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0/2024
"사람의 행사로 논하면 나는 주의 입술의 말씀을 좇아 스스로 삼가서 강포한 자의 길에 행치 아니하였사오며 나의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키고 실족지 아니하였나이다" (시편 17:4-5)
마음 내키는대로 하면서 살면 어떨까요? 언뜻보면 이것이 참 자유로울 것같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틀림없이 좋지 못할겁니다. 우리의 본성이 그렇게 건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사는 세상이 호락호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가만히 내버려두면 결국 죄를 향해 달려갈겁니다. 잠시 주저하겠지만 나중에는 죄에 푹 빠져 있을겁니다. 이것은 그동안의 경험이 잘 말해줍니다. 그래서 의지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의지가 건강하게 구사되어야 합니다. 이 의지가 마음대로 사는 것을 막아줍니다. 이 의지가 세상에 떠밀려 가는 것도 멈춥니다. 이 의지가 하기 싫은 것도 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 의지가 우리가 해야할 것을 하게 합니다. 이렇게 바른 의지가 바른 행동이 됩니다. 그리고 바른 행동이 쌓이면 바른 성품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의지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의 의지에는 적절한 도움과 지도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의지를 잘 끌어줄 만한 것이 무엇일까요? 시편기자에게 그것은 바로 주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는 "주의 입술의 말씀을 좇아 스스로 삼가서 강포한 자의 길에 행치 아니하였사오며 나의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키고 실족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을 좇아 불의를 거절했습니다. 또한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주의 길을 지켰습니다. 바르게 살고 싶습니까? 무엇보다 먼저 주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십시오. 말씀을 읽고 배우고 묵상하십시오. 말씀이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말씀이 하라고 하는 것은 하십시오. 이렇게 말씀을 좇는 것이 곧 바른 삶입니다. 주님, 저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오늘 저희가 거절해야 할 것을 거절하게 해주십시오. 오늘 저희가 해야할 것을 꼭 하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왕하 23-25장>
4/29/2024
"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시고 밤에 나를 권고하시며 나를 감찰하셨으나 흠을 찾지 못하셨으니 내가 결심하고 입으로 범죄치 아니하리이다" (시편 17:3)
당당한 사람이 있습니다. 뭔가 물질이나 실력이나 힘 같은 것이 있으면 당당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과 상관없이 당당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잘못한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물론 그가 완전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언제나 흠없는 모습을 유지하는 사람입니다. 잘못이 없는 사람은 누구 앞에서도 당당합니다. 잘난 척 할 필요는 없지만 주눅들 필요도 없습니다. 떠들석하지 않고 겸손하게 당당합니다. 이런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설사 위기와 어려움이 닥쳐도 그 중심은 견고합니다. 강하고 잘 난 사람들 사이에서도 위축되지 않습니다.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주변환경에도 치우치지 않습니다. 여기 다윗은 생명의 위협 속에서도 당당합니다. 바로 잘못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잘못한 것이 없는 사람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실겁니다. 의인이 악인에게 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맞지 않습니다. 물론 큰 고난과 시련이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패배하지 않습니다. 악의 세력이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일 수는 있었지만 영원히 그렇게 끝나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흠없는 상태를 계속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이것은 하루 이틀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랜 세월 잘 연마되어야할 문제입니다. 잘못을 거절하고 바른 것을 선택하는 순간이 쌓이고 쌓여서 되는 것입니다. 이 결단이 행동이 되고, 이 행동이 결국 인격이 되는 것입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매일 주님이 그 마음을 시험하시고 성찰하시고 살펴보시는 검정의 과정을 거칩니다. 이것은 자기 성찰이나 반성 정도가 아닙니다. 주님의 불꽃같은 눈과 말씀의 높고 예리한 기준을 통과하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잘못이 조금이라도 드러나면 즉각 회개하고 돌이키는겁니다. 이것이 흠없이 사는 비결입니다. 마치 매일 샤워를 통해 청결하게 사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내일로 미룰 문제가 아닙니다. 여건이 좋아질 때까지 기다릴 문제도 아닙니다. 바로 '지금 여기서' 해야할 문제입니다. 하나님, 지금 저희 속을 살펴주십시오. 혹 잘못된 것이 있으면 회개하게 하옵소서. 오늘 이 하루 악을 거절하고 의를 따르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왕하 19-22장>
4/27/2024
"여호와여 정직함을 들으소서 나의 부르짖음에 주의하소서 거짓되지 않은 입술에서 나오는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소서 나의 판단을 주 앞에서 내시며 주의 눈은 공평함을 살피소서"(시 17:1-2)
세상에 '엄마'만큼 신비한 것이 있을까요? 이 말 속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이 담겨있습니다. 그중에 한가지가 '당당함'입니다. 우리가 '엄마' 하고 부를 때 신기하게도 당당합니다. 어떤 근거로 우리는 이렇게 당당할까요? 무슨 논리적인 근거보다는 거의 본능적으로 당당합니다. 그저 내 '엄마'니까 이렇게 당당하게 부르는 것입니다. 내 '엄마'니까 밤이고 낮이고 찾습니다. 내 '엄마'니까 격식도 안따집니다. '엄마'니까 뭐든지 부탁합니다. 그리고 '엄마'만큼은 늘 내편이라고 믿습니다. 우리에게 '엄마'는 이런 존재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이야말로 완전하게 이런 분입니다. '하나님' 하고 찾을 때 우리는 이렇게 당당합니다. 바로 우리 '하나님'이니까 그런겁니다. 여기 시편기자도 여호와 하나님을 이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그가 세 번씩이나 기도를 들어달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아주 다급한 상황인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 시편기자가 다윗이라면 사울에게 쫓기면서 매우 위험한 처지에 몰린 것으로 보입니다. 그때 다윗은 바로 하나님을 찾고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기도를 들어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는 자신의 "정직함", "거짓되지 않은 입술", "판단", "공평"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여기서 "나의 판단"은 자신의 정당성을 말합니다. 어찌보면 자신이 이러니까 자기 부르짖음을 들어달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이렇게 옳으니까 구해달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가 아무 흠없는 사람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는 평소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 정당성에 부끄러움이 없었습니다. 이 정당성을 통해 그가 결국 주장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이런 정당성은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에서만 나옵니다. 하나님은 바로 내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여기에 뭐가 더 필요합니까? 이것이 그가 '엄마'를 부르듯 '하나님'을 부르고 있는 근거입니다. 내 '하나님'이니까 이렇게 다급할 때 찾습니다. 내 '하나님'이니까 기도하면 들으셔야 합니다. 내 '하나님'이니까 꼭 살려주셔야 합니다. 또한 내 '하나님'이니까 결국 내 손을 들어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그냥 내 '하나님'입니다. '엄마' 하고 부르듯 '하나님'을 불러 보십시오. 하나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제 기도를 들어주십시오. 제 손을 들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왕하 13-15장>
4/26/2024
"주께서 내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시 16:11)
산다는 것이 뭘까요? 이에 대한 적절한 표현 하나가 있습니다. 바로 '길을 가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길이 있고 우리는 그 길을 갑니다. 그 길은 좁아지기도 넓어지기도 합니다. 울퉁불퉁하기도 평탄하기도 합니다. 가파른 오르막일 때도 아찔한 내리막일 때도 있습니다. 그 길에는 힘든 일도 유쾌한 일도 있습니다. 우리는 자주 깜깜한 길을 더듬으면서 갑니다. 반면에 밝은 길을 자신있게 갈 때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홀로 외롭게 또 다른 때는 여럿이 함께 걷기도 합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개 우리는 이렇게 길을 갑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대개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길 가는 것이 비슷하다고 해서 그 의미까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사는 것이 비슷비슷하지만 그 의미는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삶은 복이지만 다른 삶은 저주입니다. 어떤 삶은 풍성한 열매를, 다른 삶은 가시와 엉겅퀴를 냅니다. 어떤 삶은 알차지만 다른 삶은 공허뿐입니다. 여기 더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바로 어떤 길은 생명의 길, 다른 길은 사망의 길입니다. 다윗이 주님께 고마워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는 "주께서 내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라고 합니다. 당시 그에게 이것은 죽음의 위협 가운데서도 살 길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목숨 건지는 것을 넘어 주님과 함께 하는 길입니다. 따라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이렇게 주님과의 교제가 생명입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이 기쁨입니다. 당연히 주님으로부터의 단절은 사망입니다. 누구에게나 삶은 녹록치 않습니다. 하지만 힘들게 살면서도 생명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반면에 사망의 길을 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한번 진지하게 묻기 바랍니다. '나는 생명의 길을 가고 있는가? 아니면 사망의 길을 가고 있는가?' 주님, 제게 생명의 길을 보여주십시오. 오늘 이 하루 저와 함께 해주십시오. 당신이 주시는 기쁨을 누리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왕하 10-12장>
4/25/2024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시 16:9-10)
죽음만큼 위협적인 것이 있을까요? 언제든 불쑥 찾아오는 것이 이것입니다. 하지만 죽음이 당장의 현실이 된다면 어떨까요? 주변에서 늘 보는 이것이 막상 내 문제라면 어떻게 됩니까? 그런데 여기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바로 죽음 앞에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하다면 정말 놀라운 것입니다. 시편기자 다윗의 고백이 이런 면에서 놀랍습니다. 그는 지금 사울왕에게 쫓겨 죽음에 직면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는 주님를 의지하며 흔들림이 없습니다. 다윗의 고백을 보십시오.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이 얼마나 확신에 찬 선포입니까? 주님은 반드시 죽음에서 구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그에게 기정사실입니다. 따라서 그는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 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라고 합니다. 죽음의 위협 앞에서 그 마음이 기쁜 것이 그저 신기할 뿐입니다. 이것은 주님을 아는 사람만 맛볼 수 있는 신비입니다. 그에게는 죽음조차 그 마음을 흔들지 못합니다. 오순절날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활을 설교하면서 이 말씀을 인용합니다. " 다윗이 저를 가리켜 가로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웠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입술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는 희망에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행 2:25-27). 다윗은 당시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더 나아가 예수님의 부활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처럼 우리는 죽음에서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더나아가 예수님처럼 죽어도 부활할 수 있습니다. 죽음의 경계 이편에서나 저편에서 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합니다. 이렇게 죽음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내지 못합니다. 이것이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비결입니다. 죽음에 대해서도 그렇다면 다른 위협에 대해서는 얼마나 더 그렇겠습니까? 주님, 다윗처럼 죽음의 위협에서도 흔들리지 않게 해주십시오. 예수님처럼 죽어도 다시 산다는 부활의 믿음을 갖게 해주십시오. 오늘 당신과의 견고한 관계를 바탕으로 어떤 도전에도 흔들리지 않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왕하 7-9장>
4/24/2024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시 16:8)
우리가 싫어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지만 없어지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중에 한가지가 위협입니다. 사는 동안 우리는 여러 위협을 만납니다. 이것은 어느날 심각한 병으로 등장합니다. 병이 얼마나 큰 위협인지는 경험해본 사람이 압니다. 위협은 사랑하는 가족의 병으로도 옵니다. 가족 중 누군가가 중병을 앓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위협적인 상황입니까? 위협은 또한 실직, 파산, 실패, 사고, 등으로도 옵니다. 위협을 만나면 대개 우리는 크게 흔들립니다. 가슴은 철컥 내려앉습니다. 손발은 맥이 다 풀립니다. 머리는 하얗고 눈앞이 깜깜해집니다.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안절부절합니다. "큰 일이다 어떻게 하나?"싶습니다. 위협이 오래되면 모든 것이 너덜너덜해집니다. 위협 앞에 우리는 이렇게 무력합니다. 평소 강한 사람조차 위협 앞에는 초라할 뿐입니다. 하지만 이게 다는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위협보다 더 강한 분이 계시는겁니다. 바로 어떤 위협도 지배하시는 우리 주님입니다. 따라서 무슨 일이 있어도 주님 곁에만 있으면 안전합니다. 이것은 마치 아빠 곁에서 걷는 어린 아이의 든든함같은 것입니다. 여기 시편기자에게도 심각한 위협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주님이 "나의 오른편에" 계시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오른편"이란 주님이 언제나 도우실 수 있는 위치를 상징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오른편에서 우리를 도우십니다. 훈계를 통해서 우리를 도우십니다. 또한 이렇게 위협 가운데서 지켜주심으로 우리를 도우십니다. 우리 오른편에 계시는 주님은 우리가 당하는 위협을 알고 계십니다. 주님께는 이것을 제압할 힘이 있습니다. 주님은 흔들리는 우리를 책망하기 보다는 긍휼히 여기십니다. 더우기 주님은 우리의 위협적인 상황을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역시 주님의 관심은 우리의 믿음에 있습니다. 우리는 위협 앞에 얼마나 연약한지를 깨닫습니다. 자연히 우리는 주님께 절박하게 매달리게 됩니다. 이것이 믿음의 연단입니다. 이 상황이 더 심각하고 더 길수록 더 여문 믿음이 되어갑니다. 위협을 믿음으로 바꾸시는 것이 주님의 지혜입니다. 위협은 순간순간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의 도우심도 명백한 현실입니다. 주님, 항상 당신 가까이 꼭 붙어있게 해주십시오. 위협 가운데 당신의 도움을 의지하게 해주십시오. 오늘 당신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왕하 4-6장>
4/23/2024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 (시 16:7)
주님이 우리에게 복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도우십니다. 주님의 도우심은 아주 실제적입니다. 주님이 도우시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훈계입니다. 우리는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친절하게 안내받습니다. 한번도 해보지 않은 일을 처음부터 차근차근 배웁니다. 주님은 이렇게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주님의 가르침은 우리 마음에 새겨집니다. 이것이 계속 우리를 교훈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시편기자도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라고 합니다. 만일 우리에게 주님의 훈계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주님께 계속 배우지 않고 어떻게 살겠습니까?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멈춘다면 얼마나 갑갑할까요? 주님의 지혜와 인도하심 없이 어떻게 하루하루를 살겠습니까? 매일 주님으로부터 오는 훈계가 정말 고마운 이유입니다. 조금씩 깨닫는 주님의 말씀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주님이 우리를 가르치시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우리는 매일 규칙적인 묵상을 통해 주님의 훈계를 얻습니다. 하지만 순간순간 예상치 못한 주님의 가르침도 있습니다. 또한 주님은 우리의 아픔과 실패를 통해서 뼈에 사무치는 교훈을 주십니다. 자주 주님은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둘러보면 모든 것이 주님이 훈계를 위해 사용하시는 재료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매일을 이런 질문으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주님이 가르쳐주실 것은 뭘까?" "과연 무엇을 통해 우리를 가르치실까?" 사실 우리가 얼마나 연약합니까? 힘도 지식도 지혜도 부족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생생한 주님의 훈계가 있습니다. 하나씩 주님께 배우며 하루하루를 살면 됩니다. 이것만큼 안전한 삶이 있을까요? 이렇게 주님의 교훈이 우리에게 복입니다. 이것을 알면 우리도 시편기자처럼 하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송축입니다. 송축은 축복하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주님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감히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주님께 축복받는 사람은 이렇게 주님께 축복을 돌려 드립니다. 찬양과 감사로 돌려드릴 수 있습니다. 또한 헌신으로 돌려드릴 수도 있습니다. 오늘 마음을 활짝 열고 주님의 훈계를 받기 바랍니다. 주님, 저희를 훈계하시는 당신을 송축합니다. 오늘도 저희를 훈계하시옵소서. 저희가 그 훈계를 좇아 행하겠습니다.
<오늘의 성경읽기 왕하 1-3장>
4/22/2024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시 16:5-6)
우리에게 주님이 복입니다. 주님 덕분에 성도와의 교제가 기쁨입니다. 또다른 부수적인 복도 있습니다. 바로 든든함입니다. 이것은 맛있는 음식이 주는 만족감같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잘 될 때 느끼는 흐뭇함도 비슷합니다. 복잡하게 얽혔던 문제가 해결된 뒤 오는 안도감은 어떻습니까? 가까이에서 함께 지내는 신실하고 따뜻한 사람이 주는 듬직함은 어떻습니까? 주님 덕분에 우리 마음이 든든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복입니다. 여기 시편기자도 이런 든든함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가 누리는 든든함은 어떤 유산 때문입니다. 이 유산은 어떤 땅이나 산업 같은 것입니다. 물론 아무 유산이나 다 그렇게 든든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마침 그의 유산은 안전하면서도 자신에게 꼭 맞는 것입니다. 그가 그것이 아름답다고 거듭 감탄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은 어떻습니까? 가족, 집, 교회, 일, 친구, 환경, 등등 말입니다. 어찌보면 늘 부족하고 아쉬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들은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선물입니다. 여기에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Beautiful!!" 이것이 든든함을 줍니다. 하지만 이 시편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시편기자가 여기서 정작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일까요? 그가 지금 감탄하고 찬양하는 것이 자신의 유산 때문입니까? 그가 먼저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라고 선포한 것을 주목하십시오. 이것은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유산이시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보다 더 좋은 유산은 없다는 고백입니다. 이것은 하나님만이 복이시라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만큼 안정적이고 우리에게 꼭 맞는 유산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 마음을 든든하게 해주는 다른 것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있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다른 좋은 것이 부족해도 우리는 하나님 때문에 늘 든든한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차원의 든든함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 아름답습니다. "참 아름다와라 주님의 세계는 저 산에 부는 바람과 잔잔한 시냇물 그 소리 가운데 주 음성 들리니 주 하나님의 큰 뜻을 나 알 듯 하도다." 하나님, 당신의 아름다움을 찬양합니다. 당신의 아름다운 선물 감사합니다. 오늘도 당신 덕분에 든든한 하루 되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왕상 20-22장>
4/20/2024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나는 그들이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 (시 16:3-4)
주님이 우리의 복입니다. 주님만 계시면 복받은 것입니다. 다른 것이 없어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부수적인 복도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주님 자신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 믿는 사람이 받는 보너스같은 복입니다. 그중에 하나가 성도들끼리 맛보는 기쁨입니다. 믿는 형제 자매 때문에 누리는 기쁨을 아십니까? 시편기자는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땅에서 주님 믿는 성도들이 존귀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그들이 우리에게 유익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이 그들을 존귀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도들 가운데 주님이 일하시는 것을 보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주님의 성품 한조각이라도 나타나면 그것이 우리에게 보석입니다. 어떤 성도가 극한 어려움 중에도 끝까지 주님 의지하는 모습이 우리에게는 하늘의 위로입니다. 형제 자매가 자기 몫의 역할을 다하는 공동체가 바로 천국입니다. 우리를 위해 늘 묵묵히 기도하는 성도가 든든한 버팀목입니다. 기쁨이나 슬픔이나 사소한 것까지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우리에게 큰 힘입니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처럼 주님은 성도를 사용하셔서 우리를 연마하십니다. 시편기자처럼 우리의 모든 즐거움도 형제 자매에게 있습니다. 따라서 다른 신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기웃거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의 결국은 뻔합니다. 그들을 부러워 하거나 그들의 헛된 예배에 참여할 필요도 없습니다. 신실한 성도가 가까이에 있습니까? 그게 바로 복입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도 다른 성도에게 복이 될 수 있습니다. 상대를 깎아내려야 자신이 올라설 수 있다고 믿는 사회에서 이것이 희망입니다. 남 잘되는 것이 배아픈 사람들 사이에서 이것이 충격이 됩니다. 주님의 유언같은 부탁이 여기 있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 13:34-35). 주님, 성도들과 누리는 기쁨을 복으로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에게 ...... 를 형제 자매로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희도 그들에게 복이 되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왕상 15-17장>
4/19/2024
"하나님이여 나를 보호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시편 16:1-2 )
건강이 복입니다. 두루 평안한 가정도 복입니다. 쓸만큼의 적당한 돈도 복입니다. 할 일이나 좋은 친구도 그렇습니다. 어려운 사람에게 도움이 된다면 이것도 복입니다. 이 정도만 있어도 더 바랄게 없습니다. 그런데 한가지가 더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 믿는 것입니다. 소박한 복에 믿음까지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계산으로는 이것도 있고 저것도 있는 것이 최선입니다.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입니다. 하나보다는 역시 둘다 있는 것이 좋습니다. 이것도 놓치지 않고 저것도 놓치지 않고 싶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계산법은 우리와는 다릅니다. 하나님께는 하나가 둘보다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 믿는 것 하나가 다른 복과 믿음을 합친 것보다 더 큽니다. 신비하게도 하나가 둘보다 큰 것입니다. 하나님 한분이 좋은 선물에 하나님을 더한 것보다 더 큽니다. 실제로 자주 이런저런 복이 믿음에 방해가 됩니다. 다른 복때문에 우리 마음에 하나님을 위한 자리가 없어집니다. 설사 있더라도 하나님이 악세서리정도가 됩니다. 때로는 모자란 복을 추구하느라 하나님께 눈을 돌리지 못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다른 복이 없어도 하나님 한분만 계시면 충분합니다. 이것은 꼭 알아야할 믿음의 비밀입니다. 하나님은 그 어떤 좋은 것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좋은 것이 있다면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알고 감사하면 됩니다. 혹 우리에게 좋은 것이 없어도 하나님만 계시면 그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모든 좋은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또한 우리에게 주기도 안주기도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좋은 것이 있고 없는 것보다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여기 시편기자의 고백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의 기도를 볼 때 그는 상당한 위험에 처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보호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그가 다윗이라면 사울에게 쫓겨다니던 긴박한 순간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당시 다윗에게는 다른 복은 없습니다. 그 상황에서 그가 한 고백을 오십시오.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주님에 비하면 다른 어떤 것도 복이 아닙니다. 그에게 정말 다른 것이 없어서 주님만이 복이라고 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다른 것이 있더라도 주님만이 복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다윗의 고백으로 고백할 수 있습니까?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주님이 함께 계십니까? 그렇다면 정말 복받은 것입니다. 주님, 당신이 저희의 주님이십니다. 당신 밖에는 저희의 복이 없습니다. 오늘 당신 한분만으로 만족하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왕상 13-14장>
4/18/2024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 주지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하지 아니하는 자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 (시 15:5)
주님의 장막에 머물 자 누구입니까? 그에게 기대되는 행동은 무엇입니까? 돈에 눈멀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돈이 중요치 않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돈으로 얻는 정당한 수익을 부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돈의 노예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돈에 눈이 멀게 되면 옳고 그른 것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그는 가난한 사람의 곤경을 이용해서 이자놀이를 합니다. 그가 돈을 불리는 사이에 가난한 사람은 최악의 나락에 떨어집니다. 또한 권력을 가진 자가 뇌물을 받고 죄없는 사람에게 잘못된 판결을 내립니다. 이런 일은 오늘날에도 곳곳에서 일어납니다. 우리 자신이 힘없이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한다고 상상해보십시오. 하나님은 이들의 고통과 탄식을 결코 외면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사회에서 버젖이 이런 악을 행하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이 그의 예배와 헌금을 기뻐하시겠습니까? 주의 장막에 머물며 바른 예배를 드릴 자 누구입니까? 정직과 공의와 진실한 말이 특징인 사람입니다. 이웃을 말로나 행동으로 해하지 않는 자입니다. 옳고 그름에 일관된 태도를 가진 자입니다. 그리고 돈욕심에 힘없는 사람을 괴롭히지 않는 자입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사람의 덕목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이런 사람이 드리는 예배를 기뻐하십니다. 이 사람은 이런 질적인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깊이 머물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시편기자가 얘기한대로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에게 가난이 닥칠 수 있습니다. 극한 슬픔과 곤란이 올 수도 있습니다. 끝없는 문제와 무거운 짐에 짓눌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그의 중심을 흔들지 못합니다. 바로 주의 장막에 깊이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은 양보해도 이것만큼은 놓치지 말기 바랍니다. 주님, 당신의 장막에 깊이 머물게 해주십시오. 이를 위해 저희가 정직하고 바르게 행하게 해주십시오. 어떤 일이 닥쳐도 흔들리지 않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왕상 10-12장>
4/17/2024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 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 (시 15:4)
주님의 장막에 머무는 자 누구입니까? 곧 예배를 통해 주님을 깊이 만나는 자 누구입니까? 정직과 공의와 진실한 말이 특징인 사람입니다. 그는 말로나 행동으로 이웃을 해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기대되는 또다른 행동이 있습니다. 바로 옳고 그름에 일관된 것입니다. 그에게 그른 것은 언제나 그른 것입니다. 때로는 그른 것이 자신에게 큰 유혹이 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른 것을 옳다고 하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그른 것이 큰 위협이 됩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것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그른 것은 어떤 경우에도 그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는 언제나 그른 것을 거절합니다. 당연히 그는 그르게 행하는 자에 대해서도 단호합니다. 시편기자도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한다고 했습니다. 반면에 그에게 옳은 것은 언제나 옳은 것입니다. 때로는 자신에게 불리해도 그는 옳은 것을 행합니다. 대다수가 반대해도 그는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합니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옳은 것을 택합니다. 그는 옳은 것을 행하는 사람을 알아봅니다. 그는 언제나 옳게 행하는 사람편에 섭니다. 시편기자가 얘기한 것처럼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는 늘 옳은 것을 구합니다. 따라서 주의 장막에 머무는 자는 이렇게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합니다. 또한 그는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않습니다. 그는 한번 마음에 서원한 것은 반드시 갚습니다. 물론 입으로 말한 것도 반드시 행합니다. 설사 그것이 해로울지라도 그렇게 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닮아 이렇게 말의 사람이 됩니다. 그른 것을 그런 것으로 여깁니까? 옳은 것을 옳다고 봅니까? 서원한 것은 무조건 지킵니까? 어떻게 이런 일관성이 가능합니까? 하나님을 깊이 만나면 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됩니다. 하나님을 알고 닮아가면 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통해 가능합니다. 하나님, 그른 것을 거절하게 해주십시오. 옳은 것을 존중하게 해주십시오. 서원한 것은 반드시 갚게 해주십시오. 이로써 저희 예배가 더 깊어지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왕상 7-9장>
4/16/2024
"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 (시 15:3)
하나님께 바르게 예배하는 사람의 특성이 있습니다. 바로 정직과 공의와 진실한 말입니다. 이런 특성은 바른 예배의 결과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우리를 이렇게 변화시킵니다. 하지만 이 특성은 바른 예배의 조건도 됩니다. 하나님은 이런 특성으로 사는 사람의 예배를 기뻐하십니다. 이렇게 예배와 삶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이 둘은 깊이 연결되어 서로를 세웁니다. 정직, 공의, 진실한 말, 이 세가지 특성은 바른 예배에 대한 원리입니다. 반면에 3절 말씀은 그 원리에 대한 실천입니다. 바르게 예배하는 사람은 어떻게 행동할까요? 특히 그 이웃을 향해서는 어떻게 할까요? 먼저, 그는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않습니다. 주의 장막에 머무는 자가 다른 사람을 정죄할까요?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꿇는 자가 어떻게 이웃의 심판자가 됩니까? 또한 독한 말로 이웃을 파괴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찬송합니까? 둘째로, 그는 이웃에게 악한 짓을 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사람이 이웃을 악하게 대하겠습니까? 하나님 은혜로 예배드리는 자는 그 이웃을 선대하지 않겠습니까? 약한 사람을 모질게 대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찬양합니까? 셋째로, 그는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않습니다. 흔히 비방은 함께 모여서 하게 됩니다. 내 입에서 나온 비방이 다른 사람의 동조를 얻어 한사람을 파괴합니다. 또한 내가 다른 사람의 비방에 동조해 파괴력이 배가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가 어떻게 이렇게 합니까? 오히려 비방의 흐름을 단호히 거절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우리는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그만큼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정도가 아닐까요? 즉 그만큼이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질적 수준이 아닐까요? 하나님, 이웃을 말과 행동으로 해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오히려 이웃을 사랑하는 예배자가 되게 해주십시오. 오늘 바른 예배자로서 행하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왕상 4-6장>
4/15/2024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시 15:2)
여호와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입니까? 바른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깊이 만나 함께 호흡하는 자 누구입니까? 시편기자는 이런 사람을 세가지 항목으로 묘사합니다. 먼저, 정직하게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음이 흠없고 온전한 상태라고 보면 됩니다. 하나님의 빛 가운데 있는 사람은 거짓이 없고 신실합니다. 둘째는, 공의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바른 마음에서 바른 행동이 나옵니다. 하나님 가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처럼 공의를 행합니다. 셋째는,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투명한 마음에서 투명한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과 대화하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진실하게 말합니다. 이 세가지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물론 이 세가지를 처음부터 다 갖춘 사람은 없습니다. 처음에는 너무 부족한 사람으로서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하지만 예배를 통해 하나님 가까이 머무는 동안 조금씩 이 세가지를 갖추게 됩니다. 결국 예배가 깊어질수록 이 세가지가 자신의 특성으로 자리잡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누군가에게서 이런 특성을 본다면 그가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구나 하고 짐작하게 됩니다. 그런데 만일 예배에 열심인 사람에게서 이런 특성이 안보이면 어떻게 된 일일까요? 물론 우리는 순간순간 실수와 실패를 반복합니다. 하지만 부정직과 불의와 거짓이 특성이면 문제는 다릅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의 예배를 의심해봐야 합니다. 여기서 예배의 형식과 빈도와 길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개인 예배나 공적 예배에 대해 질문해 보십시오. '우리의 예배는 영적으로 살아있는가?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기뻐하시는가?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가?' 하나님, 저희 예배를 새롭게 하옵소서. 예배를 통해 저희가 새로와지게 해주십시오. 정직과 공의와 진실한 말이 저희의 특성이 되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왕상 1-3장>
4/13/2024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시 15:1)
밝은 인사가 사람을 즐겁게 합니다. 하지만 어떤 때는 이런 인사가 더 불쾌합니다. 그 속마음이 겉과 다른 것을 알면 그렇습니다. 더우기 평소 그의 못된짓으로 괴로움을 겪고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아마 그 인사가 밝을수록 그것은 더 역겨워질겁니다. 그런데 예배가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예배가 얼마나 좋은 것입니까? 하지만 이 좋은 것이 하나님께 고통이 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없는 예배가 그렇습니다. 또한 삶이 따르지 않는 예배도 그렇습니다. 겉으로는 완벽한 예배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이 빠진 예배를 하나님이 모르시겠습니까? 이중적인 삶을 사는 자의 예배에 감동하시겠습니까? 이사야는 이런 예배에 대한 하나님의 불쾌함을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재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사 1:11-15). 여기 시편기자도 예배에 대해 질문합니다.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여기서 주님의 장막에 머물고 주님의 성산에 산다는 것은 예배를 말합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가까이에서 주님을 만납니다. 주님과 깊이 사귀며 주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이런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까? 지금 우리는 이런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참 예배를 위해 우리가 고쳐야할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당신 곁에 깊이 머물고 싶습니다. 당신께 기쁨이 되는 예배를 드리고 싶습니다. 저희를 새롭게 하셔서 바른 예배자가 되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삼하 19-21장>
4/12/2024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포로된 곳에서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시 14:7)
막기 힘든 것들이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님 없다고 믿는 것이 있습니다. 이렇게 믿으면 누구도 못말립니다. 하나님 없다고 믿으니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그는 당연히 하나님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 없다는 믿음에 기초한 가치를 따릅니다. 그중에 한가지가 '죽으면 끝'이라는 것입니다. 또 '모든게 다 물질', '물질이 최고', '맘껏 즐기자' 같은 것도 있습니다. 이런 가치는 독버섯처럼 퍼져 문화가 되고 사회 시스템이 됩니다. 이것은 마치 거대한 홍수처럼 사람들을 유린합니다. 그 가운데서 많은 사람이 상처받고 신음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개의치 않고 사람들을 짓밟습니다. 특히 고통을 많이 겪는 사람들은 연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물론 하나님 믿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누가 이것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여기 막을 수 없는 것이 또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이것은 어둠을 뚫고 나오는 해와 같습니다. 무엇이 이것을 막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하나님의 구원도 살아서 일합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구원받습니다. 아무리 막아도 이 일은 반드시 일어납니다.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있습니다. 얽매였던 것에서 자유케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것을 믿는 사람이 생깁니다. 하나님과 매일 소통하며 동행하는 사람이 생깁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치와 표준으로 삼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으로 기뻐합니다. 이렇게 해서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백성이 생깁니다. 그들은 거대한 홍수를 막는 댐처럼 곳곳에서 자신의 몫을 다합니다. 여기 시편기자는 처음에는 하나님 없다고 하는 사람들 때문에 속상해서 호소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 시편을 구원과 자유와 기쁨으로 마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포로된 곳에서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하나님, 당신의 구원을 감사합니다. 이 구원에 담긴 당신의 사랑과 능력과 지혜 감사합니다. 이 구원을 기쁨으로 누리게 해주십시오. 또 이 구원이 저희를 통해 퍼져나가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삼하 16-18장>
4/11/2024
"너희가 가난한 자의 계획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의 피난처가 되시도다" (시 14:6)
그냥 편하게 사는 길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바르게 사는 것과는 다릅니다. 바른 길에는 불편이 따릅니다. 또한 많은 저항이 있습니다. 하나님 없다고 믿는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이 계신다'고 해보십시오. 하나님을 찾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을 의지해 보십시오. 스스로 잘난 사람들 사이에서 겸손히 하나님을 섬겨 보십시오. 자기 맘대로 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법을 따라 행동해 보십시오. 돌아오는 것은 아마 칭찬이나 존경이 아니라 욕과 저주와 압력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 믿어서 오히려 가난해진 사람도 있습니다. 이 가난은 물론 물질적으로 가진 것이 없는 상태입니다. 하지만 사회적으로도 사람들 사이에서 힘없고 약한 상태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대개 악하고 교만한 사람들에게 많이 당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하고싶은 것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그의 계획을 꺾고 짓밟는 세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자는 영적으로도 가난합니다. 그에게 믿을 것은 하나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 시편기자의 선포를 보십시오. "너희가 가난한 자의 계획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의 피난처가 되시도다." 일시적으로는 교만한 자가 이기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원히 그렇게 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의 피난처가 되십니다. 그런데 여기 놀라운 비밀이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교만한 자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기회도 된다는 것입니다. 없다고 믿는 하나님이 자기 눈앞에서 이렇게 일하시는 것입니다. 자신이 괴롭히는 가난한 자가 하나님께 도움을 받고 있는겁니다. 늘 연약하게 보이던 가난한 자를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는겁니다. 이것이야말로 그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을 기회입니다. 그 하나님 앞에 무릎꿇고 회개할 기회입니다. 마지막날 심판주 하나님을 두려움으로 만나기 전에 구원받을 기회입니다. 이것을 바꾸어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가난과 연약함과 어려움 가운데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를 받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보는 기회도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희의 가난과 연약함과 어려움을 살펴주십시오. 이를 통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 주십시오. 이때문에 당신을 믿는 사람이 생기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삼후 14-15장>
4/10/2024
"그러나 거기서 그들은 두려워하고 두려워 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 (시 14:5)
피할 수 없는 것 한가지가 있습니다. 바로 죽음입니다. 죽음이 가까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병이나 사고나 장례같은 경우 죽음이 충격적인 현실로 훅 다가옵니다. 하지만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면 죽음은 쉽게 잊혀집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죽지 않을 사람처럼 행동합니다. 죽음에 대한 견해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죽음에 대한 느낌과 태도도 갖가지입니다. 하지만 부인할 수 없는 한가지가 있습니다. 바로 누구나 죽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자연히 하나님에 대해 깜깜합니다. 그는 하나님과 상관없이 행동합니다. 또한 자신의 행동이 옳다고 믿습니다. 그는 이것이야말로 자유요 행복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비극적인 사실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이 이것은 사실입니다. 그가 무슨 논리로 반박해도 하나님은 계십니다. 그에게는 하나님 계신 증거가 전혀 없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음이 그에게 실제인 것처럼 하나님도 실제입니다. 히브리서에 이런 선포가 있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 9:27). 사람은 언젠가 한번은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지만 그것이 마지막날 심판 때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한번 만나는 하나님은 심판주 하나님입니다. 이때 하나님과 심판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 됩니다. 이때 처음으로 대면하는 하나님은 너무나 두려운 분입니다. 시편기자가 미리 본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그들은 두려워하고 두려워 하였으니 ..." 반면에 그이전에 하나님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이때 만나는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입니다. 이 하나님은 늘 함께 하시는 아버지입니다. 시편기자가 선포한 것처럼 "의인의 세대에" 계시는 하나님입니다. 당신의 양떼를 돌보시는 선한 목자입니다. 지금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얼마나 감사합니까? 반면에 하나님 모르는 것은 그만큼 안타까운 것입니다. 하나님, 당신의 구원 감사합니다. 지금 저희 아버지와 목자로서 저희와 함께 해주십시오. 오늘 당신을 모르고 사는 ....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삼하 12-13장>
4/9/2024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냐 그들이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시 14:4)
'하나님이 없다'고 믿으면 어떻게 될까요? 물론 하나님을 찾지도 않을겁니다. 하나님을 만날 기회가 없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을 알 수도 없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에 대해 무식해집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인자하신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무서운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뭘 원하시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에 대해 무식하면 인간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알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을 선대하는 법을 모릅니다. 사람을 상하게 하고도 아무 거리낌이 없습니다. 심지어는 쉽게 자신을 학대하고 짓밟습니다. 시편기자가 1절에서 말한대로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3절은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무식하면 사람에게도 무식하게 행합니다. 여기서 "더러운 자"는 우유가 상한 것처럼 부패한 자를 말합니다. 그들은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 맘대로 하는 사람은 비인간적이 됩니다. 하나님 무서운 줄 모르고 악한짓을 계속합니다. 하나님이 빠져 있는 관계나 공동체는 끔찍해집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렇게 망가져도 하나님을 부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형벌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회개하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도 모릅니다. 문제해결의 실마리가 하나님께 있는 것도 모릅니다. 하지만 한번 이것을 뒤집어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하나님을 알고 있다면 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하나님을 알면 좋은 의미로 '인간적'이됩니다. 사람을 존중합니다. 따뜻하게 대합니다. 사람을 세웁니다. 이런 사람이 있는 곳은 복됩니다. 하나님, 당신을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당신을 더 알아가게 해주십시오. 당신을 아는만큼 사람에게 복이 되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삼하 8-11장>
4/8/2024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시 14:2-3)
인간에게 비극이 있습니다. 언뜻 생각하면 사별, 이혼, 실직, 병, 배신, 폭행 같은 것들입니다. 하지만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비극이 있습니다. 바로 인간이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입니까? 우리를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분입니다. 우리를 향한 목적과 계획을 가지신 분입니다. 우리를 사랑으로 살펴주십니다. 우리를 도우시고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기뻐하십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연단하십니다. 우리와 함께 일하시는 것을 즐기십니다. 우리와 막힘없이 소통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때문에 존귀한 사람으로 삽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과 은혜를 누립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소망으로 죽어도 산다는 확신을 가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과 인내와 용기로 고난을 견딥니다. 우리는 하나님 은혜로 영적인 눈을 떠서 이전에 못보던 것을 봅니다 ...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이신지 나열해 보십시오. 아마 한없이 나올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버리는 순간 이 모든 것도 사라집니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에게 가장 큰 비극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편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 하나도 없도다." 이것은 하나님께도 비극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상처를 상상해보십시오. 자식에게 버림받은 부모의 상처나 은혜를 많이 베푼 사람에게 당한 배신 같은 것으로 이것을 조금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다면 이것은 우리에게 가장 큰 사건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도 최고의 순간이 되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피시면서 당신을 찾는 지혜로운 사람을 발견하실 때 하나님의 감동이 어떻겠습니까? 오늘 하루를 시작하며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이것이 최고의 순간이 됩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께도! 하나님, 당신은 저희 하나님이십니다. 지금 당신을 간절히 찾습니다. 저희 하나님으로서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저희 하나님으로서 저희를 인도해 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삼하 4-7장>
4/6/2024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시 14:1)
사는 것이 선택의 연속입니다. 우리는 순간순간 어디를 갈지,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할지, 어떻게 할지를 선택합니다. 우리가 하는 선택은 대개 일상적입니다. 어떻게 선택하든 대단한 영향은 없습니다. 하지만 어떤 선택은 결정적입니다. 그중에 가장 결정적인 것은 하나님에 관한 선택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선택이 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이 없다는 선택도 있습니다. 이 선택은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없다는 것도 믿음입니다. 시편기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 사람들에 대해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믿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에 관한 모든 증거와 주장을 거부합니다. 그들은 그 마음의 칠판에서 하나님을 깨끗하게 지워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전제로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합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도, 창조도, 위대하심도, 의로우심도, 사랑도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에게서 나왔다고 하는 모든 것이 무의미합니다. 만일 누군가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해 말하면 그들은 이상하게 느낄겁니다. 아마 속으로 '있지도 않는 하나님이 어떻게 인도하지?'라고 반문할겁니다. 시편기자는 그들을 한마디로 "어리석은 자"라고 정의합니다. 세상에서 똑똑한 사람 중에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모이면 그중에서 무신론자들이 더 똑똑하게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사람의 영향력은 상당히 강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눈에 그들만큼 어리석은 사람이 없습니다. 여기서 '어리석다'는 것은 잠언에서 사용된 의미로 보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은 것이 어리석음입니다. 하나님과 상관없이 사는 것이 어리석음입니다. 자기 맘대로 생각하고 행하는 것이 어리석음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사는 것이 지혜입니다. 우리 앞에 중요한 선택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믿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계시다고 믿습니까? 오늘 어리석은 길을 가겠습니까? 아니면 지혜로운 길을 가겠습니까? 하나님, 당신은 살아계십니다. 지금 당신 앞에 서있습니다. 저희를 지혜로운 길로 인도해 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삼상 29-31장>
4/5/2024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시 13:5-6)
'지옥과 천당을 오가는' 때가 있습니다. 지금 이 시편이 그렇습니다. 시편기자는 지옥같은 경험을 호소해 왔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분위기가 급히 반전됩니다. 그는 마치 천국을 경험하고 있는듯 보입니다. 그 사이에 상황이 바뀐 것은 아닙니다. 그는 여전히 적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에게 위험을 피할 다른 길이 열린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는 "내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라고 선포합니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라'고 외칩니다. 그의 두려움과 좌절이 기쁨과 찬송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런 반전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도대체 이것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놀랍게도 이것은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시편기자의 고백에 담긴 두가지 요소를 주목해 보십시오. 그 하나는 주님의 사랑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있습니다. 자신의 위험도 두려움도 다 주님이 처리해 주시도록 의지합니다. 심지어 주님과 단절된 것같은 영적인 문제도 주님 손에 부탁합니다. 그가 의뢰하는 주님은 사랑을 베푸시는 분입니다. 주님의 사랑의 손길이 움직이면 다 되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에 무엇이든 맡기십시오. 그러면 주님이 구해주실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여기서 상황 변화에 상관없는 기쁨이 옵니다. 두번째는 여호와의 은덕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시편기자에게 일어난 반전은 그 자신보다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바로 하나님이 그를 후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찾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절박하게 당신을 구하는 사람을 품어 주십니다. 살려달라고 하나님께 탄원해본 사람은 이것을 압니다. 하나님의 후대하심을 경험하면 부족함이 없습니다. 대적 앞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후대하신다고 자랑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하나님의 은덕이 찬양이 됩니다. 바로 이것이 천국맛입니다. 별일없이 무난하게 지내면서 마음이 냉랭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어려움은 하나님께 탄원하게 합니다. 절박하게 하나님을 구하십시오. 이것이 복입니다. 하나님, 간절히 당신을 구합니다. 저희의 어려움과 짐을 당신께 의뢰합니다. 당신의 사랑과 후대하심으로 함께해 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삼상 26-28장>
4/4/2024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하오며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시 13:4)
"네 몸이 네 몸이 아니다." 어른들이 하시던 말씀입니다. 이것은 '네게 딸린 식구들이 있다,' '사람들이 네게 기대가 크다,' '여러 사람이 너를 지켜보고 있다' 는 뜻입니다. 아마 건강 잘 챙기고 뭐든 잘 하기를 당부하는 말씀일겁니다. 가만히 생각하면 정말 맞는 말씀입니다. 지금 만일 건강이 나빠져서 눕게 된다면 어떻게 됩니까? 혹 너무 힘들어서 다 관두고 숨어버린다면 어떻게 됩니까? 이것은 우리 한사람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적지 않은 사람이 이로인해 어려움을 겪을 것입니다. 아니면 어떤 사람은 이 모습을 보고 고소해 할지도 모릅니다. 여기 시편기자도 개인적으로 큰 어려움에 빠졌습니다. 그는 완전히 패배하거나 망하기 직전에 처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다윗이 이 시편을 쓰고 있다면 사울의 포위망에 걸려 곧 잡혀 죽게 생긴 상황일 수도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처지만큼이나 정신적으로 심하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의 두려움과 좌절이 어땠을지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그는 영적으로도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것처럼 느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지도 도와주시지도 않는 것같습니다. 한마디로 총체적인 위기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이 있습니다. 지금 시편기자가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자신의 처지를 보고 그의 원수가 "내가 그를 이겼다"하는 것입니다. 그가 흔들리는 것을 보고 그의 대적들이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패배가 자신만의 문제가 아님을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의 패배가 됩니다. 동시에 하나님을 거역하는 사람들의 승리와 기쁨이 됩니다. 이것은 그가 믿는 하나님의 명예에 관련된 문제입니다. 아마 이것은 하나님이 그를 통해 하실 일에도 영향을 미칠겁니다.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은혜를 누릴 수많은 사람과도 연관됩니다. 그가 지금 하나님의 손길을 구하는 것은 이런 차원입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함께 해주셔야 하는 근거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잘못되는 것은 우리 한사람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잘못되지 않도록 하나님의 명예를 놓고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 사람들에게 미칠 영향을 걸고 기도하십시오. 세상의 악이 승리하지 못하도록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저희가 잘못되어 세상의 악이 기뻐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저희가 바르게 되어 여러 사람에게 복이 되게 해주십시오. 오늘 당신의 명예를 위해 저희를 인도해 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삼상 24-25장>
4/3/2024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시 13:3)
기도할 때 대개 많이 아뢰는 것들이 있습니다. 일이 터지면 해결될 때까지 매달려 기도합니다. 자녀들을 생각하면 기도할 것이 늘 태산입니다. 형편이 어려우면 생존적인 차원으로 도우심을 구합니다. 자신의 연약함이나 관계의 문제도 기도의 단골메뉴입니다. 어떤 내용으로든 일단 기도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기도할 때 잊지 말아야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임재를 위한 기도입니다. 물론 우리의 필요를 쏟아내는 것도 기도입니다. 그러다보면 하나님을 가까이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도 기도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로 하나님이 자유롭게 당신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기도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보고,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기도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는 것같지 않으면 얼마나 끔찍합니까? 뭔가를 열심히 아뢰지만 듣는 분이 없는 것같으면 얼마나 공허합니까? 이럴 때 우리가 해야할 것이 시편기자의 기도입니다. '하나님, 저를 생각해주십시오. 제 기도에 응답해주십시오. 제 눈을 밝히셔서 당신을 보게 해주십시오. 그러지 않으면 죽을 것같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없이는 도저히 안되겠다는 탄식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다는 절박함입니다. 여기서 시편기자의 기도는 명령조의 강한 요청입니다. 누가 감히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사실 이것은 그의 절박한 마음입니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그의 확신입니다. 시편기자는 지금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그 자신은 언약적인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의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비록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지 않아도 이 관계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지금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당신의 자녀입니다. 이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함께 해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구하는 자녀를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 저희를 생각해 주십시오. 저희가 찾을 때마다 응답해주십시오. 저희 눈을 밝혀 당신을 보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삼상 21-23장>
4/2/2024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시 13:2)
아이에게 아찔한 순간이 있습니다. 뭐니뭐니해도 눈앞에 엄마가 없을 때일겁니다. 사실은 엄마가 옆에서 늘 지켜보고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에게는 눈에 엄마가 꼭 보여야 합니다. 눈앞에 엄마가 없으면 온갖 불안과 걱정이 밀려옵니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면 아이는 거의 패닉에 빠집니다. 결국 눈물이 터지고 '엄마'를 외쳐부르게 됩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그렇습니다. 이런 아찔한 순간을 경험해본 적이 있습니까? 여기 시편기자에게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지 않은 것같은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지금 엄마 찾는 아이처럼 하나님을 부르고 있습니다. 그의 내면은 번민과 근심으로 가득합니다. 온갖 복잡한 생각과 느낌이 파도처럼 쉬지않고 밀려옵니다. 시편기자가 다윗이라면 이 상황은 사울에게 쫓길 때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자신을 쫓는 적이 점점 포위망을 좁혀올 때 다윗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하지만 그럴 때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확실하면 이렇게 흔들리지 않았을겁니다. 마치 주변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엄마만 곁에 있으면 아무 문제없는 아이와 같습니다. 하나님만 함께 한다면 마음 가득한 염려는 순식간에 깨끗해질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면 적의 공격도 그렇게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힘든 상황에 하나님이 안계시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영영 잊고 계시는 것같을 때 말입니다. 이 빈틈을 타고 원수는 기세등등합니다. 우리를 마구 짓밟고 자랑스러워 합니다. 마치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놀려대는 것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해야 합니까? 아이가 엄마 찾는 것처럼 하나님을 찾으면 됩니다. 시편기자처럼 언제까지 이래야 하는지를 탄원하는 것입니다. 더이상 이렇게는 못살겠다고 호소하십시오. 하나님 어디 계시느냐고 부르짖으십시오. 이렇게 사는 하루하루가 지옥같다고 하십시오.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이 함께 계셔야 한다고 매달리십시오. 하나님, 저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저희와 꼭 함께 해주십시오. 저희 마음 속 번민과 근심을 처리해 주십시오. 온갖 위협과 공격으로부터 보호해 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삼상 19-20장>
4/1/2024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시 13:1)
매순간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타락입니다. 한번 무너지면 헤어나오기 힘든 수렁에 빠집니다. 하지만 타락만큼이나 위험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냉랭함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없습니다. 예배의 감동과 기쁨이 사라집니다. 말씀을 들어도 마음이 밋밋합니다. 기도도 공허하고 형식적입니다. 하루하루는 그저 기계처럼 돌아갑니다. 겉보기에는 분명히 하나님 믿는 사람입니다. 상습적으로 나쁜짓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마음은 메말라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냉랭함을 극복할까요? 하나님의 은혜 외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은혜로 우리 속에서 성령께서 일하시면 됩니다. 성령께서 일하실 때 대개 마음에 일어나는 첫번째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절규입니다. 여기 시편기자의 기도가 바로 이런 절규입니다. '하나님, 언제까지 저를 잊고 계실겁니까? 주의 얼굴을 언제까지 저에게서 숨기시겠습니까?" 이것은 아직 흡족한 응답을 받은 기도는 아닙니다. 오히려 전혀 만족스럽지 못한 상태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절박한 탄원이 성령께서 이미 일하시는 증거입니다. 성령님은 하나님과 함깨 했던 시간을 기억나게 합니다. 주님의 얼굴을 보던 경험을 일깨우십니다. 이 기억이 강렬한만큼 지금 그렇지 못한 것이 괴롭고 끔찍한 것입니다. 결국 온 마음이 탄식함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기다리게 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탄원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있습니까?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요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흔히 부흥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하나님, 당신의 임재를 간절히 구합니다. 지금 저희를 만나 주십시오. 오늘 저희를 새롭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삼상 17-18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