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0/2024
[고난묵상]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마 16:21)
우리는 매일 새로운 길을 걷습니다. 가보지 않은 길을 가면서 소박한 기대를 가집니다. 우리의 앞날이 지금보다는 낫겠지 하는 것입니다. 지금 그렇게 나쁘지 않은 형편이라도 그런 기대를 합니다. 힘든 일이 많은 사람은 앞날에 대한 희망으로 하루하루를 버팁니다. 현재의 삶이 지루해진 사람도 새로운 도전을 기대합니다. 하지만 기대는 기대일뿐 우리에게 다가오는 현실은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나아지기를 바라지만 형편이 그대로이거나 더 나빠질 수도 있습니다. 지금 있는 문제는 좋아지는데 또다른 큰 문제를 만날 수도 있습니다. 지루한 환경을 벗어나 잠시 즐거워도 만족은 없습니다. 미래 희망은 자주 이렇게 불확실하고 신기루와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확실한 미래를 사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미래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이 확신은 우리의 바램과는 다릅니다. 이 확신은 하나님이 우리 속에 주시는 것입니다. 이 확신은 우리 미래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에 근거합니다. 이 확신은 우리와 동행하시는 성령님과 우리 앞에 등불이 되는 말씀에 근거합니다. 이 확신은 우리가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할 지 아는 것에 근거합니다. 이런 확신을 가진 사람에게는 앞으로 어떤 일이 있든, 어떤 어려움이 오든, 어떤 성취가 있든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는 앞날에 무슨 일이 기다리든 묵묵히 자기 길을 걸어 갑니다. 마치 우리 예수님이 그 앞에 기다리는 고난과 죽음을 아시고도 확신 가운데 그 길을 가신 것처럼 갑니다. 앞날이 지금보다 나아지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할지라도 확신 가운데 자신의 길을 걸어가기 바랍니다. 하나님, 오늘 하루와 앞날을 당신께 부탁합니다. 저희에게 미래에 대한 확신을 주셔서 흔들림없이 갈길을 가게 하옵소서. 오늘도 성령님을 통해 저희와 동행하시고 말씀으로 저희를 인도하옵소서.
<오늘의 성경읽기 삼상 13-14장>
3/28/2024
[고난묵상]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사 53:10-12)
어느날 불쑥 일어나는 일이 있습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계획한 대로 되는 일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은 그냥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바로 하나님이 원하셔서 된 일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그 아들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아들은 하나님의 계획에 순종하여 자신을 희생제물로 드리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순종하는 아들을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그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주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계획에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어떤 사람에게는 너무 무식한 것입니다. 하지만 거기에 우리 죄가 깨끗이 처리되는 무한한 지혜가 있습니다. 또 예수님의 십가가는 어떤 사람에게는 너무 무능한 것입니다. 하지만 거기에 우리 죄가 용서되고 우리를 살리는 무한한 능력이 있습니다. 이 엄청난 일에 그것을 계획하신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있습니다. 아울러 하나님의 계획을 실제로 실행하신 예수님의 순종이 있습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하시는 성령님의 도우심도 있습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한 이 프로젝트에 삼위일체 하나님이 총출동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값없이 받는 구원에 이렇게 엄청난 비밀이 있습니다. 구원은 믿는 순간 얻는 은혜의 선물이지만 우리는 평생 헤아려도 그 소중함을 다 헤아리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된 것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또다른 복을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받은 복을 누리며 헤아리면 됩니다. 이 복을 깨달아 갈수록 우리에게 남은 것은 찬양과 감사뿐입니다. 그리고 받은 복에 어울리는 삶을 살면 됩니다. 하나님, 저희 구원을 위한 당신의 계획과 예수님의 실행과 성령님의 역사를 찬양합니다. 이 엄청난 선물을 잘 헤아려 알게 하옵소서. 오늘 하루 저희에게 주신 구원에 합당한 모습으로 살게 하옵소서.
<오늘의 성경읽기 삼상 7-9장>
3/27/2024
[고난묵상]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 하였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고 끌려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사 53:7-9)
누구에게나 힘든 일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유난히 더 많아 보입니다. 병과 가난과 사고와 갈등과 상처와 슬픔이 떠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평생 우리가 피할 수 없는 것이 이 고통과의 씨름입니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을 함께 느끼며 거기서 위로와 소망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이 고난을 겪어 보시고 우리를 아신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든든한지요. 하지만 예수님의 고난은 그 자체로 독특합니다. 여기 예수님의 고난이 가진 세가지 독특함이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의 고난은 순종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우실 때도 거의 아무 말씀 하시지 않았습니다. 고난 당하시는 예수님에게서 어떤 원망도 반항도 자기변명도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도살할 사람이나 털깎는 사람에게 자기 몸을 묵묵히 내어주는 양과 같았습니다. 이것은 이미 고난받기로 작정하신 분의 태도입니다. 예수님은 왜 그렇게 되어야 하는지를 잘 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기꺼이 고난을 받아들이셨습니다. 다음, 예수님의 고난은 대속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마땅히 형벌받을 사람들을 대신해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를 살리기 위한 고난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고난은 죄없이 받는 고난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강포를 행하지도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 자신에게는 고난받을 만한 잘못이 없었습니다. 어찌보면 예수님은 억울하게 고난받으신 것입니다. 이 세가지를 종합해보면, 예수님은 아무 죄 없는 분으로서 우리를 위해 기꺼이 고난받으신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기꺼이 고난받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만일 우리를 살리는 것에 관심이 없으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만일 예수님이 죄없는 분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는 여전히 죄의 노예로 살고 있을겁니다. 우리를 향해 쏟아지는 진노를 피하지 못했을겁니다. 모든 죄를 용서받은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누리지 못했을겁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의 고난을 통해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은 느낌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살리기 위해 흠없는 제물로 기꺼이 자신을 드린 행동입니다. 오직 여기에 우리의 구원이 있습니다. 하나님, 저희를 이렇게 사랑해 주신 것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고난이 저희 구원의 합법적인 근거임을 정확하게 알게 하옵소서. 흠없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를 위해 기꺼이 고난받으신 예수님을 사랑하게 하옵소서.
<오늘의 성경읽기 삼상 3-6장>
3/26/2024
[고난묵상]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 53:6)
한 문제로 힘든데 또다른 문제가 터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배우자가 아파 심각한 투쟁을 하고 있는데 돈문제와 가족갈등이 터지는 것같은 경우입니다. 연약한 자녀들 뒷치닥거리로 정신이 없는데 멀리 계신 부모님에게 긴급한 필요가 생기는 경우도 그렇습니다. 이럴 때 받는 압박은 세배, 네배가 됩니다. 무거운 짐이 두개, 세개, 늘어가면 더이상 버틸 수 없는 데까지 이르게 됩니다. 결국 뭔가 폭발하거나 심하게 망가지고 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겪으신 고통이 얼마만큼일까요? 감히 어떻게 그 고통을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고통을 암시하는 것 하나가 여기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모두는 일차적으로 이스라엘 백성 모두를 말합니다. 그러나 그외의 다른 모든 사람도 포함됩니다. 여기에는 물론 나 자신도 포함됩니다. 이 모두의 죄악을 다 합쳐서 예수님에게 지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도대체 어느 만큼입니까? 우리가 지은 죄의 핵심은 양처럼 각기 제 길로 간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의 길을 버린 데서 시작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노골적인 거역입니다. 하나님과의 기본적인 관계를 깨는 것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은 내 하나님이 아니라는 결정입니다. 스스로가 하나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옳고 그른 것을 스스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그 마음이 원하는대로 행합니다. 이렇게 해서 내 죄가 산처럼 쌓여 갑니다. 결국 위로부터 쏟아지는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지 못합니다. 이런 한사람 한사람의 죄가 모든 사람의 숫자만큼 쌓이면 과연 그 죄가 어느만큼입니까? 그리고 그 죄에 대해 쏟아 부어야할 하나님의 진노의 양은 얼마입니까? 이 모든 무게의 죄가 예수님에게 지워진 것입니다. 이 모든 무게의 진노가 예수님에게 쏟아진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 수학적으로 따질 문제는 아닙니다. 여기에는 생명의 주님으로서 맞는 죽음이나 아버지에게 버림받는 아들의 아픔과 같이 계산을 초월한 고통이 있습니다. 사실 보통사람이 십자가형으로 처형될 때의 고통도 상상을 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겪으신 고통의 무게는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그 무거운 고통 중에 바로 내 죄의 무게가 함께 있습니다. 내게 쏟아질 그 진노가 고스란히 예수님에게 쏟아진 것입니다. 하나님, 저희 죄가 얼마나 무거웠었는지를 깨닫게 해주십시오. 저희에게 쏟아졌을 당신의 진노가 얼마나 무서운 것이었는지도 깨닫게 해주십시오. 오늘 저희 죄를 담당하고 돌아가신 예수님의 고통을 좀더 생생하게 느끼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삼상 1-2장>
3/25/2024
[고난묵상]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사 53:5)
돌이켜보면 곳곳에서 많은 도움으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많은 것은 주어진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서 얻은 것도 가만히 보면 은혜의 선물입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평화는 어떻습니까? 이 평화는 느낌보다는 오히려 법적인 상태입니다. 평화로운 상태가 있는 반면 서로 원수인 상태가 있습니다. 원래 죄인인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였습니다. 그 결과 죽음과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느끼든 아니든 이 법적인 상태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다 잊고 즐기는 것도, 열심히 일해서 뭔가를 이루는 것도, 자신의 변화를 위해 여러 시도를 해보는 것도, ...다 이 죄와 죽음과 심판의 문제를 어쩌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대신 죄에 대한 징계를 당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쏟아야할 진노를 대신 그 아들에게 다 쏟으셨습니다. 이로써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죄선고하실 합법적인 길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믿음으로 우리 죄를 용서 받는 길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는 자유롭게 하나님께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법적인 평화입니다. 이 평화로 인해 우리는 내적인 평안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이 법적인 평화가 의심스러우면 언제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보면 됩니다. 우리의 죄는 우리 삶의 곳곳에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이 상처는 우리에게 평생의 짐이며 아픔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받으신 상처로 우리가 나음을 입게 되었습니다. 여전히 부분적으로 상처의 아픔은 남아 있지만 상처의 뿌리는 이미 치유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가 있습니까? 죄가 남긴 상처가 아물고 있습니까? 하나님,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저희 죄를 용서해주신 것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아픔으로 저희를 치유하신 것 감사합니다. 오늘 은혜의 선물로 주신 이 평화와 치유를 맘껏 누리게 하옵소서.
<오늘의 성경읽기 룻 1-4장>
3/23/2024
[고난묵상]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사 53:4)
"맞아도 싸다"는 말이 있습니다. 심지어 "죽어도 싸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것은 맞을만큼, 죽을만큼 잘못했다는 뜻입니다. 맞아도, 죽어도 억울할게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서 너무 잘된 일이고 신나기까지 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이것은 모든 죄 중에 가장 악랄한 죄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는 것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맞아 마땅하고 죽어 마땅한 중범죄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작정하고 고소했습니다. 그리고 빌라도가 놓아 주려고 할 때 기를 쓰고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의 무죄방면은 난동을 일으키고 살인까지 저지른 바라바를 놓아 주는 것보다 힘든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모독한 죄인이 그냥 풀려나는 것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채찍에 맞고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들은 "그러면 그렇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그때 "하나님은 역시 공의로운 분"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저런 끔찍한 죄인을 그냥 두실리 없지"라고 결론지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에는 다른 사연이 있었습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죄를 징계하신 것이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죄 때문에 맞으시고 돌아가신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죄는 예수님 자신의 죄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라고 외치던 그 사람들의 죄였습니다. 예수님이 "맞아도, 죽어도 싸다"고 생각했던 사람들 자신의 죄였습니다. 오늘날 그들과 함께 예수님 죽이는데 참여한 바로 우리 죄였습니다. 예수님이 짊어지시고 돌아가신 것은 그들과 우리의 죄입니다. 그리고 죄때문에 생긴 고통('질고')과 슬픔을 끌어안고 돌아가신 것입니다. 사실은 그 유대인들이 "죽어도 싼"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로 오늘 우리가 "죽어도 싼"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유대인들은 주먹에 맞고 채책에 맞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속에서 자신들을 봤어야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에서 봐야할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입니다. 하나님,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이 오래 전 멀리 있는 남의 얘기가 되지 않게 해주십시오.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 속에서 죽어 마땅했던 저희의 모습을 보게 하옵소서. 오늘 저희 죄와 고통과 슬픔을 대신 지고 돌아가신 예수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더 알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삿 17-19장>
3/22/2024
[고난묵상]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사 53:1-3)
우리가 잘 저지르는 실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겉모양이 번지르한 사람에게 쉽게 넘어갑니다. 반면에 볼품 없는 사람을 쉽게 무시합니다. 그러다가 정말 중요한 사람을 거절합니다. 이사야 53장은 하나님의 종의 죽음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종이 죽고난 후에 그 죽음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깨닫는 사람들이 종의 죽음에 관해 말합니다. 하지만 이 메시지를 믿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메시지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능력('팔')에서 나온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소수였을 것입니다. 이 메시지는 왜 이스라엘이 종을 거절했는지를 설명합니다. 이스라엘은 바로 종의 볼품없는 외모때문에 그를 거절했다는 것입니다. 종의 외모에는 사람들을 끌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연한 순처럼, 마른 땅의 뿌리처럼 초라하게 자랍니다. 그가 자란 곳은 큰 식물을 전혀 기대할 수 없는 불모의 땅이기 때문입니다. 종에게는 아름다움이나 장엄함 같은 왕의 모습이 전혀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슬픔과 고통을 겪는 종을 멸시하고 거절합니다. 종은 사람들이 대개 보기 싫어하는 종류의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그를 메스꺼워합니다. 그때문에 사람들은 종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실 종은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분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종에 관한 이 메시지가 예수님에게서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평범한 가정의 아기로 탄생하셨습니다. 약 30년 동안 한 가정과 마을에서 보통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3년여 공생애 동안 잠시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도 했지만 대체로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거절당했습니다. 결국 그는 초라하고 무력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왕의 화려함이나 위엄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또한 세상을 정복하는 장군의 힘이나 풍채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외모는 지극히 평범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그들이 기대하던 메시아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거절한 것입니다. 하지만 간혹 그런 예수님에게서 메시아를 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11-12).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종 메시아가 보입니까? 하나님, 예수님이 얼마나 중요한 분인지 알게 해주십시오. 예수님의 평범한 모습과 초라한 죽음에 담긴 비밀을 깨닫게 해주십시오. 오늘 예수님이 이 땅에서 겪으신 고난을 조금이라도 더 생생하게 느끼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삿 14-16장>
3/21/2024
"여호와께서 그들을 지키사 이 세대로부터 영원까지 보존하시리이다 비열함이 인생 중에 높임을 받는 때에 악인들이 곳곳에서 날뛰는도다" (시 12:7-8)
쓰나미 앞에 인간이 얼마나 무력합니까? 세상 앞에 우리가 얼마나 미미합니까? 우리가 있거나 없거나 세상은 별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세상은 우리와 상관없이 자기 방식대로 굴러갑니다. 시편기자는 인생 중에 높임을 받는 것이 비열함이라고 지적합니다. 비열함은 공허하고 쓸데없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이 사실은 허망한 것입니다. 더 가지고, 더 높아지고, 더 힘세지는 것은 비누거품같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비열한 것을 향해 미친듯 몰려갑니다. 시편기자가 본 것처럼 이런 세상에 악인들이 곳곳에서 날뜁니다. 여기서 악인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합니다. 겉은 번지르하지만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입니다. 그는 자기 욕심을 위해 다른 사람을 쉽게 짓밟습니다. 특히 그는 말로 속이고 상처주는 사람입니다. 이런 악인이 세상을 이끄는 강한 세력입니다. 세상의 공기는 비열함과 악으로 오염되어 있습니다. 이것들은 사람들의 뇌리에서부터 텔레비전이나 인터넷까지 속속들이 스며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믿는 사람들은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되는겁니까? 어찌보면 쓰나미같은 세상에서 금방이라도 쓸려나갈 것같습니다. 세상의 가치와 문화에 굴복해 신앙을 타협하는 경우가 속출합니다. 이것이 두려워 세상과 단절한 채 겨우 자신만 지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믿는 사람은 세상 속에서 살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강해도 그 가운데서 생존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당당하게 살 수 있습니다. 세상이 짓밟으려고 해도, 별로 주목하지 않아도, 미워해도 계속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살 수 있습니다. 거대한 세상의 물결 속에서도 우리는 묵묵히 우리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가능합니다. 그 근거는 시편기자의 선포에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지키사 이 세대로부터 영원까지 보존하시리로다." 이 말씀을 믿습니까? 이 말씀대로 될 것입니다. 하나님, 이 세상에서 잘 생존하게 도와주십시오. 세상의 강하고 악한 물결 속에서도 타협하거나 도망치지 않게 해주십시오. 오늘도 세상 한복판에서 당신의 말씀을 좇아 살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삿 11-12장>
3/20/2024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시 12:6)
견디기 힘든 악한 말 몇가지가 있습니다. 그중에는 의도적인 거짓말이 있습니다. 앞에서 하는 온갖 아첨의 말이 있습니다. 뒤에서 쏟아내는 중상의 말도 그렇습니다. 대놓고 상처를 주는 독한 말도 있습니다. 이런 말에 당해본 사람은 그것이 얼마나 악한지를 압니다. 이것은 대개 악한 마음에서 나옵니다. 우리 말이 이렇다면 바로 회개해야 합니다. 이정도는 아니더라도 우리 말이 얼마나 쉽게 오염되는지 모릅니다. 아무리 애써도 우리 말에 거짓과 폭력이 슬쩍슬쩍 파고듭니다. 이것은 청결해지고 싶지만 우리 마음이 쉽게 오염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평소 하는 말에 불순물은 없는지 살펴보는 것이 지혜입니다. 잘된 말에도 몹쓸 것이 끼어드는 것을 늘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반면에 우리가 아무 의심없이 의지할 수 있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전혀 오염되어 있지 않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시편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같이 순결하다고 선포합니다. 이것은 불순물이 전혀 없는 완전한 순은을 말합니다. 고대에 은은 자주 금만큼이나 거래에서 가치있었습니다. 순은은 아마 최고의 거래수단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야말로 최고로 믿을만한 것입니다. 시편기자가 들은 말씀대로 하나님은 가련한 자와 궁핍한 자를 위하여 일어서실 것입니다. 약속하신대로 하나님은 그들을 반드시 안전 지대로 옮기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이 말씀에는 거짓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시겠다고 하신 것은 반드시 그렇게 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가 주님께 나아가면 쉬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반드시 용서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이 될 것입니다. 여호와를 우리 목자로 따르면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면 다른 모든 것은 따라올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믿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은 정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당신이 하신 말씀을 믿습니다. 당신의 말씀을 잘 깨닫게 해주십시오. 오늘도 당신의 말씀을 의지해서 살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삿 9-10장>
2/19/2024
"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들의 눌림과 궁핍한 자들의 탄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제 일어나 그를 그가 원하는 안전한 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 (시 12:5)
마음이 통하는 한사람이 귀합니다. 그와 함께하는 대화와 일이 얼마나 즐겁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과 마음이 통하는 사람은 어떻겠습니까? 하나님께도 그 한사람이 참 귀할겁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기뻐합니다. 또한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싫어합니다. 여기 시편기자가 이와같은 사람입니다. 시편기자는 경건한 자와 충실한 자가 없음을 탄식합니다. 이 탄식이 당신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시편기자는 거짓과 아첨과 이중적인 말로 이웃을 짓밟는 사람들에게 분노합니다. 이 분노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시편기자는 위태로운 하나님의 백성을 놓고 안타깝게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이 땅을 두루 살피며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이 시편기자에게 어떻게 반응하시는지 보십시오. 시편기자는 "여호와의 말씀에 ... 하시도다"라고 선포합니다. 그는 지금 여호와께 들은 말씀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는지는 모릅니다. 하나의 가능성은 하나님의 영의 진한 감동으로 어떤 특별한 메시지를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어찌됐든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을 그에게 더 열어 보여주셨습니다. 그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마음은 이런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은 가련한 자들의 눌림과 궁핍한 자들의 탄식을 알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르게 살면서 힘있고 부유한 사람들이 있을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대한 성실함으로 힘없고 가난하게 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의 아픔을 보십니다. 더우기 이들이 당하는 억울한 일도 아십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이제 일어나 행동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시기 전에 그 계획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행동은 가련하고 궁핍한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그가 원하는 안전지대에 두실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하나님이 친히 가련하고 궁핍한 자를 지켜주실 것입니다. 안타깝게 기도하면서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알면 이제 된겁니다. 그는 어떤 형편에서도 확신과 용기를 가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일어서실 때 함께 일어납니다. 지금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있습니까? 하나님, 당신의 마음을 알게 해주십시오. 당신의 마음으로 기도하게 해주십시오. 당신의 마음으로 일어나 행하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삿 7-8장>
3/18/2024
"여호와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니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의 혀가 이기리라 우리 입술은 우리 것이니 우리를 주관할 자 누구리요 함이로다" (시 12:3-4)
'풍전등화'란 '바람 앞의 등불'입니다. 이 말은 어떤 것이 아주 위태로운 상태에 있음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 처지가 '풍전등화'일 때가 있습니다. 외적으로는 무서운 핍박이 하나님의 백성을 치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같은 위기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내적으로는 우리 속에 스며든 세속적인 물결도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말씀을 버리고 세상의 가치를 따라 산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안타깝게도 심지어 세상 사람보다 훨씬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경건하고 신실한 자를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거짓과 아첨과 자랑의 말이 우리 가운데 꽤 흔합니다. 이런 말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잘 하고 있다고 믿기도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풍전등화의 위기입니다.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의 혀가 이기리라 우리 입술은 우리 것이니 우리를 주관할 자 누구리요 함이로다." 하지만 여기 한가닥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의 운명이 여기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이런 상황을 보고 탄식하는 한사람입니다. 바로 이 시편기자같은 사람입니다. 1절에서 그는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들이 인생 중에 없어지나이다"라고 절박하게 기도합니다. 3절에서 그는 "여호와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니"라며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자주 이런 한사람을 통해 새로운 일을 시작하십니다. 이런 한사람이 풍전등화인 하나님의 백성을 살릴 불씨가 되는겁니다. 시편기자처럼 탄식하며 기도하고 있습니까? 바로 거기서부터 하나님이 일하실 것입니다. 하나님, 당신의 백성 가운데서 잘못된 말을 제하여 주십시오. 저희 자신의 말이 정결해지게 하옵소서. 저희가 당신 앞에서 경건하고 신실한 사람으로 남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삿 5-6장>
3/16/2024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들이 인생 중에 없어지나이다 그들이 이웃에게 각기 거짓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 (시 12:1-2)
외부의 적은 늘 위협적입니다. 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내부의 적도 위험합니다. 자주 하나님의 백성은 내부의 적 때문에 망합니다. 가장 위험한 내부의 적은 역시 타락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높이지 않는 순간 타락이 시작됩니다. 하나님께 예배도 감사도 드리지 않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귀기울이지도 순종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을 찾아 기도하지도 않습니다. 그 마음에는 하나님보다 중요한 것이 가득합니다. 또한 타락한 하나님의 백성은 이웃을 잘못대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말'입니다. 원래 하나님의 백성에게 기대되는 '말'의 수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정직하고 바르고 투명한 말은 기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이 타락하면 거짓말과 아첨의 말과 이중적인 말을 합니다. 이것은 한 개인을 넘어 하나님 믿는 공동체의 문제입니다.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말이 타락하면 그 공동체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믿지 않는 세상에서 나오는 말은 원래부터 덜 신뢰하게 됩니다. 그런데 믿음의 공동체에 있는 형제 자매의 말이 세상 수준이나 그보다 못하다면 정말 심각합니다. 이 시편기자가 어떤 배경 가운데 있는지 모르지만 그가 탄식하는 것이 바로 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경건한 자와 충실한 자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그 마음이 청결하여 그 말도 청결한 사람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형제를 격려하고 돕고 유익하게 해야할 말이 속이는 도구가 된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무기력함 이면에 말의 타락이 있습니다. 교회만큼 말을 많이 하는 곳도 드뭅니다. 이 말들이 그리스도의 덕을 세우는 것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이 말들이 냄새나고 역겨운 것이면 얼마나 갑갑합니까? 오늘날 세상의 빛이 빛을 잃고 세상의 소금이 짠맛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가 하는 말부터 먼저 살펴보기 바랍니다. 가정과 교회에서 오가는 말도 살펴보십시오. 하나님, 저희 자신이 경건한 자와 충실한 자 되게 해주십시오. 저희 말에서 오염되고 냄새나는 것을 버리게 도와주십시오. 저희 말을 청결하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삿 1-2장>
3/15/2024
"악인에게 그물을 던지시리니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 그들의 잔의 소득이 되리로다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 (시 11:6-7)
위기를 우리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위기는 대개 우리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우리가 원하는 때에 우리가 기대하는 방식으로 일하시지 않습니다. 위기때 우리는 자주 안갯속에 갖힌 느낌입니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서도 확실한 것이 있습니다. 위기의 결과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좋을 것입니다. 시편기자도 지금 위기를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그에게 위기는 악인과 정직한 자를 확연하게 구분합니다. 만일 위기가 없다면 이렇게까지 구분되지는 않았을겁니다. 먼저, 악인에게는 결국 심판이 기다립니다. 우리가 애매히 받는 어려움은 악인의 잔혹함을 드러냅니다. 악인의 교만과 무도함은 우리의 심한 고난을 통해 더 잘 노출됩니다. 하나님은 마지막에 악인을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하지만 지금도 하나님과의 단절이라는 고통이 그 머리에 위에 머뭅니다. 반면에, 정직한 자는 하나님의 얼굴을 봅니다. 마지막에 우리는 적나라하게 하나님을 뵐겁니다. 하지만 지금도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에게 이것만큼 좋은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땅에서 애매히 어려움을 겪고 있어도 결과는 이렇게 좋습니다. 우리의 고통이 심할수록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갑니다. 위기는 피하고 싶은 어떤 것입니다. 하지만 위기 때문에 우리는 악인과 확실히 구분됩니다. 어찌보면 위기는 우리에게 어두움입니다. 그렇지만 위기때 우리는 점점더 빛 가운데로 나아갑니다. 홍해 앞에서 큰 위기를 만난 이스라엘 백성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지만 그들에게 이 위기는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보는 기회가 됩니다. 이때 그들을 쫓던 바로의 군대는 심판을 받고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위기 가운데 있습니까? 하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위기를 통해 당신을 보게 해주십시오. 악은 악으로 드러나 처리되게 하옵소서. 의는 의로 드러나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오늘의 성경읽기 수 23-24장>
3/14/2024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 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고 악인과 폭력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시도다" (시 11:4-5)
관점이란 어떤 것을 보거나 생각하는 방향입니다. 관점에 따라 행동과 결과가 달라집니다. 위기에 대한 두가지 관점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인간적인 관점입니다. 여기서는 다윗의 조언자들이 위기를 보는 관점입니다. 그들에게 이 위기는 당황스럽고 두렵고 괴로운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언제든 끔찍한 일을 당할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그들이 하는 일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위기는 그들에게 좌절과 낙심과 실패일뿐입니다. 그들은 이 위기를 빠져나가기 위해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합니다. 우리 대부분은 위기를 이렇게 봅니다. 막상 위기를 당하면 우리도 예외가 아닐겁니다. 자연히 우리는 사람들이 하는 얘기에 귀를 기울입니다. 여기서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위기를 당하면 이런 인간적인 관점이 모두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또다른 관점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관점입니다. 하나님 믿는 사람은 위기를 다르게 봅니다. 그는 위기 중에도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라고 고백합니다. 자신은 위기에 흔들리고 있지만 하나님은 변함없이 주권자와 통치자로 계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인생에게 일어나는 모든것을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그냥 구경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잘잘못을 보고 계십니다. 당신은 의인이 당한 위기와 고통을 긍휼의 눈으로 보십니다. 반면에 의인을 괴롭히는 악인의 행동을 미움의 눈으로 보십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위기를 보기 바랍니다. 우리는 은혜로 이 관점을 갖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위기 중에도 전혀 새로운 태도를 갖게 됩니다. 두려움 가운데서도 용기가 생깁니다. 괴로운 중에도 인내합니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평강이 찾아옵니다. 이제는 좌절과 패배감을 딛고 벌떡 일어납니다. 우리에게 위기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입니다. 사람을 완전히 망가뜨릴 것 같던 위기가 연단의 계기가 됩니다. 위기에 대한 인간적인 관점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거슬러 하나님의 관점을 갖기 바랍니다. 여기서 끔찍한 위기가 축복으로 바뀝니다. 하나님, 위기에 대한 인간적인 관점을 뛰어넘게 해주십시오. 은혜를 주셔서 당신의 관점으로 위기를 다루게 해주십시오. 오늘 저희의 위기가 오히려 축복이 되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수 21-22장>
3/13/2024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에게 새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찌함인가 악인이 활을 당기고 화살을 시위에 먹임이여 마음이 바른 자를 어두운데서 쏘려 하는도다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 (시 11:1-3)
위기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 있나요? 흔들리지 않기를 원하지만 실제로는 누구나 흔들립니다. 물론 사람마다 상황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겁니다. 하지만 위기를 당하면 우리는 쉽게 당황하고, 두려워하고, 괴로워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잘못입니까? 위기에도 무슨 기계처럼 전혀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까? 그렇다면 시편에 나오는 많은 탄식과 갈등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경우가 좀 다르지만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어떻습니까? 여기 시편기자는 분명히 하나님을 신실하게 의지하고 있습니다. 어떤 상황인지는 모르지만 그는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그때 그는 확실히 하나님께 피했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그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그를 흔드는 유혹과 도전이 있습니다. 여기 시편기자가 다윗이라면 그를 흔드는 것은 가까이 있는 부하나 친구였을겁니다. 그들은 지금 심한 절망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들은 끔찍한 암살이 순식간에 알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회의 법과 질서가 뒤집어진 상황에서 다윗같은 의인이 뭘하든 아무 소용이 없다고 느꼈습니다. "악인이 활을 당기고 화살을 시위에 먹임이여 마음이 바른 자를 어두운데서 쏘려 하는도다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 이 구절은 겁먹고 패배의식에 빠진 조언자들이 다윗 주위에서 하는 말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들은 지금 다윗에게 다른 피난처로 도망할 것을 조언합니다. 이대로 있다가는 정말 큰일나겠다는 조바심에 다윗을 재촉했을겁니다. 이 지점에서 다윗도 물론 흔들렸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의 조언대로 도망칠 것인가 아니면 그대로 여호와께 피할 것인가?' 위기를 만나면 사람들의 말에 귀가 솔깃해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함께 위기를 겪는 사람들의 말이라면 더 마음이 쏠립니다. 하지만 여기서 분명히 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위기를 보는 관점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인간적인 관점에서만 위기를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감은 되지만 그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나온 조언이 한계있는 이유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우리의 선택은 확실합니다. 우리는 이런 조언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희가 사람들의 말만 좇아 살지 않게 해주십시오. 매순간 당신을 의지하며 살게 해주십시오. 특히 위기 가운데서 당신께 피하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수 19-20장>
3/12/2024
"여호와께서는 영원무궁하도록 왕이시니 이방 나라들이 주의 땅에서 멸망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고아와 압제 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가 다시는 위협하지 못하게 하시리이다" (시 10:16-18)
산다는 것이 전쟁입니다. 내외적인 공격이 그칠 줄 모르고 계속됩니다. 언제 어디서 무슨일이 터질지 모르는 긴장이 있습니다. 대개 대적은 악하고, 강하고, 교활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억울하게 당할 때가 많습니다. 시편기자의 상황이 이것을 그림처럼 보여줍니다. 여러 이방 나라들이 호시탐탐 주의 백성을 노리고 있습니다. 자주 국지적인 싸움이 벌어집니다. 그러다가 여러 나라가 연합하여 대대적으로 공격해 오기도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전쟁에는 큰 긴장과 상처가 따릅니다. 하지만 시편기자에게 전쟁의 결론은 분명합니다. 전쟁에서 주의 백성은 반드시 승리합니다. 그는 공격해 오는 "이방 나라들이 주의 땅에서 멸망하였나이다"라고 결론짓고 있습니다. 전쟁의 승리는 '영원무궁하도록 왕이신 여호와'때문에 확실합니다. 우리에게 힘든 전쟁이 계속되겠지만 결국 승리는 우리 것입니다. 최종적인 심판이 내려지면 대적은 더이상 우리를 위협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 때에는 더이상 전쟁도, 긴장도, 상처도, 눈물도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최종적인 승리가 보장된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우리의 현실이 편안한 것은 아닙니다. 최후 승리와 우리의 현실 사이에 거리가 있습니다. 이 둘 사이에 우리의 혼란과 실패와 연약함과 아픔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 기간을 통과해야 할까요?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우리의 왕이신 주님의 힘으로 싸우는 것입니다. 여기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라는 표현을 주목하십시오. 이것은 '그들의 마음을 강건하게 하시며'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겸손히 당신을 의지하는 자의 마음을 강하게 하십니다. 신약적으로 보면 '주님의 은혜로 마음이 강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전쟁의 압박을 견딜 수 있습니다. 또한 이것으로 전쟁의 상처와 고통을 감당합니다. 이 마음으로 우리는 마지막까지 흔들림없이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주님, 저희의 최후 승리를 믿습니다. 지금 저희 마음을 은혜로 강하게 하옵소서. 저희 앞에 있는 전쟁의 압박과 고통을 잘 헤쳐나가게 하옵소서.
<오늘의 성경읽기 수 15-17장>
3/11/2024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주는 재앙과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이시니이다 악인의 팔을 꺾으소서 악한 자의 악을 더 이상 찾아낼 수 없을 때까지 찾으소서" (시 10:14-15)
거리낌없이 나쁜짓하는 악인이 있습니다. 그는 잘못이 없는 사람에게 재앙과 원한을 남깁니다. 그는 '하나님이 보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자신감과 잔혹함은 여기서 나옵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런 악인을 대적할 수 있을까요? 우리 힘으로 그의 기세와 잔인함을 막기는 어려울겁니다. 하지만 그의 강력한 무기를 꺾는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그가 가진 무기의 헛점을 파고드는 것입니다. 여기 시편기자가 싸우는 방식이 이것입니다. 바로 "주께서는 보셨나이다"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지 않는다'고 하는 자의 공격에 '하나님이 보셨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보신 것을 어떻게 압니까? 바로 '믿음으로' 압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는 바를 붙들고 싸웁니다. 우리는 악인이 우리에게 나쁜짓하는 것을 하나님이 다 보신 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그때문에 애매하게 고통받는 것도 하나님이 보신 것을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당신의 손으로 갚으실 것도 믿습니다. 하나님은 힘없는 연약한 자를 반드시 도우실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더나아가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악인의 팔을 꺾으소서 악한 자의 악을 더 이상 찾아낼 수 없을 때까지 찾으소서." 하나님께 악인의 완전한 패배를 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악인의 악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찾으셔서 완벽한 심판을 내리시도록 구합니다. 그때가 되면 악인은 결국 '하나님이 다 보셨다'고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 이전에 이 사실을 깨달았더라면 아마 그는 돌이킬 기회를 가졌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마지막 심판 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다 보고 계시는 것을 믿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은밀한 가운데 행하는 나쁜짓을 보고 계십니다. 또한 우리의 억울한 괴로움도 다 보십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악인의 나쁜짓도 보십니다. 오늘도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의 눈 앞에서' 살 것입니다. 하나님, 저희를 보고계심을 믿습니다. 단 하나도 예외없이 모든 나쁜짓을 보고계십니다. 저희가 오늘 이 믿음으로 바른길 가며 어떤 악한 공격도 물리치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수 12-14장>
3/9/2024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들을 잊지 마옵소서 어찌하여 악인이 하나님을 멸시하여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주는 감찰하지 아니하리라 하나이까" (시 10:12-13)
악인이 퍼붓는 저주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의 속임수와 폭압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교묘한 말의 공격은 어떻게 대항해야 합니까? 저주에는 저주로, 폭압은 폭압으로 맞서야 합니까? 우리에게는 싸우는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믿음으로' 싸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방법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싸우면 절대 지지 않습니다. 싸울 때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먼저,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대적의 강력한 무기는 '하나님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어떻게든 이것을 설득하려고 합니다. 만일 이 공격에 우리가 무너지면 싸움은 그대로 끝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없다'고 인정하거나 의심하게 되는 상황을 상상해 보십시오. 이것이야말로 핵폭탄을 맞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하지만 너무 당연하게도 하나님이 계십니다. 이 사실을 끝까지 붙들면 우리는 반드시 이깁니다. 또한,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는 것입니다. 대적은 하나님이 우리의 고통에 아무 관심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 이렇게 내버려 둘 수 있겠는가라고 주장합니다. 사실 하나님의 행동이 보이지 않을 때 그 말에 귀가 솔깃해집니다. 만일 이 공격을 견디지 못해 낙심하는 순간 우리는 싸움에 지고 맙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으면 이길 수 있습니다. 이것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시편기자처럼 "...일어 나옵소서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들을 잊지 마옵소서"라고 간구합니다. 그의 기도는 '아니면 말고' 식으로 그냥 해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반드시 도우신다는 확신으로 매달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믿음으로 싸우면 이 싸움은 더이상 우리 자신의 싸움이 아닙니다. 이것은 이제 하나님의 싸움이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싸움에서 승리할 것을 확신합니다. 하나님, 당신이 계신 것을 믿습니다. 당신은 저희의 곤경을 돕는 분이심을 믿습니다. 오늘 당신의 능력으로 대적의 어떤 공격에도 승리하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수 8-9장>
3/8/2024
"그가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니님이 잊으셨고 그의 얼굴을 가리셨으니 영원히 보지 아니하시리라 하나이다" (시 10:11)
사회심리학의 이론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사람은 옳게 되는 것보다는 스스로 옳다고 믿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흡연자가 금연하는 대신에 담배 연기의 폐해가 생각보다는 크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드는 이유 중 하나가 담배 피운다고 다 폐암 걸리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소위 '자기 정당화'입니다. 어떤 사람은 나쁜짓하고도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행동이 나쁜짓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자신의 행동을 고치려는 생각도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자신의 행동이 옳다고 주장합니다. 여기 시편기자는 악인이 바로 그렇다고 호소합니다. 악인은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그는 아무 잘못없는 사람을 속이고 저주하고 짓밟습니다. 그런데 그의 눈에는 하나님이 의인의 고통에 아무 상관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이 애매히 고통받는 의인을 잊어버리신 것같습니다. 아무리 자신이 의인을 괴롭혀도 하나님이 영원히 보지 않으시는 것같습니다. 바로 여기서 악인은 자기를 정당화합니다. '하나님이 없는게 맞아. 있어도 무심하거나 무기력할 뿐이야. 애매히 고통받는 의인을 보시지도 않아. 하나님은 그의 아픔에 아무 상관도 안하셔. 내가 이렇게 했는데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아. 나는 여전히 잘 나가고 있어. 뭐가 문제야?' 어떻게 생각하면 빈틈없는 논리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의인의 고통에 즉각 반응하지 않으실 때가 있습니다. 또한 악인의 나쁜짓을 즉각 심판하지 않으실 때도 있습니다. 따라서 악인은 확신을 가지고 나쁜짓을 계속합니다. 심지어 의인도 애매한 고통 중에 하나님께 섭섭해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의인이 악인의 논리와 위세에 눌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사실(fact)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의인의 고통을 보고 계십니다. 당연히 악인의 나쁜짓도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께는 그의 나쁜짓은 언제나 나쁜짓입니다. 악인이 무슨 논리로 자신을 정당화해도 그렇습니다. 스스로 어떻게 믿든 그 사실은 변치 않습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옳은 것을 너무 믿지 마십시오. 하나님도 그것을 옳다고 생각하시는지를 물어보십시오. 하나님, 나쁜짓은 나쁜짓으로 다 드러나게 해주십시오.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당하는 애매한 고통을 돌아보아 주십시오. 나쁜짓을 정당화하며 잘못을 행하는 저희의 성향을 고쳐 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수 5-7장>
3/7/2024
"그의 입에는 저주와 거짓과 포악이 충만하며 그의 혀 밑에는 잔해와 죄악이 있나이다 그가 마을 구석진 곳에 앉으며 그 은밀한 곳에서 무죄한 자를 죽이며 그의 눈은 가련한 자를 엿보나이다 사자가 자기의 굴에 엎드림같이 그가 은밀한 곳에 엎드려 가련한 자를 잡으려고 기다리며 자기 그물을 끌어당겨 가련한 자를 잡나이다 그가 구푸려 엎드리니 그의 포악으로 말미암아 가련한 자들이 넘어지나이다" (시 10:7-10)
불이 얼마나 무섭습니까? 불에 데어본 사람은 잘 압니다. 그러니 화재를 당한 사람은 어떻겠습니까? 하지만 꼭 겪어봐야 이것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불이 남긴 참화가 도처에 있기 때문입니다. 악도 마찬가지입니다. 악이 남긴 상처가 곳곳에 가득합니다. 우리 자신이나 가족에게 상처가 있습니다. 가까운 친구나 이웃이 이 상처로 고통합니다. 악에게 상처받고 절규하는 아이, 젊은이, 어른이 있습니다. 악은 우선 악인에 의해 저질러집니다. 악인은 악행이 인격이 되어버린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없다고 믿습니다. 그는 선악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을 거부합니다. 그가 하나님과 상관없이 행하는 것이 다 악입니다. 그의 악행은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아울러 그것은 다른 사람을 파괴합니다. 심지어 가장 가까운 사람까지 저주와 거짓과 포악으로 짓밟습니다. 그가 지나는 길에는 상처받은 사람들이 가득합니다. 악은 악인뿐만 아니라 악한 습관, 가치, 사상, 풍속을 통해서도 옵니다. 이것은 마치 불난 집에 가득찬 연기처럼 치명적입니다. 나아가 모든 악의 배후에 악한 영적 세력이 있습니다. 시편기자는 이 악을 사자와 어부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사자에게 물린 동물이나 어부의 그물에 걸린 고기를 상상해 보십시오. 따라서 우리가 세상을 너무 낙관적으로 보는 것은 문제입니다. 악의 존재와 그것이 남기는 상처를 직시하십시오. 매순간 깨어 대비하지 않으면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이 당하고 맙니다. 하지만 우리는 악에 대해 지나치게 위축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삼으신 것을 기억하십시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따른다면 악이 횡행하는 세상에 소망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악을 정확하게 분별하게 해주십시오. 악에 빠지지도 당하지도 않게 해주십시오. 오늘 소금과 빛으로서 악을 제어하고 상처를 돌아보게 하옵소서.
<오늘의 성경읽기 수 1-4장>
3/6/2024
"그의 길은 언제든지 견고하고 주의 심판은 높아서 그에게 미치지 못하오니 그는 그의 모든 대적들을 멸시하며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나는 흔들리지 아니하며 대대로 환난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나이다" (시 10:5-6)
흔한 착각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없다는 착각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 계신 증거가 어디 있느냐고 묻습니다. 하지만 사실 하나님 안계신 증거가 어디 있습니까? 이것은 증거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믿으면 하나님이 정말 안계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두번째는 번영과 행복이 마냥 계속될 거라는 착각입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믿으면 쉽게 이런 착각에 빠집니다. 나쁜짓하고도 잘나가는 사람은 자주 이렇게 생각합니다. '누가 내 길을 막아서겠는가? 누가 감히 나를 대적하겠는가? 내 길은 지금까지 견고하지 않았는가? 내 길을 허물 것은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심판도 별 문제 아닙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심판이 무슨 대수입니까? 하나님을 종이 호랑이처럼 무시하는 사람이 심판을 두려워하겠습니까? 그가 누리는 번영과 행복은 언제나 계속될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결코 흔들리지도 실패하지도 어려움을 당하지도 않을 것같습니다. 이것은 그 자신의 확신이며 동시에 그를 보는 많은 사람들의 확신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분명히 이것도 착각일뿐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해도 하나님은 계십니다. 아무리 악인의 번영과 행복이 견고해도 영영 계속되지는 않습니다. 엄청난 제국들도 결국 허물어지는 것이 역사의 증거입니다. 대단한 사람의 위세도 오래 가지 못합니다. 더우기 악인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합니다. 그가 아무리 부인하고 비웃어도 하나님의 심판은 그 머리 위에 있습니다.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 하지 마십시오. 그 위세에 기죽지도 마십시오. 악인의 자신감에 현혹되지도 마십시오. 그것은 착각일뿐입니다. 그것은 비눗방울같이 허무하게 터집니다. 반면에 하나님 믿는 삶은 어떻습니까? 얼마나 견고하고 확실합니까? 이것은 우리의 형편에 상관없이 언제나 그렇습니다. 하나님, 악인의 형통에 위축되지 않게 해주십시오. 그 길의 결국을 정확히 보게 하옵소서. 저희는 오늘도 묵묵히 당신의 길을 가게 하옵소서.
<오늘의 성경읽기 신 33-34장>
3/5/2024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시 10:4-5)
편하게 나쁜짓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 하면 됩니다. 또는 아무도 안본다고 생각하고 하면 됩니다. 맘껏 악을 행하려면 먼저 처리할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지워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면 나쁜짓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쳐다보시는데 어떻게 쉽게 악을 행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존재가 어른거리는한 나쁜짓이 자유롭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흔적을 지우기 시작합니다. 갖가지 이유를 다 동원해서 '하나님은 없다'고 믿는겁니다. 모든 생각에서 하나님 흔적을 밀어냅니다. 온갖 감정으로 하나님을 부정합니다. 나아가 '하나님이 없다'고 사람들을 설득합니다. 어느새 다수가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만일 누구든 하나님 얘기를 꺼내면 바보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리고 편안하게 악을 행합니다. 하나님 없으면 이것은 더 이상 악이 아닙니다. 과거 많은 끔찍한 학살 뒤에는 이런 '하나님이 없다'는 사상이 있었습니다. 지금 횡행하는 악 뒤에도 '하나님이 없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이런 믿음은 다양한 모양으로 나타납니다. 즉, '하나님은 죽었다', '하나님은 무심하다', '하나님은 무능하다', 등등입니다. 시편기자도 악인의 실체를 이렇게 고발합니다.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한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악인이 뭐라고 말하든 뭘 믿든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함께 하든 상관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살아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세상의 악에 대응해야 할까요? 바로 이 사실에서 시작하면 됩니다. 하나님이 계십니다! 여기에 악인의 헛점이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악을 거절할 근거가 있습니다. 하나님, 당신은 살아계십니다. 악은 어떤 모양이든 거절하게 해주십시오. 선으로 악을 이기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신 32장>
3/4/2024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악한 자가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압박하오니 그들이 자기가 베푼 꾀에 빠지게 하소서" (시 10:1-2)
악의 문제는 현실입니다. 하지만 결코 만만한 문제가 아닙니다. 흔히 악은 자신의 정체를 교묘히 숨깁니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이나 제도나 문화 속에 박혀 있습니다. 자주 사람들은 마치 악이 없는 것처럼 느낍니다. 그들은 별 의식없이 악을 행합니다. 또한 악으로 인한 상처에 대해서도 무심합니다. 하지만 악이 그 무시무시한 이빨을 드러낼 때도 있습니다. 악은 여러 얼굴로 다가와 사람을 상하게 합니다. 이것은 전쟁이나 폭정이나 압제로 오기도 합니다. 이것은 속임이나 폭력이나 조롱이나 핍박으로 올 수도 있습니다. 많은 경우 악은 거세고 질기고 잔인하게 사람을 유린합니다. 악이 역사하는 자리에는 끔찍한 상처가 남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이 상처는 평생의 한이 됩니다. 악에 상처입는 사람이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이것은 악의 전횡으로 사람들이 상처받는 것을 보는 사람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지금 하나님은 왜 가만히 계시는가?'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 묻는 것입니다. '하나님, 당신은 지금 살아 계십니다. 당신은 당신의 백성을 사랑하십니다. 당신은 악을 미워하십니다. 당신은 악으로 인한 고통을 아십니다. 그런데 왜 악을 그냥 두십니까? 악에게 당한 상처를 내버려 두십니까?' 여기 시편기자도 이렇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어찌 멀리 계시며 어찌 이 어려울 때 숨으십니까? 악한 자가 무도하게 연약한 자를 압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주 이 질문에 대한 시원한 대답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런 질문이 아무 소용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 질문을 통해 하나님을 찾는 것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구하는 것은 '왜?'라는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설명이 아닐겁니다. 오히려 신속한 하나님의 행동입니다. 이 질문을 통해 우리는 '지금 너무 힘들다'고 호소합니다. 하나님 없이는 못살겠다고 절박하게 매달립니다. 틀림없이 악이 있습니다. 악이 가하는 상처와 고통이 있습니다. 어찌보면 이것만 있는 것같습니다. 하지만 틀림없이 우리 하나님이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질문할 수 있습니다. 질문을 통해 호소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당신을 간절히 구합니다. 악이 횡행하는 세상에서 저희를 지켜주옵소서. 악으로 인해 받는 상처를 살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신 29-31장>
3/3/2024
"여호와여 일어나사 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이 주 앞에서 심판을 받게 하소서 여호와여 그들을 두렵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이 자기는 인생일 뿐인 줄 알게 하소서" (시 9:19-20)
우리는 '인생(인간)'일 뿐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모두다 아는 것은 아닙니다. 너무 당연한 이 사실을 모르고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높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대단히 지혜롭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오히려 어리석게 될 뿐입니다. 그의 눈은 어두워집니다. 그는 결국 인간의 존엄성을 잃고 헛된 것에 매달리는 우스운 꼴로 전락합니다. 그의 삶에서 하나님의 도덕은 산산조각 납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파탄과 상처뿐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정말 심각한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평생 자신이 '인생'일 뿐임을 알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심판 때는 그렇게되지 않는다는 것입니 다. 시편기자의 기도에 이것이 잘 나와 있습니다. 지금 시편기자 앞에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불의로 하나님의 사람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그들은 거침없이 악행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지금 시편기자는 그들이 심판받기를 간청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기도는 예언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들의 심판은 '주 앞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들은 심판주 하나님 앞에 반드시 서게 됩니다. 그들은 평생 무시하고 대적했던 하나님을 그 자리에서 알게 됩니다. 그들에게 그 하나님은 정말 두려운 분일 것입니다. 그들의 두려움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난 이사야의 탄식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5). 또한 그들은 결국 하나님 앞에서 '자기는 인생일 뿐인 줄 알게' 됩니다. 하지만 그때는 너무 늦게 됩니다. 이제 그들에게는 무서운 심판만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자신이 '인생'일 뿐임을 알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자신이 '인생'일 뿐임을 모르는 사람들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고 있습니까? 그들에게 너무 주눅들지 마십시오. 그들의 결국을 생각하며 오히려 불쌍히 여기십시오. 하나님, 저희가 '인생'일 뿐임을 알게 해주십시오. 매순간 당신을 하나님으로 의지하게 해주십시오. 자신이 지금 '인생'일 뿐임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자신을 알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신 25-27장>
2/29/2024
"이방 나라들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짐이여 자기가 숨긴 그물에 자기 발이 걸렸도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알게 하사 심판을 행하셨음이여 악인은 자기가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혔도다 악인들이 스올로 돌아감이여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이방 나라들이 그리하리로다" (시 9:15-17)
악담이나 저주는 죄입니다. 그렇다면 시편에 나오는 저주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시편기자는 지금 자신의 대적을 혹독하게 저주하고 있습니다. 만일 이 시편기자가 다윗이라면 그 대적은 아마 시리아와 암몬 연합군이나 블레셋일겁니다. 그는 그 대적을 '악인'과 '하나님을 잊어버린' 이방 나라로 규정합니다. 그들은 웅덩이를 파고 그물을 숨기는 등 그 손으로 온갖 책략을 행합니다. 그들은 악할뿐만 아니라 교활하기도 합니다. 악한 사람이 머리까지 비상하면 어떻게 됩니까? 요리에 쓸 예리한 칼이 그들의 손에서 나쁘게 사용되는 격입니다. 그들에게 한번 걸려들면 거미줄에 엉킨 곤충처럼 위험합니다. 이 저주의 시에는 몇가지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먼저, 이 저주는 죄와 악에 대한 분노입니다. 이것은 '의로운 분노'입니다. 죄와 악을 보고도 무심한 것은 문제입니다. 눈앞에 횡행하는 악에 대해 아무 느낌이 없다면 그것은 또다른 악입니다. 둘째로, 이 저주는 예언적인 표현입니다. 저주에 담긴 내용은 미래에 반드시 이루질 것입니다. 지금 당장은 기고만장해도 악은 꼭 심판받을 것입니다. 사람을 헤치는 자들은 심판 때 반드시 정죄받을 것입니다. 셋째로, 이 저주는 하나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죄와 악에 대해서는 이렇게 단호하십니다. 사람이 아무리 꾀를 써도 불꽃같은 하나님의 눈을 속이지 못합니다. 바다같이 넓은 마음을 가지신 하나님도 죄와 악과는 타협하지 않으십니다. 넷째로, 이 저주는 하나님이 행하실 일입니다. 저주에 담긴 내용은 우리가 나서서 할 일이 아닙니다. 보복은 우리 손이 아니라 하나님 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지금 당하는 불의한 일을 반드시 갚아 주십니다. 지금도 도처에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대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악인일수도, 악한 가치와 구조일수도, 악한 영적 세력일수도 있습니다. 이 대적에 의해 애매한 고통을 겪고 있습니까? 이에 대해 분노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그 대적의 결국에 대해 확신을 가지십시오. 지금은 힘들어도 인내하며 묵묵히 의로운 길을 가십시오. 하나님, 당신은 죄와 악에 대해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당신은 지금 횡행하는 죄와 악을 반드시 정죄하실 것입니다. 저희가 겪는 억울한 고통을 잘 견디게 해주십시오. 오늘 죄와 타협하지 않고 바르게 행하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신 19-21장>
3/1/2024
"궁핍한 자가 항상 잊어버림을 당하지 아니함이여 가난한 자들이 영원히 실망하지 아니하리로다" (시 9:18)
우리 주님은 공의로우십니다. 따라서 최소 두가지는 확실합니다. 먼저, 악인은 반드시 멸망합니다. 주님을 거역하고도 승승장구할 수 있습니다. 나쁜짓을 하고도 아무 탈없이 지나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항상 그렇게 되지는 않습니다. 죄악이 영원히 승리하지는 못합니다. 이것이 악인의 피하지 못할 운명입니다. 또한, 의인은 반드시 구원받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어려움을 겪습니다. 나쁜 것을 거절하는 바람에 왕따와 불이익을 당합니다. 옳은 것을 행하다가 많은 화를 당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 또한 항상 그렇게 되지는 않습니다. 주님의 사람이 영원히 패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의인의 결국입니다. 여기 시편기자의 확신도 이것입니다. 그는 '궁핍한 자' '가난한 자'의 운명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가난한 자'는 실제로 가난한 사람일 것입니다. 이것은 물질적으로 가진 것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초라하고 약한 처지입니다.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는 상태입니다. 그가 이렇게 된 것은 주님을 신실하게 따른 결과일 수 있습니다. 아니면 이런 처지때문에 절박하게 주님을 구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시편기자는 지금 이런 괴로움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계속 될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그의 고백처럼 궁핍한 자가 항상 잊혀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이 영원히 실망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주님은 그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은 그를 실망 가운데 영영 내버려두지 않으실겁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공의로우시기 때문입니다. 시편기자처럼 이것을 확신합니까? 그렇다면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죄악의 기세에 기죽지 마십시오. 애매한 고통에 너무 억울해 하지도 마십시오. 오히려 오리를 가자면 십리를 가고, 오른 뺨을 치면 왼 뺨도 돌려대고, 원수도 사랑하고, 악을 선으로 갚으십시오. 주님, 저희 괴로움을 돌아보아 주십시오. 저희의 결국을 알고 오늘도 잘 견디게 해주십시오. 이런 상황에도 주님 가르침을 적극적으로 행하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신 22-24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