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1/2024
"나는 나의 완전함에 행하오리니 나를 속량하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발이 평탄한 데에 섰사오니 무리 가운데에서 여호와를 송축하리이다" (시 26:11-12)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스스로 완전하다고 믿어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 눈에 완전하게 보인다고 정말 완전합니까? 오히려 다들 연약함과 실수 투성이라고 하는게 맞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 모세, 엘리야, 바울 등등의 생애를 보십시오. 누가 자신을 완전하다고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여기 다윗은 "완전함"으로 자신을 설명합니다. 이 시편을 시작하면서 그는 그동안 완전했다고 선언했습니다. 여기서는 앞으로도 "완전함에" 행하겠다고 다짐합니다. 정말 다윗의 생애가 완전했습니까? 그에게 있었던 치명적인 연약함과 실패는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완전함"으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분명히 그것은 '아무 흠이 없는 상태'는 아닙니다. 오히려 '전심으로 주님을 의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윗은 지금까지 전심으로 주님을 의지했습니다. 이제 앞으로도 그렇게 주님을 의지할 것입니다. 그의 완전함은 자기 열심이 아니라 주님때문입니다. 지금 다윗은 주님의 속량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님이 댓가를 지불하시고 구해주시지 않으면 안되는 처지에 놓인 것입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이 베푸시는 은혜였습니다. 아울러 그는 주님때문에 자기 발이 안전할 것을 확신했습니다. 따라서 그가 할 것은 주님을 송축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완전함은 이렇게 범사에 주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흠많은 인간입니까? 하지만 다윗처럼 주님을 의지할 수 있습니다. 슬프고 속상할 때 어떻게 합니까? 주님을 의지합니다. 걱정거리가 많아도 주님을 의지합니다. 우울하고 힘들 때도 주님을 의지합니다. 위험이 닥쳐도 주님을 의지합니다. 인내가 필요할 때도 주님을 의지합니다. 편안하고 좋아도 주님을 의지합니다. 감사거리를 가지고 주님께 나아갑니다. 즐거운 찬양으로 주님을 찬양합니다. 어처구니 없는 잘못을 저지르면 어떻게 합니까? 그때도 주님께 두손 들고 나아갑니다. 이 하루도 주님께 의지합니다. 까다로운 문제도 주님께 의지합니다. 오늘 우리는 아무 흠없이 살지는 못할겁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든 흔들림없이 주님 의지할 수는 있습니다. 주님, 전심으로 당신을 의지합니다. 오늘 무슨 일이 있을런지 모릅니다. 하지만 매순간 당신을 의지하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사 64-66장>
7/30/2024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 그들의 손에 사악함이 있고 그들의 오른손에 뇌물이 가득하오나" (시 26:9-10)
단체기합이란 것이 있습니다. 옛날 학창시절이나 군대시절의 한 추억거리입니다. 형제 많은 가정도 예외가 아닙니다. 한두 사람이 잘못해도 전체가 벌을 받는 것입니다. 한두 사람의 잘못도 공동책임이라는 의식을 심어주는 따끔한 교육방식입니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잘못을 미리 일깨워주는 효과도 있습니다. 그때는 아무 잘못이 없어도 큰 불평없이 기합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기합이 아니라 형벌이면 어떻게됩니까? 형벌의 경우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죄지은 사람과 죄없는 사람이 어떻게 똑같이 취급됩니까? 죄도 경중에 따라 구분해서 다루어져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것이 제대로 되는 사회가 공의로운 사회입니다. 아무 죄없이 죄인들과 함께 정죄받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갑갑하고 억울하겠습니까? 안타깝게도 이런 경우가 곳곳에서 적지 않게 일어납니다. 그런데 가끔 오랜 세월의 호소와 투쟁 끝에 누명을 벗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기 다윗은 또다른 차원에서 주님께 호소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죄인들과 함께 거두지 말아달라는 것입니다. 그 근거는 자신은 죄인들과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미 자신이 얼마나 성실한지를 밝힌 바 있습니다. 그가 흔들림없이 주님을 의지한 것은 주님이 아시는 바입니다. 또한 그는 죄인들과 어울리는 것을 미워했습니다. 대신에 성소에서 주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사랑했습니다. 어느모로 보나 그는 죄인들과 분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과 함께 정죄받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라는겁니다. 그는 주님께 호소합니다.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 여기서 "거둔다"는 말은 "버리기 위해 쓸어 모으는 것"입니다. 마치 쓰레기를 모아서 버리는 것같은 심판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죄인들이 어느날 순식간에 심판받을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날에 자신의 운명도 주님 손에 달려있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주님의 공의도 믿고 있었습니다. 그 공의에 비추어볼 때 주님은 자신을 죄인들과 함께 심판하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떻습니까? 심판받지 않을 유일한 근거가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인으로 믿고 있습니까?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죄를 용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를 심판에서 자유롭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당신의 용서받은 자녀답게 살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사 60-63장>
7/29/2024
"여호와여 내가 무죄하므로 손을 씻고 주의 제단에 두루 다니며 감사의 소리를 들려주고 주의 기이한 모든 일을 말하리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서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머무는 곳을 사랑하오니" (시 26:6-8)
여름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름만 되면 신기하게 힘이 솟고 즐겁습니다. 혹 그가 여행하게 되면 틀림없이 따뜻한 곳을 선택할겁니다. 다른 사람에게 이것은 깜짝 놀랄 일입니다. 사람마다 이렇게 다릅니다. 자연히 그가 선택하는 것도 다릅니다. 어떤 사람이 뭘 선택하는지를 보십시오. 그가 뭘 좋아하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그 속에서 그를 움직이는 가치도 보게 됩니다. 갑자기 하루의 자유시간이 생겼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이 하루를 어떻게 보내게 될까요? 여기서 뭘 선택하는지에 그 사람의 가치가 담겨있습니다. 여기 다윗의 선택을 보십시오. 다윗이 이전 구절에서 한 고백입니다.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동행하지도 아니하리이다 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 악한 자와 같이 앉지 아니하리이다" (시 4-5절). 그는 악한 자의 모임을 미워했습니다. 따라서 그들과 어울리기를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이렇게 악을 미워하는 것이 다윗의 가치입니다. 하지만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가 또다른 선택을 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서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머무는 곳을 사랑하오니." 다윗이 사랑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소입니다. 그는 기회만 되면 성소로 달려갔을겁니다. 그 이유는 그곳이 "주께서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머무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성소에 가서 주님 만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성소에서 자신을 정결하게 하며 예배를 준비합니다. 많은 감사와 찬양의 제목을 아뢰며 예배를 드립니다. 그에게는 성소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이 즐거움입니다. 그는 성소에 모여드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렇게 주님 만나는 것을 사랑하는 것이 그의 가치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님을 만납니다. 주님 만나는 것을 사랑합니까? 주님께 감사와 찬양드리는 것이 좋습니까? 주님의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 기쁩니까? 주님을 알아가는 것이 즐겁습니까? 주님, 지금 당신께 나아갑니다. 당신과 함께 하는 것을 사랑하게 해주십시오. 당신의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사 57-59장>
6/29/2024
"세상의 모든 풍성한 자가 먹고 경배할 것이요 진토 속으로 내려가는 자 곧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도 다 그 앞에 절하리로다 후손이 그를 섬길 것이요 대대에 주를 전할 것이며 와서 그의 공의를 태어날 백성에게 전함이여 주께서 이를 행하셨다 할 것이로다" (시 22:29-31)
인생이 잠시 피었다 사라지는 들풀같습니다. 이런 면에서 짧고 허무한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하지만 다른 면도 있습니다. 이런 들풀도 자기 몫의 역할이 있습니다. 더우기 들풀은 다음해에도 또다른 들풀로 핍니다. 이렇게 우리 인생도 이어져가는 세대의 한 부분이 됩니다. 그런데 세대마다 이어지는 것은 생명만이 아닙니다. 지식이나 가치나 전통이나 문화도 함께 이어져 갑니다. 오래전부터 우리에게 이어져온 어떤 것은 긴세월이 지나도 남아있을겁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확실한 것이 있습니다. 이것만큼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 말씀의 진리입니다. 말씀이 증거하는 하나님 모습입니다. 놀랍게도 수천년전 다윗이 경험한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실제가 됩니다. 이것은 우리 다음 세대도 또 그다음 세대에게도 실제가 될 것입니다. 다윗에게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셨습니다. 바로 그 공의의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또한 오는 세대에도 하나님의 공의는 그대로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이야말로 정말 그렇습니다. 이것은 과거 많은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이 되었습니다. 어느날 이것은 우리에게도 구원이 됩니다. 이것은 앞으로도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될 것입니다. 여기 우리 인생의 소중한 의미가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이전 세대가 전해준 말씀의 진리를 잘 받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경험한 말씀의 진리를 다음 세대에 잘 전해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말씀의 진리는 강물처럼 흘러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라진 자리에 다음 세대들이 계속 일어날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증거가 남아있다면 어떻겠습니까? 더우기 이 증거를 통해 예수님 믿게 된 사람들이 대를 이어 예배드린다면 어떻겠습니까?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 그러므로 나나 그들이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고전 15:3-11). 하나님,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기쁜 소식을 듣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것이 저희에게 구원의 은혜가 된 것 감사합니다. 이제 저희가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잘 전하게 해주십시오. ( )가 꼭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시 140-144편 >
7/27/2024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동행하지도 아니하리이다 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 악한 자와 같이 앉지 아니하리이다" (시 26:4-5)
아무래도 좀더 편한 사람이 있습니다. 자연히 이런 사람과 함께 하게 됩니다. 사람마다 얼마나 다릅니까? 하지만 뭔가 잘 통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와는 가치든 취향이든 형편이든 뭔가를 공유합니다. 이런 것이 유유상종입니다. 비슷한 사람들끼리 어울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속사정은 갖가지일겁니다. 하지만 함께 하는 사람을 보면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들어, 가치는 사람 속에 숨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 가치는 행동으로 드러납니다. 우리는 사람의 행동을 보면서 그의 가치를 읽습니다. 마찬가지로 그가 어울리는 사람들을 보고 그의 가치를 압니다. 주님에 대한 성실함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이 주님께 성실한지 아닌지를 어떻게 압니까? 그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하는지를 보십시오. 주님께 성실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도 그럴 것입니다. 또한 그가 어떤 사람들과 어울리는지를 보십시오. 그가 어울리는 사람들이 주님께 성실합니까? 그렇다면 그도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만일 그가 함께하는 그룹이 주님에게서 어긋나 있다면 그도 그럴겁니다. 함께 모여 주님께 적대적인 일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그 그룹이 집단적으로 비인간적인 행동을 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그 그룹이 나쁜짓를 저지르거나 방조할 수도 있습니다. 혼자서는 잘 못하는 짓을 함께 모여서는 쉽게 저지릅니다. 가령, 모여서 늘 남의 흉이나 보는 모임에 즐겨 나간다면 어떻겠습니까? 주님께 성실한 사람이 그렇게 할까요? 여기 다윗은 어떻습니까? 그는 흔들리지 않고 주님을 의지하는 성실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정말 그런지를 어떻게 압니까? 다윗은 자신이 어떤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는지를 말합니다. 다윗은 허망한 사람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악한 사람이 모이는 모임을 미워합니다. 또한 그는 간사한 자와 함께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악한 자와는 같이 앉지도 않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다윗의 행동은 분명했습니다. 그는 앞으로도 그럴겁니다. 이런 점에서 다윗은 전혀 애매하지 않습니다. 이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단호하고 확실할 것입니다. 지금 어떤 사람들과 어울리고 있습니까? 주님, 오늘 당신께 성실하게 해주십시오. 다른 사람에게도 성실하게 해주십시오. 또한 성실한 사람들과 함께 하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사 51-54장>
7/26/2024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나이다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 (시 26:3)
가끔 꽤 괜찮은 사람이 눈에 띄입니다. 옆에서 그를 지켜보는 것이 즐거움입니다. 그는 일을 참 깔끔하게 합니다. 함께 일하고 싶을만큼 역량이 있습니다. 중요한 일을 맡기더라도 든든합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이것만큼이나 중요한 다른 면도 있습니다. 바로 그의 품성입니다. 그는 무엇보다 겸손하고 정직합니다. 또한 흔들림 없이 성실합니다. 그는 인기있는 사람은 아닐 수 있습니다. 오히려 있는듯 없는듯 사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보면 자연히 생기는 질문입니다. '이 사람은 어떻게 이렇게 되었을까?' 이렇게 된 데는 사람마다 나름의 사연과 비밀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부모님과의 관계가 그 사연의 핵심입니다. 또 다른 사람에게는 충격적인 어떤 사건이 그렇습니다. 이렇게 돌발적인 어떤 것이 한사람의 삶을 바꿀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상의 반복되는 일들도 점진적으로 사람을 바꾸어 놓습니다. 대개 한사람의 됨됨이가 어느날 불쑥 생기기는 어렵습니다. 혼자서 열심히 노력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어떤 사람이나 일이나 상황과 계속 부대끼는 가운데 만들어져 가는 것입니다. 한사람의 멋진 품성 한조각은 이렇게 이것이 빚어져온 세월과 사연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 자신에게 이런 좋은 것이 있다면 이것이 어떻게 이렇게 되었는지를 회상해보십시오. 아마 몇몇 중요한 사람들이 떠오를 것입니다. 아울러 어떤 사건들과 긴 세월 부대껴온 어떤 것들도 생각날겁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좋은 것은 다름아닌 주님의 선물임을 인정할 것입니다. 여기 다윗을 보십시오. 그는 이 시편을 시작하며 자신의 완전함, 즉 성실함을 선포합니다. 이것은 흔들리지 얺고 주님 의지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주님의 성품을 언급합니다. 바로 주님의 인자하심과 진리, 즉 성실하심입니다. 여기 다윗의 성실함에 대한 중요한 단초가 있습니다. 다윗의 성실함은 바로 주님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에서 나온 것입니다. 주님의 변치않는 사랑을 매일 경험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주님의 성실하신 말씀과 행동을 매일 본다면 어떤 일이 있겠습니까? 그것도 오랜 세월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경험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바로 이것이 우리에게 성실함으로 남는 것입니다. 주님, 당신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 가운데 살게 해주십시오. 이로인해 저희가 좀더 성실하게 해주십시오. 오늘도 흔들림없이 당신을 의지하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사 48-50장>
7/25/2024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흔들리지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핀단하소서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 (시 26:1-2)
스스로 대견할 때가 있습니다. 자신이 참 잘했다는 느낌입니다. 자신의 기준에 비추어 합격입니다. 이런 느낌은 사는데 큰 활력소가 됩니다. 또한 다른 사람에게 칭찬받을 때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눈에 비추어 합격입니다. 이런 칭찬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판단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다 아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적용하는 잣대도 들쭉날쭉입니다. 다른 사람은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이 우리를 얼마나 압니까? 정확하고 일관된 잣대로 우리를 판단할 사람이 누굽니까? 물론 그렇다고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판단이 쓸모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것이 최종적인 판단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를 최종적으로 판단하시는 분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주님만 우리를 완전히 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만 우리 속 은밀한 부분까지 아십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 중에 주님께 감추어진 것은 없습니다. 우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아시는 분도 주님뿐입니다. 주님의 기준은 어떻습니까? 주님의 기준이야말로 완전하지 않습니까? 이런 주님의 판단만이 최종적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주님의 눈 앞에서 살아야 합니다. 이 시편에서 지금 다윗은 자신의 완전함을 선언합니다. 이 완전함은 흠이 전혀 없는 상태는 아닙니다. 아무리 다윗이라도 어찌 무죄나 무흠을 주장하겠습니까? 이것은 오히려 성실함을 말합니다. 곧 다윗 자신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흔들리지 않고 여호와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윗은 이에 대한 판단을 주님께 의지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주님 눈 앞에서 성실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이나 다른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판단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오늘 다윗처럼 전심으로 주님을 의지하기 바랍니다. 바로 주님이 보시기에 완벽하게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 오늘 당신 눈 앞에서 살게 해주십시오. 흔들리지 않고 당신을 의지하게 해주십시오. 이런 면에서 저희가 오늘 조금이라도 나아지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사 45-47장 >
7/24/2024
"내가 주를 바라오니 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 하나님이여 이스라엘을 그 모든 환난에서 속량하소서" (시 25:21-22)
손에 쥐어야 안심이 됩니다. 빈손이면 아무래도 불안합니다. 쓸 것이 두둑하면 먹지 않아도 배부릅니다. 애쓰던 것이 결과물로 나타나야 든든합니다. 하지만 손에 쥔 것이 없이도 안심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당장 눈앞에 아무것도 없는데 든든한 것입니다. 소위 믿는 구석이 있는 경우입니다. 지금은 없지만 생길 것이 확실하면 그럴겁입니다. 아마 이런 경우는 이미 가진 것처럼 안심할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과의 관계에서 흔한 일입니다. 여기 다윗의 기도가 좋은 예가 됩니다. 이 시편은 주님을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해서 주님을 바라보는 것으로 마칩니다. 여기에 주님을 바라보거나 의지한다는 표현이 24번이나 등장합니다. 다윗은 어려움 가운데서 애타게 주님을 바라봅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것은 주님께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그는 지금 주님의 반응과 행동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직 그의 손에는 쥔 것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의 기도가 이루어지는 것은 앞으로 될 일입니다. 그가 지금 주님을 바라는 중에도 위협과 곤고는 그대로입니다. 하지만 그는 손에 쥔 것이 없이도 든든했습니다. 결국 주님께로부터 받게 될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신비한 그림이 있습니다. 지금 다윗의 손은 비어 있습니다. 그가 기도하던 것은 아직 그의 것이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손이 뭔가 다른 것을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 자신입니다. 다윗이 의지하고 있는 주님의 "성실과 정직"입니다. 지금 주님을 바라는데 손에 잡히는 것이 없습니까? 그런 일은 다윗을 포함해서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의 경험입니다. 아무것도 없어보이는 그 자리에 주님 자신이 계십니다. 주님의 "성실과 정직"도 있습니다. 주님이 하신 약속도, 지금까지 주님이 어떻게 해주셨는지도 있습니다. 아울러 비록 미래적이지만 반드시 될 일도 있는 것입니다. 텅 빈 것같은 손에 이렇게 엄청난 것이 가득합니다. 주님, 지금 당신을 바라봅니다. 저희를 지켜주십시오. 또한 믿음으로 잘 기다리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사 42-44장>
7/23/2024
"내 원수를 보소서 저희가 많고 나를 심히 미워함이니이다 내 영혼을 지켜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오니 수치를 당치 말게 하소서" (시 25:19-20)
힘든게 한두개가 아닙니다. 이곳저곳에 널려져 있습니다. 하나하나 생각하면 참 갑갑합니다. 몇가지가 한꺼번에 닥칠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풀썩 주저앉아 한숨만 쉬게 됩니다. 하지만 힘든 것 중에 정말 힘든게 있습니다. 왠만한건 견디겠는데 이것만큼은 감당이 안됩니다. 바로 '수치'입니다. 가난이 얼마나 힘듭니까? 하지만 이것이 '수치'가 되면 견디기 힘듭니다. 실패의 쓰라림을 아십니까? 이것이 '수치'와 겹치면 극단적인 고통이 됩니다. 험한 일을 해야할 때도 있습니다. 그 자체가 힘들지만 이것이 '수치'가 되면 마음이 무너집니다. 수치는 자존심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지탱하던 마지막 보루가 무너지는 경험입니다. 만일 이것이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얽히면 더욱 힘들어집니다. 특히 원수같은 사람들의 눈과 입은 우리를 더 비참하게 만듭니다. '수치'가 없다면 아무리 힘들어도 어떻게든 견딥니다. 밑바닥에 떨어져서도 꾸역꾸역 일어섭니다. 하지만 '수치'는 우리를 꽁꽁 숨게 만듭니다. 또한 '수치'는 겉잡을 수 없는 분노로 우리를 태워버립니다. 힘들 때 우리가 애쓰는 밑바닥에는 '수치'당하지 않으려는 몸부림이 있습니다. 그런데 믿는 사람에게는 전혀 다른 차원의 '수치'가 있습니다. 주님을 믿고 사는 사람은 자존심의 문제에서 조금씩 자유해집니다. 자연히 이런 차원의 '수치'에서도 자유해집니다. 이제는 오히려 새로운 차원의 '수치'가 생깁니다. 바로 '주님의 명예'에 관련된 '수치'입니다. 우리가 잘못을 저지르면 주님의 명예때문에 수치가 됩니다. 우리가 잘못되어도 주님의 명예때문에 수치가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여기서 주님께 기도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자신을 미워하는 많은 원수를 보시고 지켜달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수치를 당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원수들에게 당하는 것은 있어서는 안되는 수치인 것입니다. 주님의 사람이 이렇게 당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께 피하는 사람이 당하면 주님의 명예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원수들이나 백성들이 이것을 보고 주님을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다윗이 지금 주님께 도와달라고 매달리는 근거가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무슨 일이 있든 다윗처럼 주님께 피하면 됩니다. 주님께 피하는 사람은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 저희를 공격하는 악한 세력을 보시옵소서. 저희를 지켜 구원하시옵소서. 지금 주님께 피합니다. 수치당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사 39-41장>
7/22/2024
"나의 곤고와 환난을 보시고 내 모든 죄를 사하소서" (시 25:18)
내 잘못으로 생긴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내 잘못과 상관없는 어려움도 있습니다. 따라서 어려움을 다 내 탓으로 돌리는 것은 곤란합니다. 사실 우리가 겪는 많은 어려움은 너무 복잡합니다. 그래서 어떤 어려움은 그 요인과 실체를 파악하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이것이 '어려움은 곧 내 잘못'이라는 단순논리가 위험한 이유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유독 어려움 가운데서 자신의 죄를 잘 깨닫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죄에 대한 깨달음에는 때와 장소가 따로 없습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어려움 가운데서 죄가 잘 보입니다. 자신의 죄가 어려움의 직접적인 이유가 아니더라도 그렇습니다. 어째서 그럴까요? 이것도 사실 복합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도 있습니다. 바로 가난한 마음입니다. 어려울 때 우리 마음은 대개 가난해집니다. 어려움이 혹독할수록 더 그렇게 됩니다. 이때 자신의 무력함은 극대화됩니다. 뭔가 다른 도움이 없으면 끝이라는 절박함에 이릅니다. 만일 어려움이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때문에 주님께 살려달라고 매달립니다. 우리는 이렇게 매달리면서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것은 묘하게 우리의 죄있는 모습과 겹칩니다. 어려울때 우리는 우리에게 덕지덕지 붙어 있는 심각한 죄를 보게 됩니다. 자신이 지금 영적 파탄에 빠진 것을 깨닫게 됩니다. 자신에게는 이것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단지 자신의 죄에 대한 심판만 기다릴 뿐입니다. 모든 것은 주님의 처분에만 달려 있는 것입니다. 이것도 가난한 마음입니다. 주님은 이런 가난한 마음에 임하십니다. 이것이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임하는 주님의 통치, 곧 천국입니다. 주님은 가난한 마음 가운데 가장 생생하게 일하십니다. 어려울 때 주님의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는 것이 이때문입니다. 정말 고통스러울 때 주님의 정결케 하시는 역사가 나타나는 것도 이때문입니다. 어려움 가운데 있습니까? 다윗처럼 곤고와 환난에 빠져 있습니까? 혹 이 가운데서 죄가 보입니까? 주님께 바로 자백하고 용서를 구하십시오. 주님, 저희 곤고와 환난을 살펴주십시오. 저희를 이 어려움에서 건져주십시오. 아울러 저희를 정결케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사 34-36장>
7/17/2024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의 도로 죄인들을 교훈하시리로다 온유한 자를 정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의 도를 가르치시로다 여호와의 모든 길은 그의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 (시 25:8-9)
좋은 나무에서 좋은 열매가 납니다. 좋은 사람에게서 좋은 행동이 납니다. 좋은 가르침은 역시 좋은 선생님에게서 나옵니다. 좋은 선생님은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살고, 잘 가르치는 분일겁니다. 주님의 가르침이 좋은 이유는 주님이 좋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선하시고 정직하십니다. 또한 인자하시고 옳으십니다. 주님의 성품에서 주님의 가르침이 나옵니다. 주님의 가르침은 언제나 옳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은 정확하면서도 인자합니다. 주님이 이렇게 좋으신 분입니다. 또한 주님의 가르침도 좋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가르침을 받는 사람은 소수입니다. 대개는 주님의 가르침을 잘 받지 못합니다. 아무리 좋은 가르침도 제대로 받지 않으면 무익합니다. 여기 다윗은 주님의 가르침을 사모하고 있습니다. 주님께 가르침받는 사람의 세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먼저, 자격 부족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여기 "죄인"에 다윗 자신이 포함될겁니다. 주님은 가르침 받을 자격이 부족한 죄인들도 가르치십니다. 주님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은혜입니다. 둘째로, 온유한 마음입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사람은 온유합니다. 온유함은 부드러워진 마음입니다. 그는 주님의 가르침을 저항없이 받아들일겁니다. 마지막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가르침을 지키는 사람이 가장 잘 배웁니다. 행하려고 배우는 것만큼 좋은 교육은 없습니다. 배운대로 행하고 행하면서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가르침이 우리 가슴과 삶에 살아서 꿈틀거립니다. 오늘 좋으신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의 좋은 가르침도 있습니다. 겸손과 감사함으로 주님께 배우십시오. 배운 것은 반드시 지키십시오. 주님의 가르침이 삶에 열매가 될겁니다. 주님, 당신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입니다. 저희를 가르치시고 바른 길로 인도하십시오. 오늘 당신의 가르침을 지키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사 20-22장>
7/16/2024
"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들을 기억하옵소서 여호와여 내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주께서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으로 하옵소서" (시 25:6-7)
어떤 부탁은 거절하게 됩니다. 하지만 거절하지 못하는 부탁도 있습니다. 너무 긴박하고 안타까운 경우는 거절하지 못합니다. 거절하기 힘든 사람이 부탁하는 경우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부탁이 마침 내가 원하던 것이면 더더욱 거절할 이유가 없어집니다. 우리에게는 주님께 나아가 부탁드릴 것이 많습니다. 오늘도 이것저것을 주님께 아뢰게 됩니다. 우리가 드린 부탁은 전적으로 주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주님이 그 뜻대로 이 부탁들을 처리하실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입장에서는 그 결과가 어떨지 늘 궁금해집니다. 그런데 이미 결과가 확실한 것도 있습니다. 주님이 거절하지 못하실 것으로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중에 한가지가 주님의 성품과 일치하는 부탁입니다. 이 시편에서 다윗은 아주 힘든 부탁 하나를 주님께 아뢰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의 젊은 시절에 지은 죄입니다. 이것은 오래전에 이미 엎질러진 물과 같습니다. 이 죄가 지금 그 속에서 되살아나 강한 죄책감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오랫동안 처리되지 않은채 방치된 문제입니다. 이것은 지금 너무 큰 짐과 괴로움입니다. 이 문제는 당장이라도 처리되어야 합니다. 이제 더이상 이것을 안고 지낼 수는 없습니다. 이때 다윗이 의지한 것이 바로 주님의 성품입니다. 주님의 성품 중에서도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입니다. 주님은 영원부터 계신 분입니다. 당연히 주님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도 영원부터 있었습니다. 그의 젊은 시절에도 주님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은 그대로였습니다. 따라서 주님은 그의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도 용서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과연 주님은 이런 다윗의 부탁을 어떻게 하셨을까요? 결코 거절하실 수 없었을겁니다. 이것이야말로 주님이 정말 바라시던 부탁이 아니었을까요? 주님이 꼭 깨끗케 해주시고 싶었던 것이 이제야 처리되는 것입니다. 지금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는 죄와 허물이 있습니까? 주님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지해서 바로 자백하십시오. 주님이 깨끗하게 처리해 주실겁니다. 이것이야말로 주님이 바라시는 바입니다. 또한 주님이 오랫동안 기다려오신 일입니다. 부탁하면 반드시 들어주실 일입니다. 주님, 당신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을 찬양합니다. 이제 저희 죄와 허물을 고백합니다. 저희를 깨끗하게 하시옵소서.
<오늘의 성경읽기 사 17-19장>
7/15/2024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 (시 25:4-5)
모든걸 알고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무슨 일이든 다 알고 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결과를 다 알고 선택하는 경우도 드뭅니다. 이렇게 우리 삶에는 불확실한 요소가 있습니다. 마치 자욱한 안개 사이를 통과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이런 길도 제대로 가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물어물어 가는 것입니다. 모르면 묻는 것이 안전합니다. 제대로 가야 하기때문에 물어야 합니다. 모르면서 아는 체하는 사람은 묻지 않습니다. 제대로 가는 것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도 묻지 않습니다. 결국 이런 사람은 길을 잃고 맙니다. 나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사람은 다 스승이 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좀 부족하더라도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확실한 분이 계십니다. 바로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입니다. 주님은 다 아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제대로 가기를 우리 자신보다 더 원하십니다. 주님이 길을 묻는 우리를 얼마나 기뻐하겠습니까? 여기서 다윗은 이 확신으로 주님께 묻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님의 길이면 확실합니다. 주님이 옳다고 하시는 것이면 옳은 것입니다. 주님이 가르쳐주시는 것은 진리입니다. 주님이 인도하시는 것은 무조건 따르면 됩니다. 반면에 주님이 아니라고 하시면 돌아서면 됩니다. 이것은 한두번 그렇게 한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루에도 수없이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이 종일 주님을 기다리는 이유일겁니다. 불확실한 삶 속에서 확실한 것이 여기 있습니다. 주님 손 붙잡고 한걸음 한걸음 가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를 어떻게 가겠습니까? 되는대로 가려고 합니까? 아니면 매순간 주님께 물어 가겠습니까? 주님, 당신의 길을 가르쳐주십시오. 당신의 진리로 인도해주십시오. 저희가 길 잃지 않고 바른 길 가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사 14-16장>
7/12/2024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 (시 24:7-10)
겸손이 뭘까요? 알듯 모를듯 한 것이 겸손입니다. 겸손에 대한 설명은 별 도움이 안됩니다. 차라리 겸손의 예를 보고싶습니다. 여기 이 시편에 겸손의 한 예가 있습니다. 시편기자는 다윗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본문의 상황은 분명치 않지만 마치 개선장군의 입성같은 느낌을 줍니다. 다윗 자신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뒤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려고 합니다. 그때 다윗은 반복해서 권고합니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그는 예루살렘 성문으로 보이는 문들을 향하여 '문을 활짝 열라'고 외칩니다. 지금 대단한 개선장군이 들어가도록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주목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그 개선장군은 '영광의 왕'인데 다윗 자신이 아닙니다. 그가 누군지를 다윗은 두번이나 설명합니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 지금 실제로 예루살렘 성으로 개선하는 사람은 다윗 자신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자신이 아닌 여호와 하나님이 개선하신다고 선포합니다. 여기서 다윗의 겸손이 두가지로 나타납니다. 먼저, 그는 전쟁의 승리가 자신이 아닌 하나님 때문임을 인정합니다. 바로 '강하고 능한 여호와,' '전쟁에 능한 여호와'가 승리케 하신 것입니다. 그가 전쟁에서 의지한 하나님은 '만군의 여호와'입니다. 그는 하나님 없이는 결코 이기지 못했을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자기 위에 "영광의 왕"이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다른 왕들과 다윗의 차이가 바로 이것입니다. 다윗은 위대한 왕이었지만 자기 위에 진짜 왕이 계셨습니다. 다윗은 그 왕이 시키는대로 하는 한 종에 불과했습니다. 다윗 자신도 그 왕의 보호와 혜택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다윗의 왕이 바로 "영광의 왕" 여호와이십니다. 이것이 겸손의 아름다운 모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보며 '아, 겸손은 이렇게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구나'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혜택을 하나씩 인정해 보십시오. 또한 하나님이 우리 왕이신 것을 인정하십시오. 그러면 겸손을 알게될 것입니다. 하나님, 당신은 저희의 왕이십니다. 당신이 베푸신 모든 혜택 감사합니다. 오늘 당신 앞에서 겸손하게 행하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사 4-6장>
7/11/2024
"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 (시 24:5-6)
늘 든든한 것이 있습니다. 가족이나 친구가 그렇습니다. 오랜 경험과 지혜, 안정적인 일이나 좋은 계획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진짜 든든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이것만큼 믿음직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이것으로 실망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이것이 든든한 것은 우리가 찾는 하나님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찾는 사람을 결코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 찾는 길은 언제 어디서나 열려 있습니다. 심지어 죄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찾는 사람을 통해 일하십니다. 또한 당신을 찾는 사람 안에서도 일하십니다. 하나님을 찾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여기 나옵니다. 바로 '하나님께 복을 받고 의를 얻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하나님께 받는 복이 곧 '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법적으로 의롭다고 여김받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의롭게 사는 것도 하나님을 찾을 때 가능해집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사람에 대한 요구사항이 실제로 이루어지는겁니다.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흔히 이런 의는 한사람에게 머물지 않고 사회적인 의로 번지게 됩니다. 이런 의가 우리에게 이루어진다고 상상해보십시오. 이것만큼 큰 복이 어디 있습니까? 이것만큼 든든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의는 우리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스스로의 힘으로 의롭게 되지 못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의의 복을 받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께 받아서 의롭게 될 수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십시오. 거기서 의의 복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 당신께 나아가는 이 특권 감사합니다. 오늘 무엇보다 먼저 당신을 찾게 해주십시오. 오늘 저희가 조금이라도 더 의롭게 되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사 1-3장>
7/10/2024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시 24:3-4)
아이를 대하는 방식이 있습니다. 반면에 좀 까다로운 어르신을 대하는 방식도 있습니다. 아무래도 옷차림부터 신경이 쓰입니다. 말이나 마음가짐도 신중하게 됩니다. 또한 그 어르신의 말씀과 분위기에도 집중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하나님을 대하는 방식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하나님을 아예 모르면 무시할겁니다. 하나님을 대충 알면 소홀히 대할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대하는 방식은 다릅니다. 다윗으로 생각되는 시편기자는 여기서 질문합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여기서 "여호와의 산"과 "그의 거룩한 곳"은 성소를 말합니다. '오른다' 또는 '선다'는 표현은 예배드리는 것으로 보면 됩니다. 다윗의 질문은 '성소에서 예배드릴 자가 누구인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지방에서 중심지로 올라와 성소에서 예배드리는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이렇게 예배드리기에 합당한 태도는 무엇입니까? 예배 가운데서 하나님을 어떻게 대해야 합니까? 먼저, 손이 깨끗해야 합니다. 이것은 나쁜 짓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마음이 청결해야 합니다. 이것은 한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셋째로,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않아야 합니다. 그 어떤 것도 하나님보다 소중하게 여겨서는 안됩니다. 마지막으로, 거짓 맹세하지 말아야 합니다. 정직해야 합니다. 이 네가지는 서로서로 연결되어 한가지를 말합니다. 바로 거룩하신 하나님께 마땅한 예배입니다. 나쁜짓을 계속하면서 어떻게 예배드립니까? 두마음을 품고 어떻게 예배드립니까? 허탄한 것을 좇으면서 어떻게 예배드립니까? 거짓말을 하면서 어떻게 예배드립니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이 네가지로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를 드리십시오. 하나님, 저희 손을 깨끗케 하시고 저희 마음을 정결케 해주십시오. 또한 허탄한 것과 거짓을 버리게 해주십시오. 저희가 거룩하신 당신께 합당한 예배를 드리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아 5-8장>
7/9/2024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 (시 24:1-2)
하나님의 창조를 어떻게 압니까? 창조에 개입한 사람이 없습니다. 창조를 옆에서 지켜본 사람도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창조를 아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히 11:3). 창조를 다 알고 난 뒤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믿으면 창조를 알게 됩니다. 성경은 창조에 대한 역사나 과학책이 아닙니다. 물론 성경의 창조 얘기 속에 역사나 과학이 포함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창조를 역사적으로나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에 우선순위를 두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창조를 선포합니다. 또한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여기 이 시편도 마찬가지입니다. 시편기자는 창조에 대한 선포와 찬양으로 시편을 시작합니다. 우리가 사는 땅과 세계는 창조되었습니다. 우리 자신을 포함해서 그 안에 거하는 모든 것도 창조되었습니다. 이것을 창조하신 분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당연히 창조된 이 모든 것의 주인은 여호와입니다. 오늘 우리도 시편기자처럼 여기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하늘과 땅의 웅장함과 섬세함을 보십시오. 그 안에 있는 것들이 얼마나 자유로우면서 정확한지도 보십시오. 꽃과 나무와 하늘이 보여주는 아름다움을 누리십시오. 가슴을 활짝 펴고 숨도 크게 쉬어 보십시오. 함께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 속에 얼마나 많은 사연이 있는지도 헤아려보십시오. 우리가 당연한 듯 누리는 건강, 일, 지혜, 가족, 집, 음식, 혜택, 사회와 국가도 보십시오. 이 모든 것이 우리 주님 것입니다. 주님이 주셔서 우리에게 있는 것들입니다. 아이들이 엄마아빠 집을 자기집으로 생각하며 누리듯 누려보십시오. 주님, 당신의 창조를 찬양합니다. 당신의 주권을 찬양합니다. 오늘 이곳에서 당신의 자녀로서 살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아 1-4장>
7/8/2024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시 23:6b)
집이 얼마나 고맙습니까? 집 때문에 어려움 겪어본 사람은 더 그럴겁니다. 나와서 돌아갈 곳이 있는 것입니다. 사실 그 반대의 경우를 상상해보면 끔찍합니다. 비바람이 몰아치면 집은 더 포근합니다. 식구들로 북적거리면 더 큰 힘이 됩니다. 이것은 집이 비록 허름하고 작아도 상관없습니다. 다윗은 이 시편을 마무리하며 "여호와의 집"에 대해 얘기합니다. 그에게 이 "여호와의 집"은 성소를 말합니다. 이것은 아직 성전으로 지어지기 이전 상태입니다. 겉모양은 광야의 장막과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거기서 주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살리로다"라는 말은 "소생시키시고"와 같은 단어입니다. 이 단어에는 '돌아가 다시 산다'는 느낌이 담겨있습니다. 다윗은 어떤 형편에 있든지 주님 집에 들어가 살 것입니다. 그동안도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별별 일이 다 있을겁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들어가 살 "여호와의 집"이 있습니다. 전쟁같은 엄중한 일을 앞두고 그는 여기서 주님을 만날 것입니다. 힘든 일을 겪으며 여기서 힘과 지혜를 얻을 것입니다. 잘못을 저지른 뒤에도 여기서 회개와 용서를 경험할 것입니다. 심한 좌절로 고통하면서 바로 여기서 용기를 얻을겁니다. 여기서 슬픔을 위로받고, 겸손과 순종을 배우며, 감사와 찬양을 드릴 것입니다. 그에게 "여호와의 집"을 떠나 사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을 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 한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가 "여호와의 집"에서 살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의 결단 이전에 주님이 그를 받아주셨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주님이 허락하셔서 그는 언제나 거기 머물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여기가 우리가 살아야할 집입니다. 여기서 모든 것이 시작됩니다. 여기서 모든 것이 진행됩니다. 그리고 여기서 모든 것이 마무리됩니다. 오늘 이 하루를 주님 집에서 시작하기 바랍니다. 주님, 저희를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당신 집에서 살게 해주십시오. 당신과 함께 이 하루를 승리하게 하옵소서.
<오늘의 성경읽기 전 7-12장>
7/6/2024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시 23:6a)
좋은 사람 만나는게 복입니다. 좋은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이 복입니다. 그와 오래 함께하는 것도 복입니다. 그에게 있는 좋은 품성이 복입니다. 그를 통해 얻는 풍성한 혜택도 복입니다. 이것은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또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님 만난 것은 어떻겠습니까?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여기 다윗의 고백이 놀랍습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그도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주님과 오래 함께 했습니다. 그가 주님과 함께 하는 동안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도 함께 했습니다. 그가 어디 있든지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그를 따랐습니다.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앞으로도 그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바로 거기에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우리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고 쉴만한 물 가로 인도하십니다.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우리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주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심지어는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 때도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하십니다. 또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보란듯이 우리에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머리에 발라주십니다. 어떻게 평생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누릴 수 있을까요? 평생 주님과 함께 하면 됩니다. 주님이 계시면 당연히 주님의 성품인 선하심과 인자하심도 함께 합니다. 오늘 주님과 함께 하기 바랍니다. 선하심과 인자하심도 함께 할겁니다. 주님, 당신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찬양합니다. 오늘 매순간 당신과 함께하는 복을 누리게 하옵소서. 당신의 선하고 인자하신 손길을 누리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잠 25-31장>
7/5/202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 23:4)
좀 평탄하게 가면 얼마나 좋을까요? 꼭 험한 길을 만나게 됩니다. 가끔은 좀더 극단적인 길을 지나야 합니다. 여기 나오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가장 깊고 어두운 골짜기를 말합니다. 아마 죽음이 가까이 느껴지는 길일겁니다. 한걸음만 더 가면 진짜 죽게 됩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죽을 것같이 힘든 상황입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이 있습니다. 이 길을 두려움없이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길을 함께 가시는 목자 때문입니다. 목자는 이 길을 훤히 잘 알고 계십니다. 목자는 우리의 어떤 형편도 다 아십니다. 우리에게서 목자가 보지 못하시는 형편은 결코 없습니다. 더나아가 목자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누구든지 꺼리는 이 길을 함께하시는 분이 우리의 목자입니다. 함께 하시면서 '지팡이'로 지켜주시고 '막대기'로 인도도 해주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안전합니다. 또한 우리는 두려움보다 오히려 평강과 확신을 가지고 이 길을 지납니다. 우리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피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하나님께 보호받으며 이 골짜기를 지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목자가 인도하시는 바른 길이라면 늘 평탄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바른 길인데 이렇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있습니다. 이 골짜기를 통해 우리는 목자를 더 알고 사랑하게 됩니다. 또한 이 골짜기를 통과하며 목자에게 순종하는 법을 배웁니다. 이 골짜기는 우리를 무너뜨리기보다 오히려 우리를 세워줍니다. 오늘 어디를 통과하든 목자가 함께하시는 것을 믿으십시오. 특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도 목자가 동행하시는 것을 잊지마십시오. 하나님, 저희 형편을 살펴주십시오. 저희와 늘 함께 해주십시오. 저희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보호해 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잠 20-24장>
7/4/2024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시 23:3b)
기왕이면 쉬운 길을 가고싶습니다. 이것은 편안하고 안전한 길입니다. 어쩌면 빠른 길일 수도 있습니다. 이 길은 재미도 있고 인기도 있습니다. 하지만 쉬운 길이 곧 바른 길은 아닙니다. 물론 바른 길이 쉬울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힘들 때도 많습니다. 쉬운 길만 찾다보면 바른 길을 놓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주님 따르는데 있어서 기본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자기 부인'입니다. 우리에게 자기를 주장하고 내세우려고 하는 자연스러운 욕구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에 대해 '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쉬운 길을 버리고 바른 길을 가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도, '용서하고 사과하는 것'도, '무슨 일이든 주 앞에서 행하는 것'도 다 바르지만 쉬운게 아닙니다. 바른 길 가기 원합니까? 이것은 마음을 단단히 먹는다고 잘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만일 믿음직한 누군가가 우리를 이끌어준다면 가능해집니다. 그는 바른 길을 잘 아는 분이어야 합니다. 또한 저항하거나 쉽게 포기하는 우리의 연약한 속성도 다룰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손을 붙들고 한걸음씩 발을 떼도록 가르쳐주는 분이어야 합니다. 때로는 호되게 혼내고 또 때로는 어깨를 두드리며 인도하는 분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분의 도움으로 비로소 쉬운 길보다 바른 길 가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그런데 이분이 우리의 목자이신 하나님이면 완벽합니다. 목자는 양들을 어디로 이끌지 압니다. 또한 어떤 길로 갈 지도 압니다. 하지만 그 길이 쉬운 길만은 아닙니다. 어떤 때는 힘들어도 가야할 바른 길입니다. 목자는 회초리 들고 멀리서 팔짱끼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양이 제대로 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따라서 필요한대로 적극적으로 돕습니다. 목자는 자신의 명예를 걸고 양을 바른 길로 인도합니다. 오늘 우리가 가는 길에 하나님의 명예가 걸려있습니다. 하나님, 저희의 연약함을 도와주십시오. 저희가 쉬운 길보다 바른 길 선택하게 해주십시오. 오늘 저희를 통해 당신의 이름이 높아지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잠 15-19장>
7/3/2024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시 23:3)
꼭 상처가 생깁니다. 일하다가, 운동하다가, 심지어는 가만히 있다가도 상처를 입습니다. 가끔은 큰 상처로 심각한 후유증을 겪습니다. 그런데 상처는 몸에만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 생기는 상처도 있습니다. 언뜻보면 눈에 잘 띄지 않아도 이것도 상처입니다. 이것도 아프고, 힘들고, 불편합니다. 물론 치유와 회복도 필요합니다. 어떤 마음의 상처는 장애처럼 거의 평생 가기도 합니다. 또 어떤 상처는 삶에 치명적입니다. 상처는 다윗에게도 예외가 아닙니다. 사울왕에게 쫓기며 받은 상처를 생각해보십시오. 자신의 아들 압살롬에게 받은 상처는 어떻습니까? 그는 마치 사나운 짐승에게 물리거나 절벽에서 떨어져 상처입은 양과 같았습니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이제 거의 죽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를 돌보는 목자가 있습니다. 목자는 정성을 다해 상처를 닦고 꿰맵니다. 약을 바른 뒤 따뜻하고 편안하게 쉬게 합니다. 목자는 밤새 양의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살피다가 물도 먹여보고 음식도 먹여봅니다. 목자는 양이 신음하는 동안 함께 아파합니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고 흐릅니다. 마침내 양이 눈을 뜨고 비틀거리며 일어납니다. 이것은 목자에게 가슴 뭉클한 순간이 됩니다. 양은 이제 이리저리 뛰어 봅니다. 그러다가 다른 양들 속으로 섞여 들어갑니다. 그제서야 목자는 안도의 한숨을 쉽니다. 이것이 목자입니다. 이것이 상처입은 양의 치유입니다. 상처없이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우리는 곳곳에서 상처를 받습니다. 심지어 가까운 사람에게서 받는 쓰린 상처도 있습니다. 때때로 이 상처가 너무 깊어 쓰러져 있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치유하시는 목자가 계십니다. 그분의 손길을 통해 우리는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그분은 상처입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또한 우리 상처를 치유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 당신은 저희 목자이십니다. 저희 마음 속 깊은 상처를 살펴주십시오. 당신의 능력으로 께끗케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잠 10-14장>
7/2/2024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시 23:2)
먹고 사는게 문제입니다. 이것은 기본적인 욕구 중에서도 기본입니다. 물론 먹고 사는 것이 다는 아닙니다. 하지만 이것은 건너뛸 수 없는 것입니다. 마치 고급 차든 싸구려 차든 연료없이는 움직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많은 사람에게 먹고 사는 것이 전쟁입니다. 이것은 부모님 세대나 우리 과거의 일상이었습니다. 주변을 조금만 벗어나면 지금도 흔한 일입니다. 우리가 지금 애쓰는 것을 들여다 보십시오. 그 밑바탕에도 이 문제가 있습니다. '어떻게 먹고 살지?' 이것은 다윗에게도 예외가 아닙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놀라운 비밀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의 평생을 통해 배운 것입니다. 바로 먹고 사는 것이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하늘만 쳐다본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가 어떤 형편에 있든지 그를 먹이시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심을 깨달은 것입니다. 목자는 어디에 꼴이 있는지를 미리 알아 봅니다. 그는 양들을 그 풍부한 초장으로 인도합니다. 여기서 양이 할 것은 목자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서 실컷 먹으면 됩니다. 목마르면 물도 마시고 배부르면 쉬면 되는겁니다. 이 얼마나 서정적이고 목가적인 풍경입니까? 하지만 사실 이것은 처절한 삶 중에 맛보는 풍요와 평강입니다. 하나님 믿는 사람에게 이것은 정말 그렇습니다. 여기서 꼴은 단지 음식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음식을 포함해 우리의 모든 기본적인 필요를 말합니다. 더나아가 우리의 영적인 필요도 말합니다. 우리의 영육간의 모든 필요가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로서 이 모든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양으로서 이 필요를 하나님께 의지합니다. 오늘 우리의 필요를 헤아려 보십시오. 이 모든 필요를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하나님, 당신이 저희의 목자이십니다. 저희의 모든 필요를 알고 계십니다. 오늘 저희의 필요를 채워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잠 5-9장>
7/1/2024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 23:1)
"내게 부족함이 없다!"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하면 코웃음을 치게 됩니다. "네가 고생을 덜 했구나"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심지어 화가 날 때도 있습니다. 현실을 모르는 사람의 철없는 말처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윗의 이 고백은 참 놀랍습니다. 그가 평생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는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의 이 고백은 감동과 놀라움을 넘어 충격이 됩니다. 이것은 다윗의 생애 말기의 고백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별 생각없이 던진 가벼운 한마디가 아닙니다. 현실을 뼈저리게 경험한 사람의 삶이 묻어있는 말입니다. 다윗의 삶에 물론 신나고 화려한 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처절하고 어두운 면도 많습니다. 이 모든 과정을 통과한 사람이 지금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게 부족함이 없다!" 지금까지 부족함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앞으로도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바로 이 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이것이 이 고백을 듣는 우리의 질문입니다. 다윗은 이에 대해 한마디로 말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의 부족함 없는 삶의 비결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해주시길래 그런지는 "목자"라는 표현에 잘 담겨 있습니다. 그는 당시 모두에게 익숙한 "목자"의 비유를 통해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설명합니다. 여기서 그에게 하나님은 "나의 목자"입니다. 하나님은 자신과 언약적 관계를 맺고 계신 분입니다. 그에게 하나님은 막연하고 이론적인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과 그는 개인적으로 잘 아는 사이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삶에 구체적으로 일하시는 분입니다. 그가 부족함이 없는 것은 하나님이 그의 목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고백도 됩니까? 이것은 우리가 지금 얼마큼을 가지고 있는가를 묻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것은 하나님이 "나의 목자"이신가를 묻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목자"이십니까? 하나님, 당신은 제 목자이십니다. 그리고 저는 당신의 양입니다. 오늘 저도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하게 해주십시오.
<오늘의 성경읽기 잠 1-4장>