 포기할 수 있어도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악에 대해서 예외없이 철저히 다루십니다. 두번째 원리는 우리가 해야할 것입니다. 바로 정직하게 행하라는 것입니다. 보통 '정직'이란 거짓이 없고 진실한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정직한 사람이 얼마나 귀합니까? 하지만 여기서 '정직'은 좀더 근본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바로 '정직'은 하나님 한분만 섬기는 것입니다. 다른 신을 두지 않습니다. 이중적이지 않는 마음입니다. 한마음으로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스'하시는 것에 '예스'하고, '노'하시는 것에는 '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연히 거짓을 멀리하고 진실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확신한 것처럼 하나님은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의 방패가 되십니다. 이 두가지 원리로 이 하루를 살아보십시오. 하나님, 당신은 오늘도 악에 대해 분노하시는 분이십니다. 모든 악한 자를 당신 손으로 처리해 주십시오. 오늘 저희는 당신 앞에서 정직하게 행하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민 13-15장>

2/13/2024

"여호와께서 만민에게 심판을 행하시오니 여호와여 나의 의와 나의 성실함을 따라 나를 심판하소서 악인의 악을 끊고 의인을 세우소서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과 양심을 감찰하시나이다" (시 7:8-9)

보통사람에게 법원은 왠지 무서운 곳입니다. 혹 법원에서 날아온 출두 통보를 본다면 얼마나 두려울까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법정은 어떻겠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단지 일부만이 그것을 압니다. 사실 하나님의 심판만큼 무서운게 있을까요? 그런데 여기 다윗의 기도에 놀라운 점이 있습니다. 바로 그가 지금 하나님의 심판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일까요? 물론 이 요청은 자신에게 닥친 다급한 상황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에게는 두가지 확신이 있었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악인에게 진노하신다는 확신입니다. 여기서 악인은 일차적으로 다윗의 대적입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시면 그들의 압박이 끊어질 것입니다. 나아가 악인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악을 행하는 모두입니다. 악인에게 하나님의 심판은 무서운 것이 될겁니다. 미래 어느날 최종적인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도 악인의 머리 위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의인을 구원하신다는 확신입니다. 여기서 의인은 다윗 자신입니다. 그런데 과연 누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의인으로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 다윗을 포함해서 그 누구도 그렇게 하지 못할겁니다. 다들 하나님 앞에서 여전히 죄많고 연약한 사람일 뿐입니다. 하지만 다윗이 자신을 의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당신의 백성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모시고 성실하고 바르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다윗에게 하나님의 심판은 변호에 가까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그에게서 그 중심의 성실함을 드러낼 것입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시면 의인은 오히려 우뚝 서게 됩니다. 지금 예수님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중심으로 성실하게 살고있습니까? 그렇다면 다윗같은 확신을 갖게 됩니다. 애매한 어려움을 겪을 때 하나님의 심판을 간청할 것입니다. 하나님, 당신은 악인에게 진노하실 것입니다. 의인을 반드시 구원하시며 세우실 것입니다. 오늘 당신 앞에서 전심으로 성실하게 살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민 10-12장>

2/12/2024

"여호와여 진노로 일어나사 내 대적들의 노를 막으시며 나를 위하여 깨소서 주께서 심판을 명령하셨나이다 민족들의 모임이 주를 두르게 하시고 그 위 높은 자리에 돌아오소서" (시 7:6-7)

가끔 뉴스에 911에 녹음된 음성이 그대로 공개됩니다. 그 다급한 목소리가 얼마나 자극적인지요. 목소리만 들어도 그 상황이 절절히 느껴집니다. 이런 일은 가까이에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철렁하는 아이들의 다급한 목소리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긴급하게 누군가에게 어떤 도움을 구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절박함으로 하나님을 찾을 상황도 생깁니다. 여기 보면 다윗도 이렇게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이제 살기등등한 대적들이 곧 그에게 들이닥칠 것입니다. 이때 그는 '하나님, 살려주세요'하며 매달립니다. 여기서 그는 "여호와여 ... 일어나사 ... 깨소서"라고 합니다. 마치 주무시고 계시는 하나님을 깨우듯이 외칩니다. 아무 반응이 안보이면 그는 더 크게 하나님을 부를겁니다. 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은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너무 일이 많아서 우리가 겪는 일을 챙기지 못하시는 것은 아닙 9-10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가 알려드리기 전까지 우리 사정을 모르시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서 드는 질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이 먼저 알아서 처리하지 않으실까요? 왜 우리가 이렇게 다급하게 하나님을 찾게 하실까요?' 물론 그 이유를 다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여기 다윗의 경우를 보면 이 다급한 호소에 중요한 사실이 담겨 있습니다. 바로 이럴 때 다윗이 누구를 찾고 있는가입니다. 또한 그분이 어떤 분이신가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을 해하려는 세력들에게 진노하실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은 공의로 옳고 그른 것을 심판하실 분입니다. 대적을 혼내시고 자신을 이 다급한 상황에서 건져주실 하나님입니다. 급할 때 누구를 찾는지를 보면 그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평소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는지가 드러납니다. 우리에게 이렇게 다급한 상황은 믿음이 연마되는 기회가 됩니다. 하나님께는 이것이 우리를 즉각 건져주시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관심입니다. 하나님, 오늘 매순간 당신을 찾게 해주십시오. 혹 급한 일이 생겨도 당신을 찾게 해주십시오. 있는 모습 이대로 지금도 당신께 나아갑니다.

<오늘의 성경읽기 민 7-9장>

2/10/2024

"여호와여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런 일을 행하였거나 내 손에 죄악이 있거나 화친한 자를 악으로 갚았거나 내 대적에게서 까닭 없이 빼앗았거든 원수가 나의 영혼을 쫓아 잡아 내 생명을 땅에 짓밟게 하고 내 영광을 먼지 속에 살게 하소서" (시 7:3-5)

자기 잘못으로 하는 고생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 잘못없이 괴로움을 겪는 일도 생깁니다. 이런 것이 '애매한 고난'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불공정한(unfair) 일입니다. 그러나 불의한 세상에서 살다보면 삶의 일부가 됩니다. 당시 다윗도 애매한 고난을 받고 있습니다. 그는 사람들로부터 억울한 중상모략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냥 어려움을 겪는 것보다 훨씬더 비통하고 괴롭습니다. 중상모략으로 자신을 짓밟는 사람들이 얼마나 미울까요? 이런 일을 당하고 있는 자신이 얼마나 처량할까요? 이 일로 임박한 위험이 얼마나 두려울까요? 아마 복잡한 생각과 감정으로 거의 폐인처럼 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이렇게 애매한 고난으로 아프고 힘들 때는 어떻게 해야합니까? 지금 이런 일을 겪고 있는 다윗은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먼저, 그는 "여호와여 내 하나님이여"라고 외쳐 부릅니다. 그에게는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찾아가 호소할 분이 있습니다. 바로 여호와이신 '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옳고 그름을 정확하게 구분해서 처리하실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애매히 고난받는 사람을 받아주시고 지켜주실 것입니다. 둘째로, 다윗은 여기서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는 만일 자신에게 잘못이 있다면 "원수가 나의 영혼을 쫓아 잡아 내 생명을 땅에 짓밟게 하고 내 영광을 먼지 속에 살게 하소서"라고 간청합니다. 한마디로 자기 잘못이라면 원수에게 잡혀 죽어도 괜찮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만일 다윗처럼 결백하다면 우리의 호소도 이렇게 강력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아무 죄없이 완전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사람들이 모함하는 면에서는 잘못이 없다는겁니다. 이정도로 사는 사람들만 있어도 주변은 훨씬 건강하고 바르게 될 것입니다. 어찌보면 애매한 괴로움만큼 힘빠지는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조차 당당히 설 수 있는 근거가 있습니다. 바로 공의로우신 하나님께 호소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이 결백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당신 앞에서 바르게 행하게 해주십시오. 애매한 괴로움에도 위축되지 않게 해주십시오. 오늘 당신의 공의를 의지하여 당당히 서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민 1-3장>

2/9/2024

"여호와여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쫓아오는 모든 자들에게서 나를 구원하여 내소서 건져낼 자가 없으면 그들이 사자 같이 나를 찢고 뜯을까 하나이다" (시 7:1-2)

'사면초가'란 사방이 적에게 둘러싸여 고립된 상황을 말합니다. 까다로운 문제에 빠져 있을 때가 이것입니다. 어디서도 시원한 해결책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게 됩니다. 팔다리에는 힘이 없고 마음은 걱정으로 가득합니다. 우리에게 이런 '사면초가'의 상황이 심심찮게 일어납니다. 그러다가 가끔은 최악의 상황도 맞습니다. 하지만 이게 끝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든든한 피난처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 다윗의 상황이야말로 바로 사면초가입니다. 그는 지금 사울왕의 군대에게 쫓기고 있습니다. 다윗에게 생애의 많은 부분은 이렇게 혹독하고 힘든 세월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가 지나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이처럼 보석같은 시편이 쏟아져 나옵니다. 이런 시는 칠흑같은 어두움 속에서 빛나는 별처럼 소중합니다. 다윗의 상황은 "건져낼 자가 없으면 그들이 사자같이 나를 찢고 뜯을까 하나이다"라는 탄원에 잘 나타납니다. 하지만 이 다급한 호소에 놀라운 비밀이 담겨있습니다. 그것은 다윗은 이미 피난처를 찾았다는 사실입니다. 그 피난처는 산꼭대기나 토굴이나 바위틈같은 곳이 아닙니다. 그가 이미 찾은 피난처는 다름아닌 하나님의 품입니다. 그래서 그는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쫓아오는 모든 자들에게서 나를 구원하여 내소서"라고 간구합니다. 지금 다윗은 이미 하나님께 몸을 피한채 자기를 쫓는 군대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사자처럼 덤벼드는 대적을 하나님 품에서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마치 재빨리 달려와 엄마 품에 안긴 아이가 멍멍이가 쫓아온다고 소리지르는 것같습니다. 미리 하나님의 품에 안겨서 이 하루를 시작하십시오. 하나님께 피하여 문제와 압박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 당신은 어떤 문제와 압박보다 크십니다. 지금 당신께 피합니다. 둘러싼 온갖 문제와 압박으로부터 오늘 저희를 지켜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레 25-27장>

2/8/2024

"악을 행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울음 소리를 들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내 모든 원수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갑자기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 (시 6:8-10)

지옥과 천당을 오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마치 롤러코스트를 탄 경험같은 것입니다. 끝모르고 추락하다가 하늘을 날아오른다고 상상해보십시오. 지옥같은 시간이 지나고 천국같은 시간이 몰려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칠흑같은 어두움을 뚫고 붉은 태양이 떠오르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대반전의 감동은 이것을 맛본 사람만 압니다. 하나님 믿는 삶에 이런 대반전이 있습니다. 이것은 여기 다윗의 경험이기도 합니다. 조금전까지 그는 너무 슬프고, 두렵고,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그가 말할 수 없이 놀라운 확신을 가집니다. 지옥같은 어둠 속에서도 다윗처럼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그러면 다윗처럼 최소 두가지 확신을 갖게 될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이 내편'이라는 확신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어느 순간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를 들으시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이 내 마음을 아신다면 게임은 끝나게 됩니다. 하나님이 내 탄식의 간구를 들으신다면 더이상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다윗에게 이 순간은 모든 죄와 징계로부터의 자유였습니다. 바로 용서와 회복의 순간인 것입니다. 이제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는 것같은 고통에서 벗어납니다. 나아가 '내편이신 하나님'과 늘 함께 서있는 것입니다. 또다른 확신도 있습니다. 바로 '이겼다'는 확신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내편'인 사람에게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는 그동안 자신을 짓누르던 압박에서 비로소 벗어납니다. 그 압박이 죄책감이든, 상처든, 고통이든, 두려움이든, 그렇게 강하던 것들이 다 힘을 잃고맙니다. 따라서 그는 이제 더이상 그것들 아래서 노예처럼 끌려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악을 행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 내 모든 원수들이 ... 갑자기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 지금 '하나님이 내편'인 것을 확신합니까? 모든 압박으로부터의 승리를 확신합니까? 이 확신이야말로 우리가 이 땅에서 누리는 천국입니다. 곧, 하나님 의지하는 사람만이 맛보는 믿음의 비밀입니다. 하나님, 지금 당신께 나아갑니다. 저희에게 '당신이 내편'이시라는 확신을 주옵소서. 저희를 괴롭히는 모든 것에 대한 승리를 확신하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레 22-24장>

2/7/2024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내 눈이 근심으로 말미암아 쇠하며 내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두워졌나이다" (시 6:6-7)

문학적 기법 중에 과장법이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것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됩니다. 예를 들면, 너무 기뻐하는 사람을 '입이 귀에 걸렸다'고 표현합니다. 성경에도 과장법이 사용된 것을 아십니까? 여기 다윗은 자신의 상태를 과장법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내 눈이 ...어두워졌나이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우울하고, 두렵고, 힘든지를 이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이것을 읽는 사람이 이에 대해 공감하지 못한다면 그는 거짓말장이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를 통해 다윗의 고통을 진하게 공감하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도 이와 비슷한 어려움을 겪기 때문입니다. 너무 힘들어 한숨 지으며, 눈물을 흘리며, 쓰린 마음으로 밤을 보내는 때가 있습니다. 이런 고통이 자신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생긴 징계 차원의 것이라면 심한 자책감과 후회까지 있을겁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조차 단절된 느낌을 가진다면 어떻겠습니까? 그뿐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약점을 파고들어 강력하게 공격해오는 대적이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 되면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거의 너덜너덜해집니다. 다윗이 여기서 사용한 "탄식", "피곤", "눈물", "근심", 등이 이 상태를 잘 표현해줍니다. 아마 너무나 우울하고 지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일겁니다. 만일 여기서 다시 일어선다면 그것은 결코 우리의 의지나 힘때문이 아닐겁니다. 신약에 나오는 "심령이 가난"한 상태가 바로 이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놀라운 반전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아무 의지할 것이 없을 때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우리의 처지가 비참한 만큼 간절히 하나님을 구하게 됩니다. 그래서 심령이 가난한 사람에게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천국입니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라고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도움이 되십니다. 세상에는 죄짓고도 아무 일없는 것처럼 잘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최악의 저주입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모른채 하나님의 진노를 받습니다. 반면에 죄짓고 다윗처럼 고통하는 사람은 훨씬 다행입니다. 그에게는 회개와 믿음의 기회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이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 나아갈 기회입니다. 하나님, 당신 앞에 깨어 늘 바르게 살게 해주십시오. 하지만 저희가 죄지으면 저희를 엄하게 책망하시고 징계해 주십시오. 저희가 고통 중에라도 죄를 버리고 당신을 찾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레 19-21장>

2/6/2024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하는 일이 없사오니 스올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시 6:5)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에게도 여러 고통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고통은 무엇일까요? 아마 하나님과 단절되는 느낌일겁니다. 다른 고통이 결코 가볍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된 느낌은 다른 고통과 차원이 다릅니다. 심각한 고통 중에도 하나님과의 열린 교제는 오히려 기쁨과 용기와 소망이 됩니다. 반면에 무거운 고통을 겪는 중에 하나님과 단절되는 느낌은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이 됩니다. 다윗도 이 단절의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지금 그는 죽을 것같은 고통 속에 있습니다. 그가 언급한 '스올'은 대개 죽음과 같은 개념입니다. 당시 죽음에 대한 이해는 신약시대만큼 발전되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당시에도 부활에 대한 개념이 있었습니다. 또한 지옥을 연상케 하는 개념도 가끔 등장합니다. 하지만 죽음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는 단절입니다. 따라서 죽으면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스올에서는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못할 것입니다. 이렇게 다윗은 죽으면 하나님과 단절된다는 개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죽음에 대한 이런 이해를 근거로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이대로 죽지 않도록, 스올에 들어가지 않도록 간구합니다. 만일 지금 다윗이 받고 있는 징계가 육체적인 중병이라면 낫게 해달라고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살아나야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할 것입니다. 살아 있어야 성소에서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윗의 간절함은 죽을 것같은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고 계속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사망이든 그 어떤 것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단절하지 못하는 것을 확신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깊고 생생한 교제를 위해 다윗의 간절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기 바랍니다. 하나님, 당신의 블변하는 사랑 감사합니다. 당신과의 교제를 방해하는 것을 제거해 주십시오. 오늘 당신과 살아있는 교제를 누리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레 16-18장>

2/5/2024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사랑으로 날 구원하소서" (시 6:4)

어려운 부탁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성격상 내키지 않아도 이것을 해야할 때가 있습니다. 보통 어떤 부탁을 할 때 아무에게나 무작정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형태로든 근거를 가지고 부탁합니다. 그 사람과의 관계나 그의 능력같은 것이 그것입니다. 하나님께 부탁드릴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날 구원하소서"라고 간청합니다. 여기서 한가지 주목할 점이 있습니다. 바로 다윗이 하나님께 부탁하는 근거입니다. 그것은 "주의 사랑으로"입니다. 여기서 사랑은 히브리어로 '헤세드'입니다. 자주 '인자'로도 번역된 이것은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말합니다. 다윗은 지금 어떤 상태입니까? 뭔가 하나님께 범죄한 부끄러운 죄인임에 틀림없습니다. 따라서 어떤 혹독한 징계를 받으며 어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지금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뼈저리게 경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의 또다른 성품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는 지난 세월 하나님이 보여오신 사랑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 사랑은 자신이 저지른 범죄를 용서하실만한 것입니다. 이 사랑은 자신이 겪는 징계의 고통에서 구원하실만큼 큽니다. 다윗에게 하나님은 거룩하시면서 동시에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의 거룩과 사랑의 클라이막스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그곳에 하나님의 심판과 용서가 함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당신의 성품에 어긋나게 행하시지 않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성품을 의지해서 구하는 기도는 강력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공의를 의지해서 기도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징계받는 중에도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하게 합니다. 오늘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해서 하나님께 구할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당신의 사랑으로 저희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당신의 사랑으로 저희 연약함을 붙들어 주십시오. 오늘 당신의 사랑으로 저희 고통과 문제를 살펴 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레 14-15장>

2/3/2024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나의 영혼도 매우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시 6:2-3)

세상은 하나님을 우습게 여깁니다. 이것은 이미 예상되던 바입니다. 하지만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지만 정성이 없습니다. 말씀을 듣지만 형식적입니다. 기도하지만 횡설수설합니다.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는 경우가 또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쉽게 거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시는 것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쉽게 합니다. 대개 뜨거운 맛을 보기 전에는 계속 그렇게 삽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하나님의 진노를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의 책망과 징계가 생생하게 다가옵니다. 이것을 제대로 알면 누구도 버티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견디지 못합니다. 여기 다윗의 탄식과 호소를 보십시오. 여기서 그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믿는 사람으로서 하나님께 뭔가 잘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는 결국 하나님께로부터 무서운 징계를 받고 있습니다. 그는 그 징계가 무엇인지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징계가 얼마나 무거운지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이 징계로 인해 몸이 수척해져 있습니다. 두려움으로 그의 뼈가 떨립니다. 뼈뿐만 아니라 그의 영혼도 떨립니다. 이것은 죄의 댓가를 치르는 사람의 정상적인 모습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한가지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다윗이 이 고통 중에 하나님을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로 인해 받는 징계이지만 그 고통을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그는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라고 간청합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나를 고치소서"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치유의 손길을 기다립니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라는 것은 지금 고통이 얼마나 심한지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 기간을 줄여달라는 탄원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되기전에 하나님을 두려워 하십시오. 하지만 죄때문에 징계당하는 중에라도 또 하나님께 호소하십시오. 하나님, 저희가 당신을 우습게 여기지 않게 해주십시오. 당신께 진노의 징계를 받지 않도록 항상 깨어있게 해주십시오. 혹 저희 잘못으로 징계의 고통 중에 있더라도 당신께 나아가기를 잊지 않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레 8-10장>

2/2/2024

"여호와여 주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오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시 6:1)

아무 잘못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사실 우리는 수시로 잘못을 저지릅니다. 하지만 대개는 잘못을 가볍게 지나칩니다. 우리는 자신의 잘못을 쉽게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의 잘못에 비해 자신의 잘못에 대해 비교적 관대한 편입니다. 나아가 핑계거리를 찾아내어 자신의 잘못을 정당화하는데 익숙합니다. 결국 이때문에 회개로 자신의 잘못을 아뢰는 일이 드물어집니다. 최근에 하나님께 죄를 자백하며 용서를 구해본 적 있습니까? 죄때문에 애통하며 울어본 적 있습니까? 요즘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것 하나가 있다면 바로 회개입니다. 죄의 심각성을 덜 느끼는 사람은 회개하기 어렵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얼마나 미워하시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이 짓는 죄가 하나님께 얼마나 큰 상처일까요? 하지만 그런 중에도 하나님의 책망과 징계가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에서 나온 징계가 얼마나 두렵습니까? 이것은 시편기자로 보이는 다윗의 경험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진노로 그의 죄를 징계하실 것입니다. 어릴적 잘못을 저지르고 화나신 아버지 앞에 서있었던 일을 회상해 보십시오. 아버지는 잘못한 나에게 분노의 회초리를 댈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두려운 순간입니까?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그 분노로 징계의 채찍을 내리치실 것입니다. 다윗의 두려움은 "나를 책망하지 마시오며 ...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라는 간청에 잘 담겨있습니다. 하지만 징계에 대한 두려움은 뒤집어보면 은혜이기도 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제대로 드러나고 있기때문입니다. 자신이 지은 죄의 심각함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 복입니다. 우리를 향한 징계의 매가 매서운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입니다. 이런 혹독한 징계를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변하게 됩니다. 오늘 하나님의 거룩하심으로 자신을 비추어 보십시오. 하나님, 당신의 거룩하심 앞에 서 있습니다. 저희에게 있는 죄를 다 드러내 주십시오. 오늘 당신께 다 자백하고 용서받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레 5-7장>

2/1/2024

"그러나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 같이 은혜로 그를 호위하시리이다" (시 5:11-12)

지기도 이기기도 하는 것이 스포츠의 재미입니다. 지면 이를 갈고 다음을 기다립니다. 이기면 통쾌한 맛을 즐깁니다. 하지만 지면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지는 것이 너무 치명적이기 때문입니다. 가령 전쟁같은 것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절대 지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결국 이기는 것입니다. 물론 거의 질 것같은 위기도 있습니다. 처절한 싸움에 심각한 고통을 겪기도 합니다. 하지만 마지막에는 반드시 이깁니다. 바로 하나님 의지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미 이긴 싸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시편기자의 경우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는 불의로 인해 심한 피해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힘과 지혜로 이 싸움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싸움이 하나님의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가 이 싸움을 들고 하나님께 나아간 이유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 10절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이여 그들을 정죄하사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고 그 많은 허물로 말미암아 그들을 쫓아내소서 그들이 주를 배역함이니이다." 자신이 겪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불의로 자신을 괴롭히는 자들은 하나님의 대적입니다. 반면에 그는 자신을 '주께 피하는 자',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 '의인'으로 이해합니다. 곧, 하나님의 보호가 당연히 기대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은혜로 책임지시는 사람인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최종적이고 영원한 승리의 기쁨이 있습니다. 물론 아직 그 순간이 완전히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믿음으로 승리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여기 "보호"나 "방패"같은 표현은 여전히 적의 공격이 완전히 제거되지 않았음을 암시합니다. 따라서 만일 하나님 품에서 벗어난다면 적의 공격에 무방비로 당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한 안전합니다. 불의의 공격이 있는 전장에서 이기는 법은 이렇게 분명합니다. 시편기자의 경험에서부터 오늘 우리의 삶에 이르기까지 오직 원리는 한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반드시 이깁니다. 그 반대로 하나님을 거역하면 확실히 집니다. 오늘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나님, 지금 당신을 의지합니다. 은혜로 저희를 지켜주옵소서. 오늘 당신이 주시는 승리와 기쁨을 누리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레 1-4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